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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내사복시(內司僕寺) 내승(內乘) 이억기(李億祺) 주상전하의 성은에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나이다."
'이억기(李億祺)? 종친?'
'그렇다면 이 사람이 전라우수사로서 임란 때 바다에서 이순신과 함께 뛰어난 공을 세우는 사람 아닌가? 설마 벌써부터 말이나 기르는 곳의 관원이 되어 있을 줄이야.'
나는 숨은 보석을 발견한 듯해 새삼 그의 얼굴을 다시 보려했으나,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바람에 볼 수는 없었다.
이억기는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 17세에 사복시 내승(司僕寺 內乘)이 되고, 그 뒤 무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거쳤다. 특히, 북방 오랑캐가 침입했을 때 경흥부사로 임명되어 적을 격퇴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사람이라, 지금 이 장소에 있는 것이다.
"전하, 며칠 내에 잘 먹을 것이니, 너무 심려 마옵소서!"
"알겠소. 경이 어렵게 선물한 것인데, 죽일까 염려되어 과인이 소란을 피운 것이니, 그렇다면 이만하고 갑시다."
"신,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뭔데?'
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선조 균이었다.
"저 자를 신에게 주십시오. 몇 사람 뽑아가는 사람들 중의 하나에, 저 사람도 포함시키고자 함입니다."
"왜? 말 당번이라도 시키시게?"
"네, 전하!"
여러 말 해봐야 일만 번잡해지므로 얼른 수용하고 마는 나였다.
"내승 하나 정도야 조선에 하나 더 있으나 마나 하니, 데려다 쓰려면 쓰오. 그런데 과인에게 먼 족친이 되니........."
"조선 팔도에 어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오리까?"
"하하하.........! 그렇지요?"
비로소 자신이 임금이라는 것을 깨닫기라도 한 듯 밝게 웃으며 내 뜻에 따라주는 선조 균이었다.
"여봐라, 내승! 이 억기라 했더냐?"
"네, 주상 전하!"
"오늘부터는 여기 있는 의빈을 따르도록 해라!"
"어인 말씀이온지........."
귀가 있어 우리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듣긴 들었으되, 전혀 실질적으로 무슨 내용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이억기의 주저된 물음이었다.
"여러 소리 할 것 없다. 어명을 거역하겠다는 말이냐?"
나에게는 달리 상당히 고압적으로 나오는 선조 균이었다.
"신 주상의 명을 따르겠나이다."
"다른 사람에게 일은 맡겨두고 당장 앞장서거라!"
"네, 주상 전하!"
졸지에 기미(羇縻) 즉 소나 말을 다루기 위하여 목에서 고삐에 걸쳐 얽어매는 줄에 엮이어 내 앞에 서게 된 이억기의 표정이 과히 볼만 했다.
뜨악한 표정을 얼른 감추고 기미에 씌어 내 앞을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의 표정은 종내 무엇에 홀렸나 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이억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저녁이었다. 오늘은 어제 내가 얘기 한 것이 있어서 인지, 오 건 사형이 나를 찾아왔다.
"어서 오시오. 사형!"
"고맙소. 의빈!"
곧 술상을 내오게 한 나는 그와 마주앉았다.
"1년 가까이 해외로 떠돌다 보니 사형은 물론 스승님께도 안부 한 자 전하지 못했소이다. 스승님은 편안히 잘 계시겠지요?"
"물론 나도 정사에 얽매이다보니 찾아뵈올 길은 없었으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새로 들인 젊은 제자를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하신 모양이더이다."
"그게 누군데요?"
"곽재우라고, 올해 약관의 청년인데 문무에 두루 재주가 출중한 모양이오. 해서 따님이라도 있으면 출가를 시키고 싶으나, 애석하게도 그러하니....... 외손녀라도 주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아끼시는 모양이오."
"호오~! 그래요?"
이렇게 반응하고 있었지만 벌써 나의 내심은 홍의장군을, '어떻게 하면 내 밑으로 부릴까' 하는 음흉한 계책을 꾸미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마침 이때 나의 표정을 숨겨주기라도 하듯 주안상이 나왔으므로 우리는 저녁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정인홍 사형과 김우옹 사제 및 그 밑의 사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조보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가 전한 소식에 의하면 동문이 주가 되어 발행하는 나의 개인지인 한양순보는 주로 왕의 업적을 칭찬하는 기사 아니면,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실생활에 관한 기사가 많이 실린다 했다. 예를 들면 근간에 새로 들여와 전국적으로 보급이 확대되고 있는, 옥수수와 토마토 호박 등의 올바른 재배법이며, 또 어디 가면 이 종자를 구할 수 있는지 안내서 역할까지 한다 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 다른 동문들에 대해서는 오 건 사형과 마찬가지로 탐심을 품지 않았다. 조정에도 나를 밀어 줄 어느 정도의 힘은 있어야 하므로 내버려 둔 것이다. 물론 조보 발행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는 나였기에 그렇게 한 측면도 있었지만, 사제들은 몰라도 사형들은 좀 개인적으로는 껄끄러워 그렇게 한 측면도 있었다.
오 건 사형과 나의 대화가 밤이 이슥하여 끝나고 나 혼자 사랑채에 자려니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부인을 넷씩이나 두고도 이 무슨 청승인가 싶은 게, 귀국해 아직 안부 편지 하나 전하지 않은 내 무관심의 죄과라고 생각하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몸을 정갈히 하고 스승 조식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이야 뻔해서 스승의 안부를 물음은 물론, 내 자랑도 좀 과장을 섞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하고, 끝으로 곽재우를 제게 보내면 잘 가르쳐서 큰 인물을 만들어보겠다는 탐심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편지를 봉한 나는 하인 하나를 불러 이 서간을 전하게 하고, 이억기 또한 불러 오늘 내에 짐을 챙겨 나를 수행하도록 했다. 또한 오후에는 인편에 전한 성혼과 김효원의 이삿짐과 함께 가족이 도착하여, 하룻밤을 우리 집에서 머물게 한 후, 이튿날은 바로 신안 비금도로 배편에 띄웠다.
그날 오후 나는 선조 균을 찾아가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성명 석 자를 제출하고는, 이들을 수배해 보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많지 않은 숫자인데다 최고위 직이라야 종오품 판관(判官)이 고작이었으므로, 선조 균 또한 내 청에 흔쾌히 응해 사람을 찾아주기로 했다.
다음 날 나는 이억기는 물론 임 호위장 이하 백인의 호위를 데리고 남행길에 올랐다. 청주 목사로 재직하고 있는 이율곡을 만나보러 가기위함이었다. 모두 말을 타고 있었으므로 남하하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천안을 지난 나는 현대의 독립기념관이 있는 병천 즉 당시 지명으로는 목천 현(木川 縣)으로 접어들었다. 청주로 가는 지름길이도 했지만 한 사람을 수소문하기 위해서였다. 임란의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名將)이, 지금 내가 찾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막상 목천 현까지는 왔으나 김시민의 집이 어느 곳인지는 자세히 모르는 지라,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일일이 탐문하기에 이르렀다. 탐문 내용은 이런 일화를 들려주고 그 소년의 집이 어디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김시민이 10세가 되기 전 길가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천안군수 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 하자,
"한 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 할 수 있느냐"
고 호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장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 되겠구나!"
하면서 길을 비켜 지나갔다 한다.'
위의 내용과 내용을 가지고 탐문을 하자, 채 다섯 사람이 지나가기도 전에 채 약관이 안 되어 보이는 청년이, 자신과 동무라면서 백전촌(栢田村)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청년의 도움으로 쉽게 그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제법 살기가 택택한지 기와집 여러 채가 딸려 있었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나를 수행한 하인이 부르자, 집안의 머슴인지 노비인지 모를 사람이 빼꼼 대문을 열고 물었다.
"어디서 온 누구라 아뢸까요?"
"한양에서 온 의빈 윤 흥이라 하면 알지도 모르겠다."
"그대로 전하겠사옵니다."
하인이 사라지고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아, 기골이 장대한 약관 가까이 되어 보이는 청년 하나가 나타나 우리를 응대하였다.
"의빈마마라 하시면 윤원형을 제거하는데 일등 공을 세운 그 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그 장본인이오."
내가 불쑥 나서서 대답하자 그 청년이 말했다.
"구암(龜岩) 김시민(金時敏)이라 하옵니다. 높으신 이름 많이 들었사옵니다. 궁벽한 이 외진 산골을 무슨 연유로 찾으셨는지 모르겠사오나, 일단은 안으로 드시지요."
"고맙소."
나는 곧 김시민의 안내로 집안의 사랑채로 안내되었다. 임 선달과 이억기 그리고 내 전담 하인 개똥이만이 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호위병들은 밖에서 번을 서는 가운데 우리의 출현에 갑자기 집안이 분주해졌다.
김시민과 나는 사랑채에서 좌정하였다. 마주보고 있자니 그에 대한 훗날의 일화가 떠올라 새삼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김시민은 내버려두면 25세 때인 1578년(선조 11년)무과에 응시하여 급제를 하게 된다. 급제하자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제수 받아 봉직하게 되는데, 강직한 그는 부임 초부터 상사와 부딪치게 된다.
김시민이 부임해 보니 군기(軍器)는 녹슬고 군기(軍紀)는 해이하여 일조유사시에는 쓸 만한 병기와 군인이 없음을 개탄하여 마지않았다. 이를 본 김시민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언젠가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방의 최고책임자인 병조판서를 찾아뵈었다.
'소관이 훈련원에 몸담아 보니 군기가 녹슬고 군인의 기강이 해이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국가에 변란이라도 생긴다면 속수무책이 될 터이니, 대책을 강구하셔야 되겠습니다.'
라고 부임하자마자 느낀 소감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병조판서는
'지금같이 태평성대에 군기를 보수하고 훈련을 강화하라니, 올바른 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만약 훈련원 군사들을 조련하고 병장기를 만들면, 백성들을 두려움 속에 몰아넣는 결과가 되리니 망언이로다.'
하면서 젊은 혈기에 분별없는 소리를 한다고 질타하는 것이었다.
김시민은 사리를 따져 재차 간곡히 건의 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질책으로 일관하였다. 김시민은 올바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수모만 당하자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군모를 벗어 병조판서가 보는 앞에서 발로 짓밟아 버리고, 사직서를 써서 던져 버린 후 훌훌 털고 일어서서 나왔다.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여러 해 동안 불우한 세월을 보냈다. 1583년 이탕개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우는 것으로, 다시 관문에 들어서는 그였다.
이런 그의 일화를 생각하고 있자니 그가 새삼 다시 보여 내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나이도 많고 하니 하대를 해도 되겠지?"
"네. 진즉부터 그렇게 하셨어야 했사옵니다."
"좋네. 무예와 학문은 좀 익혔는가?"
"궁벽한 산골이라 나름대로 익힌다고 익혔지만 어떨지 모르겠사옵니다."
"좋네. 무예와 학문이야 뛰어나게 익히면 익힐수록 좋지. 하지만 요즘 세상은 그게 전부다가 아닐세."
"네?"
내 말이 이해가 안 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김시민이었다.
"조총이라고 들어보았나?"
"금시초문이옵니다."
"내 그보다 더 위력적인 총을 한 번 보여줄 테니, 한 번 보겠나?"
"저야 좋지요.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요."
"주변에 꿩이나 토끼 같은 것이 많은가?"
"그야 산에 오르면 많이 볼 수 있지요."
"사냥을 나가서 그 위력을 한 번 보여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의빈마마!"
마침 이 고장에 오니 많은 눈은 아니지만 눈이 쌓여 사냥하기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김시민을 일으켜 세운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 과정에서 술상을 준비하고 있으니 자시고 가라는 것을, 나는 사냥 후로 미루고 나는 그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나는 곧 호위병들에게 말 등의 천에 둘둘 말아 싸여진 천보총을 꺼내도록 하고는, 곧 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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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고맙습니다!
^^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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