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구국 -->
5
그날 오후.
오전 내내 두 선박으로 필요한 물목을 옮긴 우리는 쇼호 왕의 배웅을 받으며 수리왕부를 떠났다.
며칠의 항해 끝에 우리는 토요히사의 부친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가 성주로 있는 이노성(飯野城)에 도착을 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운곡과 천여 명의 병력 밖에 없었다. 그 외 부 연대장이자 1대대장인 고경명이 동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의 권유로 병조 좌랑직을 그만 두고 뒤늦게 우리 군문에 합류한 사람이었다. 또 모사진과 임 선달이 나를 수행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여기서 멀지 않은 왜국의 무역항인 하카다(博多)로 상행을 하러 갔다.
대규모 병력의 침입에 당황한 이에히사가 성루로 달려온 것을 토요히사가 전후 사정을 말해 우리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토요히사의 중재로 나는 그의 부친 이에히사와 마주앉게 되었다.
"아들에게 대충의 상황을 들었소만, 솔직히 나는 믿기지 않소이다."
"우리가 그렇게 강한지 믿을 수 없단 말이오?"
"그렇소. 조선군이 그렇게 강하다고는 믿을 수 없소."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겠소?"
"휴가 마사키인(真幸院)의 귀속을 둘러싸고, 휴가국의 이토 요시스케와 우리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소. 그들을 물리쳐준다면 믿겠소."
"좋소! 그 전에........"
나는 이에히사의 꾀임에 빠지는 것을 알았지만, 일단은 흔쾌히 수락하고 단서를 달았다.
"당신이 당주는 아니지요?"
"위로 형님들이 셋이나 있소. 맏형인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가 당주요."
"좋소! 당주를 포함하여 위의 세 형들을 전부 불러오오. 내 요시스케를 굴복시켜주기 전에 단단히 약속받을 일이 있소. 어떻소? 이행하겠소?"
"숙적인 그자들을 물리쳐준다면 뭔들 못하겠소."
이렇게 운을 뗀 이에히사가 곧 가신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날 오후, 이에히사의 형제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일부는 병력을 끌고 온 자도 있었다.
먼저 그들 형제가 회동을 한 직후, 우리는 곧 이에히사의 거처에서 모임을 가졌다.
당주인 요시히사가 상석에 앉고 세 형제는 양쪽으로 나누어 앉았다. 그리고 나는 요시히사와 마주보고 앉았다.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토요히사의 진술로 그대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소. 내 그대들의 숙적인 요시스케를 물리쳐 줌은 물론 규슈의 패자가 되도록 하겠소. 단 여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소."
여기서 나는 말을 끊고 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떤 기대와 갈망으로 두 눈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들어나 봅시다."
곧 흥분을 가라앉힌 당주 요시히사가 침착하게 말했다.
"첫째 토요히사를 당주의 양자로 입적시켜 가독을 물려주는 것이오."
"그것은........"
"항렬에 위배된다고 하지 마시오. 사촌끼리도 혼인을 하여 가독을 잇고, 또 형수마저 취하여 가독을 잇는 당신네들의 풍습을 잘 알고 있소."
나의 말에 요사히사가 답변했다.
"그것과 이것은 다르지만 일단 그렇다 치고, 두 번째 요구사항을 들어봅시다."
"당신의 막내딸 다마히메(玉姫)를 여기 있는 우리의 연대장 운곡과 결혼을 시켜, 서로의 혼인 동맹을 추진하자는 것이오."
"좋소! 그것은 얼마든지 내 따를 수 있소."
"세 번째는 우리는 영원한 결맹 관계로 한쪽이 배신을 하면 천배 만 배 보복을 하기로 하는 것이오."
"그야 당연한 일이니 의당 그래야지요."
나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하는 요시히사였다.
"다 결론이 지어졌는데, 아직 첫 번째 문제만 확정되지 않았소. 어떻소? 규슈의 패자가 되고 싶지 않소?"
"그 것 때문에 우리 가문이 흥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요. 허락합니다."
"좋소! 내 여기 항시 천 명의 군대를 주둔시켜 당신들이 패자가 되는데 일조하리다. 하고 바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 보일 테니, 누가 가서 요시스케를 이 성으로 꾀어오시오."
나의 호언장담에 잠시 서로의 표정을 살피는 형제들이었다.
"내 자리를 비켜드리리까?"
"그러실 필요 없소이다."
요시히사의 제지로 나는 그 자리에서 머물러 있으며 잠시 그들의 쑥덕공론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공론이 끝났는지 분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이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곧 둘째 요시히로(義弘)가 가내의 전 병력을 집합시켰다. 총 700여 명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이 이에히사와 요시히로 형제의 병력을 다 긁어모은 수치였고, 이들의 본성에도 천여 명이 더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나는 그들이 곧 출전을 하려고 하기에 제지를 하고 말했다.
"양진영에서 매복하기 좋은 장소가 어디요. 우리는 일단 그곳에 매복해 있다가 저들을 요격하리다."
나의 말에 네 형제가 상의를 하더니 당주가 대표로 말했다.
"셋째가 안내를 할 테니 함께 가시지요. 그러면 일부의 군사가 성에 남아야 하니, 나와 둘째가 출전을 하고, 넷째는 이백 명의 부하들과 함께 성을 지켜라!"
"네!"
형제들이 복명을 하는 가운데 나는 아군의 장수와 모사진을 불러 모았다.
"압도적 화력으로 적을 궤멸시켜 우리의 위용을 보여주도록!"
"네!"
우리는 요시히사 형제가 출전하는 것을 지켜본 후, 우리도 곧 셋째를 따라 출전을 했다.
우리는 곧 동쪽으로 십 리를 행군하여 셋째 도시히사(歳久)가 안내한 장소에 이르렀다. 결코 깊지 않은 계곡에 양쪽 산도 전부 땔감으로 베어다 땠는지, 민둥산에 가까운 별로 높지 않은 산이었다.
"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히 이곳을 지나야 하오."
"그렇소."
"좋소! 당신은 구경만 하시오."
그렇게 말한 나는 곧 우리가 가지고 온 화기를 배치하고, 나의 명에 따라 은폐 엄폐물을 찾도록 했다. 그래도 없는 곳은 참호를 파도록 했다. 그렇게 그날이 저물고 우리는 그들이 제공한 주먹밥으로 그날 밤을 거기서 지새웠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나는 조양(朝陽)을 바라보고 있는 도시히사를 불러 말했다.
"계곡 앞으로 달아나는 자들은 역습을 해서 제압해줬으면 좋겠소."
"알겠소."
나는 그의 대답을 들으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해가 점점 더 높이 솟아올랐다. 아군이 점점 갈증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동쪽 전방으로부터 함성과 비명소리, 말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군도 아연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만은 승리를 의심치 않기 때문에 태연했다. 점점 소음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는 물론 사람의 욕설까지 들려왔다. 곧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산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자들이 있었다.
시마즈 군이었다. 아군이 쫓기어 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유인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당주 요시히사를 선두로 사오백의 병사들이 적의 추격을 피해 죽을 등 살 등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요시스케의 3천 군사들이 악착같이 따라 붙으며 적을 하나라도 살상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발군은 말을 탄자로서 그 자의 창에 대부분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적의 대장 이토 스케야스(伊東祐安)라는 요시스케의 중신이었다.
체력이 약한 자들이 적의 추격전에 희생이 되고 이를 가급적 줄이려 둘째 요사히로가 아군들을 독려하며 열심히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아군의 선두가 우리가 매복하고 있는 골짜기로 진입했다.
차례로 아군이 신속히 빠져나가고 적들도 경황없이 뒤를 쫓고 있었다. 이윽고 적의 후미까지 모두 들어오자 나의 손짓에 의해 일성포향이 천지를 진동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포향소리를 기점으로 제일먼저 화차 10여 대에서 승자총통 40개, 총 400개의 총구에서 15발의 작은 조란 탄(鳥卵 彈) 6,000발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이어 곳곳에서 비격진천뢰가 투하되어 계곡 전체가 화염과 폭음으로 뒤덮인 가운데 아비규환의 생지옥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었다. 천지현황의 각종 총통들이 일제히 불을 뿜고, 적들은 불구덩이 속에서 피륙이 비산하고, 매캐한 살타는 냄새와 함께 비명 소리가 온 골짜기를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우리의 개량된 후장식 천보총이 일제히 조준 사격을 가하니, 그나마 열에 하나 둘 살아남았던 자들도 슬로우 비디오 장면을 연출하며 하나 둘 꺼꾸러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적에게 궤멸적 타격을 입혔다고 생각한 나는 다시 한 번 수신호를 보냈다. 이에 따라 신기전 10발이 하늘로 치솟으며 긴 꼬리를 그었다.
일제 사격중지 신호였다. 이에 따라 갑자기 골짜기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적들의 끝없는 비명소리만이 계곡을 울리며 전쟁의 참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간간히 살아서 골짜기 양쪽으로 달아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군이 알아서 조준사격을 하니, 열에 하나 달아나기 힘들었다. 또 도주하던 아군을 선두에서 추적하던 자들은 일부 우리의 화망을 피해기도 했지만, 도시히사는 물론 요시히사, 요시히로가 돌아서서 대항하니, 그들 또한 순식간에 주검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적의 중신 스케야스 또한 떼로 달려드는 시마즈 군에 의해 말과 함께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곧 전장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어, 적의 병기며 갑옷 등 전쟁 물자를 노획하는 한편, 피아 사상자와 중 경상자를 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했다.
3,000중 살아 돌아간 자는 채 100명이 안 되는 처참한 패배였다. 이에 반해 시마즈 군은 죽은 자가 89명 중경상자가 37명이 나왔다. 물론 내가 거느리고 있던 아군의 피해는 전무했다.
대승에 모두 기뻐하며 우리는 곧 개선 길에 올랐다. 우리가 아직 성까지는 오리 정도가 남았을 때였다. 개선 소식을 들은 환영인파가 쏟아져 나와 우리를 열렬히 환호하며 맞았다. 나는 특별히 지급된 말 위에서 연신 당주 요시히사와 말 머리를 나란히 하며, 그의 치하를 듣느라 정신이 없었다.
성에 도착하자 분명 가난한 살림임에도 불구하고 승전연이 베풀어졌다. 아군에게 돼지고기와 술이 지급되고 시마즈 군도 함께 이를 즐겼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손짓 발짓 심지어 몸짓까지 동원하여 서로 우의를 다지는 시간이었다.
이때 나는 좋아하는 저들을 바라보며 엉뚱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곳의 군사로 내정된 허필량을 불러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을 분명히 하건데, 이 시즈마 군이 규슈를 제패할 때까지는 동행을 한다. 그 이후는 사정 여하에 따라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항상 이를 유념에 두고, 또 하나 명심할 것은 규슈를 제패하는 과정에서도 어느 정도 저들이 성과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전적으로 밀고 있는 토요히사를 제외한 자들은, 그 과정에서 하나씩 제거해 나가도록. 알겠는가?"
"네, 주군!"
허필량 또한 언제부터인지 나를 주군이라 부르며 따르고 있었다.
"또 가급적 아군의 군세를 불려 최종에는 이 시마즈 군을 우리가 장악할 수 있도록 기도할 것."
"네, 명심하겠사옵니다."
허필량에게 당부를 끝낸 나는 곧 운곡을 불러 그에게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승전이요. 하지만 그 못지않게 아군에게 중요한 것이 있는데, 아군의 목숨과 병장기요. 아군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에 못지않게 아군의 신무기가 적에게 빼앗기거나, 설령 전후처리 과정이라도 일점의 무기라도 적은 물론 시마즈 군에게도 넘겨주어서는 안 되오. 또한 평소에도 무기 관리는 철저히 해야 할 것이오. 알겠소?"
"네, 총사령관님!"
"지금도 그렇소. 모처럼 술을 즐기는 것은 좋으나, 너무 과음하는 자가 없도록 잠시 후에는 끝내도록 하오."
"알겠습니다. 총사령관님!"
잠시 후 나는 당주의 초대로 전날 내가 그들과 회동했던 중지에서 면담을 가졌다. 명색은 승전을 축하하는 주연석이나 양측이 서로 할 말이 많은 관계로 회담 성격도 겸한 자리였다.
"우선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르겠소. 생각지도 않은 강력한 우군의 조력에 우리 시마즈 가문은 지금 온통 들떠 있소. 조선군 사령의 말대로 규슈의 제패가 지금은 허언이 아닌 정말로 손에 잡힐 듯 보이기 때문이오."
여기서 말을 끊은 당주 요시히사가 다시 한 번 나에게 감격에 찬 눈빛을 보낸 후 말을 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웬 뚱딴지같은 제안인가 했습니다만, 오늘 조선군의 실력을 보고는 감탄을 넘어 두려움을 느꼈소. 아니더라도 애초에 우리가 맺은 언약대로 최소한 우리가 먼저 등을 돌리는 일은 없을 것을,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다짐하오. 하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소이다."
----------------
.. /작가의 말/..................................
고맙습니다!
^^
늘 즐겁고 유쾌한 날 되세요!
^^
이전글: 유구국
다음글: 거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