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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인생-76화 (76/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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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째 되던 날 우리는 현재의 오타로 시라고 짐작되는 대형 분지를 만나 일차로 이곳에 우리의 교두보를 만들기로 하고 요새를 구축하도록 했다. 그간 늙은 촌장을 앞세워 우리의 정책에 호응하는 몇몇 부락민들을 모아 그들에게 우리의 쌀과 감자 고구마 등을 일부 나누어주고 축성에 동원하도록 했다.

또한 부락민들의 일부는 파종기를 맞아 우리가 가지고 온 모든 씨앗을 공짜로 나누어주며 밭을 일구어 이를 재배하도록 했다. 이렇게 한 달이 흘러 외부는 돌과 시멘트에 의한 성곽이 축조되고, 내부는 통나무집이 줄줄이 지어진 우리의 일차 숙영지가 거의 만들어 질 즈음, 변고가 생겼다.

풀어준 화인 우두머리가 대규모 화인을 몰고 우리를 축출하러 온 것이다. 오천 쯤 되는 대병이었다. 북해도의 전 화인 남자들이 다 몰려든 것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대단한 규모였다.

쌍방 간에 몇 번에 걸친 대화가 오갔으나 의견 불일치로 우리는 곧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벌써 어깨 높이로 축성된 돌과 시멘트의 성곽을 따라 총병들이 배치되고, 보다 높게 축조된 이중의 성곽 안쪽에는 신기전을 비롯한 화차 등 다량살상무기가 배치된 가운데에서의 전투였다.

저들이 먼저 함성을 지르며 우리의 외곽 성채로 달려드는 것이 전투의 발단이었다. 나의 명령에 따라 1차로 성곽에 달라붙은 천보총 병들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자들이 짚단 쓰러지듯 고꾸라져도 저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이에 나는 2차 발포 명령을 내리니 수백발의 신시전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쏟아져 내리고,

화차에서도 수천발의 탄환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여기에 총 병들도 분대별로 하나씩 지급받고 있던 진천뢰마저 투척하니, 이것은 곧 아비규환의 참상을 연출했다.

곧 시신들이 하늘로 비산하고 땅거죽마저 폭발의 여파에 휩쓸려 튕겨져 오르니, 인세의 지옥도를 연출했다. 여기에 화염과 짙게 피어오르는 매캐한 화약연기는 이들을 질식사라도 시킬 판이었다.

이렇게 되니 피아간의 전투는 금방 시들해졌다. 저들이 일방적으로 도망을 쳐서 후위에 몰려있을 뿐 더 이상의 공격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나는 전열의 총 병들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다.

우리의 총 병들이 나의 명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대오를 짓고 차례로 몰려나가니 저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청히 서있기만 했다. 곧 반원을 형성한 아군들이 일제히 쇄도하자 저들도 그냥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해왔는지 곧 대항해 왔으나, 당랑거철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항복하는 살려주어라!"

나의 명이 곧 시행되어 대항하지 않는 자들과 일부 붙잡힌 자들을 한쪽으로 몰아세워, 면사기(免死旗)아래 살려주는 것을 보자, 곧 전투를 하던 자들마저 그쪽으로 합류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무리 이들이 올 때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왔다 해도, 승패의 우열이 확연해진 이상 생명에 대한 애착심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곧 일부 극력분자들이 다수의 아군에 의해 살상되자, 요새 앞은 금방 평화를 되찾았다.

고요해진 벌판에 아직도 피어오르는 매캐한 화약연기만이 하늘로 치솟고, 시신 타는 냄새만이 구토를 유발했다. 곧 나의 명에 의해 전장 정리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5천여 침략자 중 875명이 살상되었고, 중경사자도 150여 인이 나왔다. 나머지 온전한 자들을 헤아려보니 4,015명이었다.

우리는 곧 이들에게 오라를 지워 성곽 안으로 끌어들이고, 시체는 먼 곳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게 하여 함께 묻었다. 그리고 노획품들 또한 정리하여 안으로 들리게 했다. 중경상자 중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판단되는 자는 잔인하지만 그 자리에서 창으로 찔러 죽였다. 차라리 고통 없이 가는 게 낫다 싶어 취한 조치였다.

나머지 치료 가능한자들만 한해서 공의야에게 맡겨 돌보도록 했다. 다음날부터 이들은 우리의 노예가 되어 곧 얼마 남지 않은 성곽 축조에 동원되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우리의 원주민에 대한 회유작업은 계속되었다.

기존 세뇌된 원주민을 앞세워 좀 더 범위를 넓혀가며 이들의 선무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에게도 먹을 것과 일부 씨앗을 나눠주며 우리 일원이 되도록 끊임없이 설득작업과 함께 선의를 베풀었다.

그러자 우리의 회유에 동화된 부락민들이 점차 늘어갔다. 처음 서너 개 부락에서는 이제 수십여 개의 부락민들이 우리의 치하에서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나는 곧 이들의 대표들을 불러들여 경작법을 알려주고 감자며 옥수수, 배추 등 온갖 씨앗을 나누어주었다.

여기에 원하는 자들에 한해서는 우리가 가지고온 화덕이나 철 냄비 또는 무쇠 솥 이외에도 일부 농기구를 교역품으로 교환하였다. 그들이 주로 제공하는 것은 물고기 아니면 사냥한 육류와 털가죽 그리고 일부의 채소였다.

우리의 공평한 교역과 사심 없는 선심성 공세에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여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저들과의 동화 작업은 수십 개의 부락이 예하로 편입되자 점점 가속도가 붙어 더 멀리 있는 부락민들을 불러 오게 했다.

우리 치하의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우리의 일손도 바빠졌지만 나는 좀 더 빠른 시간 내에 이들의 땅을 손에 넣기 위해, 천여 명의 군대를 좀 더 내륙으로 진입시켰다. 지금의 삿포로 방향이었다.

그곳에서도 우리는 당연하게도 대형 분지를 발견하고 이차 거점인 요새화 작업을 벌이기로 했다. 오타루 1차 거점에 5백 명의 병사를 남긴 우리는 곧 전원이 그곳으로 이동했고, 전 화인(和人) 노예들도 강제 이주되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또 다시 두 달여에 걸쳐 이차 요새 축성을 마치고, 나는 좀 더 내륙으로 진출시켰다. 그동안 흥정은 항해요원과 일부 병사들과 함께 조선에 다녀왔다. 필요한 물자와 교역품을 싣고 오기 위해서였다. 특이하게도 이번에는 볍씨도 들여왔다.

언뜻 어느 북해도 기행문에서 그곳에서도 쌀이 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볍씨를 물이 풍부한 곳에 논을 조성하여 심도록 병사들에게 일러주고, 또 그 병사들은 일부 원하는 부족민들이에게 이의 경작방법을 가르칠 것이다.

아무튼 나는 북으로 길게 뻗은 중앙 평원으로 우리의 병사들을 진출시키는 한편 동쪽에 웅장하게 솟아오른 중앙산맥 쪽으로도 수백 명의 병사들을 진출시켰다. 산맥 속에 대규모 인원은 살 수 없으니 오십 명 단위로 쪼개져 내 주목적의 하나인 역청탄을 발견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내가 읽은 기사 중에는 이 중앙산맥에 일본 최대의 탄전이 있으며, 이에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되었는데, 수백 명이 죽어나갔지만 지금까지 일체의 보상도 받지 못했다는 기사 내용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채 두 달이 되지 않아 대형 탄전의 노두 세 곳을 발견했던 것이다. 지금의 비바리 탄전을 기준으로 북쪽의 스나가와 탄전, 그리고 산맥 남동쪽으로 유바리 탄전이 그들이었다.

이에 따라 나는 축성이 끝난 화인 노예들을 일단 비바리 탄전으로 몰아넣었다. 인원이 얼마 안 되니 한 곳에 역량을 집중시키기 위함도 있었고, 이 탄전 하나만 해도 수백 년은 캐먹을 물량이 되기 때문에 취한 조처였다.

또한 삼백의 병사들을 투입해 이들을 통제하는 한편 강제 채탄을 시켰다. 이렇게 우리가 순조롭게 북해도를 개척하고 있는데 하루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떼로 몰려왔다. 화인의 가족들이었다.

출전한 이들의 소식이 없자 분명 변을 당했으리라 생각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죽창과 식칼을 든 무장 떼였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나는 이들을 일단 말로 설득시키기로 하고 송익필과 함께 나인 소년을 내보냈다.

우리의 설득에 결국 그들은 조악한 병기를 내려놓았지만 대신 곡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내가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대부분이 이곳 원주민들이고, 아이들은 화인과 아이누족의 혼혈들이었다.

즉 화인들 단신으로 넘어 와 현지인인 아이누족 여자를 취한 까닭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나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히 섣불리 인정을 남겼다간 이들이 훗날 합세하여 대규모 반란이라도 일으킬까 두려웠고, 그렇다고 현제의 실정을 보면 대부분 가장을 잃은 이들의 생계유지가 곤란해 불쌍해 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이들을 일단 돌려보내데 이곳으로 찾아오는 자들에 한해 경작지를 주어 집단 거주토록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노예의 신분으로 행동의 자유와 거주 이전의 자유가 구속받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조치를 송익필과 나인 소년에게 설명하고 그대로 시행하도록 했다. 나의 해산조치에 일부는 돌아갔지만 대부분은 아예 이삿짐을 꾸려왔는지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요새 북부에 새로 마련된 대규모 경작지에 이들을 몰아넣었다.

실로 북해도라는 땅은 넓고 넓어서 경상도를 뺀 나머지 남한 면적만한 땅에, 훗날 안 사실이지만 30만의 아이누족과 일만이 약간 넘는 화인들만이 살고 있었다. 그러니 가는 곳마다 신천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비옥한 평야와 산기슭에 이들이 몰려 살았지만 차지한 땅을 놓고 보면 실로 얼마 되지 않았다. 주로 수렵채취로 생활을 하다 보니 농경민족만큼 땅이 필요도 없었고, 그나마 차지한 땅이라야 작은 땅을 밭으로 일구어 채소를 심어먹는 정도였던 까닭이었다.

아무튼 이들이 정착하여 살게 되자 나는 원주민들에 대한 본격적인 동화정책에 들어갔다. 호패법을 실시하여 가족과 인구를 파악하는 한편, 원하는 자에 한해서는 16세에서 25세까지의 연령제한을 두어 병사를 모집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 결과 오천의 경비병 내지는 군사들을 새로 얻을 수 있었다. 이들에게는 기존의 우리 군처럼 일종의 녹봉이 지급되어 생계를 도울 수 있었으므로, 많은 지원자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이들 가족은 물론 전 원주민을 대상으로 하여 체계적인 경작방법을 가르쳐 한군데 정착하여 살도록 유도했다. 이는 빠른 동화와 함께 이탈을 방지함으로서, 빠른 시일 내에 조선의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렇지만 이를 원치 않는 자들은 강제하지는 않았다. 그냥 본래의 습관대로 살게 하여 마찰을 최대한 피하도록 했다. 장차는 8세 이상은 남녀를 불문하고 한글과 조선말을 가르칠 계획이었다.

언어는 한글과 아이누족 언어를 공용어로 하되 글은 이들에게 없으므로 한글이 공용어가 되어 행정은 물론 일상사에서도 이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어언 5개월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나는 북해도가 차츰 안정되는 것을 보고 유구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이에 운봉이 거느린 이천 군사만 남기고 고경명이 거느린 일천의 군사는 나와 함께 되돌아가도록 했다. 이때쯤에는 벌써 비바리 탄광에서 질 좋은 역청탄이 생산되어, 우리의 배에 가득 가득 만재된 상태였다.

모든 출항 준비가 되자 나는 운봉에게 지침을 내렸다.

일단은 이곳의 안정화에 주력하고, 차츰 차츰 세력을 넓혀 북해도 전체는 물론 더 북쪽의 사할린까지 우리의 영토가 되도록 하라고. 그리고 또 온천도 하나 개발하여, 다음에 내가 올 때는 온천욕을 즐길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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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고맙습니다!

^^

늘 즐겁고 유쾌한 날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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