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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그렇지만 북해도의 가을은 벌써 겨울 냄새가 풍겼다. 산간지방에는 얼음이 얼고 눈발이 흩날리기도 했다. 더 추워지기 전에 나는 따뜻한 남쪽나라를 향해 출항했다.
긴 항해 끝에 유구국에 도착하니 완전히 난리가 났다. 금방 돌아올 줄 알았더니 항해시간 포함하여 6개월 만에 돌아왔으니, 나를 따르는 군사들은 물론 유구의 쇼호 국왕까지 몸소 부두에 마중을 나왔다.
그런데 유구 국왕 뒤에는 출항할 때도 보이지 않던 나랑 하룻밤 잔 무희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하룻밤 잔 인연 때문인지 유독 시선이 가서 그의 전신을 세세히 훑자니 그녀의 배가 좀 이상했다.
좀 불룩하니 아가씨 치고는 배가 너무 나온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녀만 자꾸 쳐다볼 수 없는 노릇이라 나는 시선을 거두고 환영 인파에 휩싸여 궁으로 들어갔다. 왕의 요청에 의하여 나는 이층의 정전으로 갔다.
서로 자리를 잡고 앉자 왕이 말했다.
"기다리느라 눈이 짓물렀지만 아무튼 별 탈 없이 돌아와 줘서 다행이오."
"전하의 덕분이 아닌가 하옵니다."
"무슨.........? 아무튼 인사라도 그렇게 하니 고맙소. 하고 내 치하의 말을 또 해야겠소."
"말씀하시죠."
"채 한 달도 안 되어 장령이 거느린 휘하의 장수들이 날뛰던 무리들을 모두 진압하여 처형하는 개가를 올렸소."
"이 또한 전하의 홍복이 아닌가 합니다."
"빈말은 그만 두고 이제 실질적인 이야기를 나눕시다."
이렇게 운을 떼고 입술을 축인 국왕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빠른 시일 내에 혼례를 올려야겠소."
"네?"
아닌 밤중에 홍두깨요, 자다 봉창이라고,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가 싶어, 놀란 내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부마는 눈치 채지 못 하였는가?"
'무슨 또 부마야?'
면전에서 바로 뱉고 싶은 말을 억지로 참고 내가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도통 이해를 못하겠사옵니다."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그래도 군사들 하나는 제대로 훈련시켜 놨으니 다행이지 원......... 쯧쯧........!"
종내는 끌탕까지 하는 국왕이었다. 그래도 내가 눈치를 못 채고 있자 국왕이 말했다.
"여기서 떠나기 전날 밤 잔 무희가 바로 이 나라의 공주였소."
"무슨 그런 일이..........!"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국왕의 폭탄 발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고 그 아이가 회임까지 했으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이오?"
'독박 썼다!'
내심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그날 밤의 풍경을 더듬어 보았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일반 무희치고는 대담성도 그렇고 좀 무언가 이상한 면이 많았다.
"아이고, 등신 같이 그런 눈치 하나 못 채고 희희낙락 했으니........."
지금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이도 하고, 계획적인 접근에 화도 났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시위를 떠난 화살이요,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나는 내심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결심을 했다.
사내대장부가 일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지 어쩌겠는가!
결심을 굳히자 내가 말했다.
"모르고 한 짓이지만, 일을 저질렀으면 응당 책임을 져야죠."
"하하하........! 역시 자네는 사내대장부일세!"
'에이 씨, 그런 말 듣자고 한 얘기 아니거든요.'
나는 내심 중얼거리며 홍소를 터트리는 국왕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쇼린 게 있느냐?"
"네, 아바마마!"
휘장 뒤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나 보다. 국왕이 부르니 바로 휘장 뒤에서 나타나는 공주였다.
"공주도 다 들었지?"
"네, 아바마마! 아바마마가 보신 대로 역시 멋진 사내대장부이옵나이다!"
"푸 하하하.........! 어떠냐? 이 애비의 혜안이? 가서 나란히 앉아 보아라."
"부끄럽사옵니다."
"새삼 부끄러울 게 뭐 있느냐? 만리장성을 쌓은 사람끼리."
아, 둘이 시 세워 한마디씩 하는데 나는 속에서 천불이 솟아 혼났다.
"한 번 가서 나란히 앉아보래도 그러는 구나!"
국왕의 재차 떨어진 독촉에 마지못한 듯 천천히 옥보를 움직여 내 곁으로 오는 쇼린 공주였다. 나는 이미 지은 죄(?)가 있는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헛기침만 하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내 곁에 온 공주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무사히 다녀오셔서 천녀 매우 기쁘옵나이다."
"고맙소!"
다른 할 말도 없고 해서 나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일일이 여삼추였사옵나이다."
"..........."
할 말도 없어서 내가 가만히 앉아있자 다시 한 번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공주가 길게 끌리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더니 조신하게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허허허.........! 둘이 그렇게 앉아 있으니 얼마나 보기 좋으냐? 정말 한 쌍의 원앙이 따로 없구나!"
"부끄럽사옵나이다."
'아, 젠장!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에 부끄럽다 소리는.........'
내심 울려나오는 욕설을 참고 나는 묵묵히 앉아있었다.
"부마도 돌아오고 했으니, 가례를 올려야겠다. 언제가 좋겠느냐?"
"그런 것은 이런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알았다, 네 의중을. 그렇게 하기로 하자."
"부마는 가례를 올리는데 대해 불만이 없지?"
"이제 와서 어쩌겠습니까? 뜻에 따라야지요."
"고맙네!"
"내 정식으로 날짜를 잡아 통보할 테니 그렇게 알게. 하고 모처럼 두 사람이 만났으니 산책이라도 하지 그래?"
"감사하옵니다. 전하!"
어차피 혼례를 올릴 것이라면 마다할 필요가 없어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주의 손을 잡아갔다.
나의 행위에 살포시 내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는 공주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살짝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그녀가 곧게 일어나 내 손을 잡고 따라 나왔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연잎이 가득한 원감지로 향했다.
"내가 속은 느낌인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
"이제 와서 쩨쩨하게 사내대장부가 무슨 소리예요?"
아까 정전에서와는 확연히 다른 공주의 태도였다.
"설령 제가 무희였더라도 순결한 처녀를 자빠뜨렸으면 책임을 져야 했을 것 아니 예요?"
공주의 말에 나는 한마디로 벙 쪘다.
"그게 본래 공주의 성격 이오?"
"그래요. 아무리 속임수라지만 일국의 공주가 무희가 되어, 반라의 차림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춤을 추고, 적극적으로 유혹을 할 수 있겠어요. 저와 같은 대담성이 있으니 그렇지요."
"이제 결혼 약속까지 받았다 이거요?"
"이런 제 성격이 싫으세요? 내숭 떠는 것 보다는 백 번 낫잖아요?"
"그런 면도 있소만........"
"아, 아이가 노는 것 같아요. 제 배 한 번 만져보시겠어요?"
6개월 만에 뱃속의 애가 노는지 안 노는지 잘 모르겠지만, 대담해도 너무 대담한 쇼린 공주였다.
"왜 싫으세요?"
"우리를 지켜보는 눈들이 있을 것이오."
"그게 우리의 사랑 놀음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오늘은 공주의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에 완전히 수세에 몰리는 나였다.
"험, 험........! 그럼, 어디 한 번 만져봅시다."
"그렇다고 정말 만지시게요?"
'이건 또 뭔 소리야!'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태도에 내가 화가 나서 막 뭐라고 하려는데,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따, 밤에 봐요. 설마 문 잠그고 주무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그녀가 치마를 살짝 들고는 조신하게 걸어갔다.
'저 행위는 또 뭐야?'
천방지축의 공주 때문에 시종 어안이 벙벙한 나였다.
그날 밤.
나는 낮에 당한 데 대해서 화가 나서 정말 문을 잠그고 잤다.
그러나 소리를 질러 전부 깨워놓겠다는 그녀의 협박에, 나는 문을 따고 그녀를 침전으로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잠자리에서도 자신이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나를 애무한다든가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보수적 기질이 있는지 그렇게 했다면 혼례로 지랄이고, 나는 다음날 바로 짐 싸서 도망갔을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오래 사귀지 않으면 모른다는 말이 나왔나 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그녀 측에서 정한 혼례날짜가 앞으로 3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 국왕이 나눌 이야기가 있다고 나를 호출해서 나는 정전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불러계시옵니까? 전하!"
"어서 오오, 부마!"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내가 좌정을 하니 국왕이 대뜸 물었다.
"접해보니 공주의 성격이 보통이 넘지요?"
"네, 웬만한 남자보다 더 화통한 것 같습니다."
"성격이 그래서 그런지, 나와는 아주 잘 어울린다오."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과인은 그대가 가례를 올리는 날로, 왕위도 선양을 하려하오."
"아니 되옵니다. 전하!"
"여러 말 할 것 없소. 내 나이 육순이 다 되었거니와, 사십 년을 이 가시방석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자니 내 지레 죽겠소이다. 그러니 나를 살려주는 셈치고 보위에 오르시길 바라오."
"저는 아직 이곳저곳에 할 일도 많고........."
"그야 어진 신하에게 맡기고 그대는 관리만 잘 하면 되는 것이지. 뭐 어려울 게 있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보다시피 내게는 그만한 인물들이 주변에 없구료."
'참, 내 이거.........!'
내심 한숨이 절로 나오는 나였다.
'이를 어찌한다?'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국왕의 채근이 이어졌다.
"그런지 알고 마음의 준비나 해두오. 오늘은 내 피곤하니 이만 쉬고 싶소."
이제 축객령까지 내리니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선양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주 싫으면 깽판을 쳐서라도 저지하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니 못 이긴 체 나도 승낙하고만 것이다.
10월 3일이 되었다.
이 날이 내가 혼례를 올리는 날임과 동시에 유구국의 국왕에 취임하는 날이었다. 혼례는 없는 살림을 쥐어짰는지 아주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어 쇼호 국왕의 선양에 발표에 이어, 내가 유구국 국왕에 오르는 성대한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다보니 아침 사시 정에 시작된 예식이 내 취임식까지 마차니 한낮이 한참 기운 시간에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성대한 주연을 베풀었으며 대 사면령을 내려 그나마 몇 있던 죄수들마저 풀어주었다.
이렇게 생각지 못한 유구국 국왕에 취임한 나는 그동안 이 나라를 이끌어 온 섭정 이하 삼사 관원들을 당분가 그대로 유임시켰다. 대신 송익필을 승정원이라는 직제를 신설하여 도승지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군사직도 새롭게 신설하여 권율을 육해군 장관에 임명하여 그의 부하들과 함께 유구국의 병권을 맡겼다.
그렇게 나라의 기틀을 대충이나마 다져놓았는데, 하루는 섭정 난잔이 내게 와서 고했다.
"전하! 곧 명나라 조정에 동지사(冬至使)를 보낼 준비를 하셔야 하옵니다."
"본 왕국은 몇 년에 한 번 조공을 하지요?"
"그전에는 2년에 한 번씩 조공 사절을 보냈으나, 남양에 양이가 준동한 이래로는 삼년에 한 번으로 늦추어졌습니다. 그래도 힘이 없는 저희들로서는 항변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흐흠........! 그렇군요. 그럼, 동지사라면 동지 즈음에 출발하여 섣달 안에만 돌아오면 되는 것 아니오?"
"맞사옵니다. 전하!"
"좋소. 헌데 조공품으로 아국에서는 주로 무엇을 보냈지요?"
"신이 지난번의 조공품 물목을 가져왔으니 보시지요. 전하!"
내가 받아 읽어보니 가지 수가 되게 많았다.
[예물로는 유청귀승단화금(柳靑龜勝團花錦) 1단, 대홍편지금단(大紅遍地金段) 2필, 금황목단화단(金黃牧丹花段) 1필, 천축상등오채수건(天竺上等五彩手巾) 1조, 서번상호이양수건(西番上號異樣手巾) 1조, 상아(象牙) 2조, 서각(犀角) 6개, 우각(牛角) 4개, 석(錫) 2천 근, 소목(蘇木) 1천 근, 호초(胡椒) 1천 근, 목향(木香) 2백 근(觔), 단향(檀香) 2백 근, 정향(丁香) 2백 근, 금결속요도(金結束腰刀) 2자루, 천축백호주(天竺百花酒) 1정 등 이었다.]
"올해도 이대로 준비해 주시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다른 특별한 사안은 없지요."
"네, 전하!"
섭정 난잔이 물러가자 나는 흥정을 불러들여 명에 진상할 특별 품목으로, 홍삼 2백 근과 말 이백 필을 준비하도록 했다. 나의 지시에 흥정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곳에서 말을 진상한다는 것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사료되어집니다."
"나도 아오. 준비는 할 수 있소?"
"급히 여진을 다녀와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다녀오시오."
"네, 전하!"
흥정이 물러가고 나니 어느새 어두워졌는지 벌써 등불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곧 정전을 물러나 침전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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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감사 드리고요!
^^
늘 즐겁고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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