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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인생-71화 (7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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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의 안내에 따라 이 층에 오르니 쇼호 왕이 문 입구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시오 삼한(三韓(조선을 이름)의 장령이여!"

"반갑습니다. 왕이시여!"

신하도 아닌 내가 굽실거릴 것도 없어 가볍게 목례를 한 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 내전에 자리를 했다. 내 뒤에는 운검과 임 선달이 버티어 서고, 두 모사 역시 내 뒤에 시립했다. 송익필만이 통역을 위해서 내 바로 뒤에 붙어 앉았다.

"과인이 오늘 보니 조선의 성세가 대단하오. 왜구를 순식간에 수장시키다니! 그 위세가 상국인 명국도 과히 따르지 못하는 바가 있소. 참으로 경하스러운 일이고 경탄할 일이오!"

"과찬이십니다. 전하!"

"허허허..........!"

그런데 웃음이 어딘지 이상했다. 웃는데 웃는 게 아닌 이상한 웃음이었던 것이다. 즐거웠던 웃음소리도 끝에 가서는 왠지 비감하게 들렸다.

그런 분위기 이니 어색함에 잠시 대화가 끊겨 내가 시선을 들어 정면을 바라보니, 정면에는 여러 줄의 글씨가 쓰인 편액이 걸려있었다. [류큐만국진량(琉球萬國津梁·류큐 만국의 가교)]라는 제호와 함께 이런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류큐는 남해에 있는 나라로 삼한(三韓)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과 밀접한 보차(輔車·광대뼈와 턱)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일본)과도 떨어질 수 없는 순치(脣齒· 입술과 치아) 관계이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 솟아난 봉래도(蓬萊島·낙원)이다. 선박을 항행하여 만국의 가교가 되고 외국의 산물과 보배는 온 나라에 가득하다.

(琉球国者,南海胜地而钟三韩之秀,以大明为辅车,以日域为唇齿,在此二中间涌出之蓬莱岛也,以舟楫为万国之津梁,异产至宝)]

"정전 편액의 내용 중에 삼한이 제일 먼저 언급되어 있는데 무슨 까닭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 유구를 한 때는 우산국의 천손(天孫) 씨가 다스렸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소이다. 허나 언어에서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유구인들은 세 나라 중 심정적으로는 삼한을 으뜸으로 치고 사모하고 있습니다."

쇼호 왕의 말에서 나는 무언가 동병상련의 느낌이랄까, 형제애 비슷한 것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왕 또한 비쩍 마른 얼굴에 수심한 가득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딱히 화제 거리도 없어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멀리 연못이 보이는데 한가운데는 인공섬 마냥 하나의 고색창연한 건물이 조성되어 있었다.

내 시선을 따르던 쇼호 왕이 그 건물에 대해 설명을 했다.

"원감지(圓鑑池)라는 연못과, 변재천당(辯財天堂)이라는 건물인데, 우리가 조선을 찾아뵈온 바(朝貢), 태조대왕께서 내려주신 불전을 보관하는 장소이기도 하오."

"하하, 그렇습니까?"

이것으로 보아도 유구국이 조선과는 남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시 실내에 정적이 내려앉으려 할 즈음 쇼호 왕이 결코 밝지 않은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조선의 장령이 왜구를 물리쳐줬으니 의당 기뻐해야 하나, 아직 난제가 남아있는 나로서는 결코 즐거워 할 수만은 없으니, 그대는 너무 탓하지 말기를 바라오."

"무슨 문제가 또 있습니까?"

"과인이 약 사십 년 전 이 나라를 통일했으나, 남양(南洋)에 양귀(洋鬼)들이 자주 출몰하더니, 이제는 명국과의 조공관계도 원할지 않아 우리의 살림이 상당히 팍팍해 졌소이다. 이를 기회로 통합된 나라가 또 다시 사분오열되니 북으로는 추잔 씨요, 남으로는 호쿠잔이 다시 준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니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지요."

"허허........! 그것 참!"

나도 모르게 개탄이 나오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작은 나라에 뭘 먹을 게 있다고, 또 이를 나누어 다투고 있다니,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외람되오나 도움을 받는 길에 그들도 물리쳐 줄 수 없겠소이까?"

'이거야, 원........!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 아닌가?'

내심 생각하며 나는 생가에 잠겼다.

이를 보자 쇼호 왕은 내가 내키지 않아 하는 줄 알고 다른 조건을 제시하였다.

"내 나이 어느덧 육순이 다 되었건만, 아직 내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를 왕자 하나 없소. 과년한 딸 아이 하나가 있긴 하니, 장령께서 취하고 내 뒤를 이어 이 나라를 통치하면 어떻겠소? 우리가 서로 남이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 아니겠소?"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셋만 해도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또 무슨 여자 문제가 나와?'

이것이 솔직한 나의 속내였다.

"허면 그냥 도와주기라도 하시겠단 말이오?"

노회하게 낚시 밥을 던져보는 쇼호 왕이었다.

"끙.........!"

'그렇다고 공짜는 싫고.'

내심 생각하며 열린 창 너머로 시선을 돌리니 점점이 기와집도 보이고, 풀로 이은 초가도 보였다. 왕궁을 벗어난 작은 골목길에는 잠뱅이를 둥둥 걷어 부친 농부가 물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데, 이를 마중 나온 어린 아이들은 하체만 감싼 채 애비의 어른 걸음을 쫓느라 겅중겅중 뛰고 있었다. 마치 조선의 풍경을 보는 것 같아 나는 마음을 돌려 먹었다.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허허허........! 고맙소!"

갑자기 체통도 잊고 옥좌에서 내려와 나의 손을 잡아오는 쇼호 왕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마주잡고 웃자, 그가 곧 명했다.

"무희들을 들라 해라! 오늘 같이 기쁜 날 잔치를 열지 않으면 언제 열겠느냐!"

그의 명에 몇 사람이 재빨리 움직이고 나는 재빨리 손을 빼내었다. 늙은 왕도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장내에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내전의 몇 사람이 등에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벌써 실내에는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던 것이다.

창가로 시선을 돌리니 어느덧 쪽빛 바다는 붉고 노란 물이 들어 다정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는 집채만한 태양이 그 마지막 몸부림을 토하며 붉은 광휘를 뽐내고 있었다.

내가 노을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는 동안 전내에는 어느덧 풍성한 주안상이 차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 아랫도리만 짧은 야자수로 가리고, 가슴은 노란 수실로만 감아 거의 드러난 듯한 무희들이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분위기 없기는. 무희들은 좀 술이 거나하거든 들이던지 하지........'

금방 공주를 마다한 주제에 거의 벌거벗다시피한 무희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욕념이 치솟아 올라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였다.

"자, 과인의 술 한 잔 받으시오."

어느새 내 맞은편에 앉은 국왕이 금잔을 들어 내게 권하고 있었다. 내가 공손히 받자 쇼호 왕이 따르며 말했다.

"이 술이 천축주(天竺酒)로 우리 유구에서 조선에 조공물로 받치던 술이오."

"아, 그렇습니까?"

혀끝으로 찍어 살짝 맛을 보니 쓰기만 하고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경들도 이리 와 앉고, 장령과 함께 온 손님들도 와서 함께 합시다."

쇼호 왕의 말을 받아 내가 말했다.

"전부 내 옆으로 앉으오."

나의 말에 이르러서야 우르르 몰려와 한자리씩 차지하는 아측 인물들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가 차츰 무르익어 모두 거나해지자 춤을 추었던 무희들이 각기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달라붙었다. 즉 옆자리에 하나씩 앉은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옆자리에 앉은 무희를 보니 춤추던 무희들 중에서는 가장 빼어나게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동그스럼한 얼굴에 긴 속눈썹, 유난히 커 보이는 맑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아가씨였다. 체형은 통통한 편이었는데, 체형만큼이나 가슴도 볼륨감이 있었다. B컵은 넘고 C컵이라기에는 부족한 듯한 가슴이었다.

무희의 거듭되는 요구에 내가 술을 한 잔 쭉 들이키자,

'아, 하세요!'

하며 입을 벌리기를 강요하는 무희였다. 내가 그녀가 건네주는 안주를 스스럼없이 받아먹자 그녀가 말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우리의 대화를 통역하느라 송익필이 제대로 술도 못 마시는 가운데 대담한 아가씨는 한 술 더 뜨고 있었다.

'무희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 여기의 법도가 이런 것인가?'

무희가 술을 달라니 기가 막혀서 나는 내심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숙녀(?)의 청을 거절 못하고 기어코 한 잔을 따라주는 나였다.

내 앞에서 꼴깍꼴깍 금방 한 잔을 다 비운 무희가 잔을 내게 돌려주었다.

"받으세요!"

술을 따르느라 그녀의 자세가 숙여지자, 나는 그녀의 깊이 파인 가슴골을 보며 내심 침을 꿀꺽 삼켰다. 만경당을 떠난 지 어언 한 달이 넘으니 주체치 못할 정념이 타올라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희와 즐기다보니 나도 어느새 기분 좋게 술이 올랐고, 쇼호 왕도 모처럼 대취했다며 자리를 파하자고 했다. 주인이 그러는 데야 객이 별 수 있나.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들이 준비해준 침전으로 향했다.

작은 전 하나를 통째로 우리에게 내주어 그들의 성의가 지극함을 표시하고 있었다. 우리가 침소에 들자 어디서 시녀들이 들어와 우리가 씻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도 안 먹었구나!'

저녁 식사도 그 자리에 함께 나온 것을 술만 먹다보니 미처 못 먹은 것이다.

'아, 젠장 이제야 배가 고프네!'

나는 나 혼자 배정된 중간의 독실로 들어가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것은 내 개인 사정이고, 일군을 이끄는 사람이 이러면 안 되지.'

나는 생각이 들자마자 임 선달을 불러 흥정과 순신을 불러오도록 했다. 토요히사의 일이 궁금해서 물어보려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중국풍의 정장을 차려입은 아가씨가 소반을 들고 거침없이 내 방에 등장했다. 그렇게 차려입으니 더 미인 같았다. 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의 붉은 입술이 나풀나풀 움직였다.

"아까 식사를 못하셨죠? 전복죽이랍니다."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 뜻은 감이 잡혔다.

"감사히 먹겠소."

"식기 전에 어서 드시옵소서!"

"고맙소!"

감사를 표하고 내가 막 수저를 드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불러계시옵니까?"

"들어들 오시게."

흥정과 이순신이 차례로 방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무희를 바라보자 무슨 뜻인지 눈치를 챈 무희가 밖으로 나갔다.

"저녁 식사들은 했는가?"

"네, 좀 전에 먹었습니다."

흥정의 답변에 나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또 물었다.

"토요히사는 어떻게 하고 있지?"

"체념한 듯 별 반항은 없으나, 의빈마마의 말에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래?"

"네!"

"흐흠........!"

나는 잠시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눈을 감았다.

한편에서 전복죽이 식어가고 있지만, 내 눈은 쉽게 뜨여지지 않았다.

나는 생각에 잠겨 무심코 양 옆구리에 하나씩 매달려 있는 오구총(烏口銃)을 매만지고 있었다. 까마귀 주둥이와 같이 생겼다 해서 오구총이라 하나, 단발 권총이었다. 나는 아직도 생각에 잠긴 음성으로 말했다.

"송익필을 오라고 해봐!"

"네!"

그동안 눈치도 많이 늘었는지 순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갔다.

잠시 후, 송익필이 순신과 함께 들어왔다. 새삼 인사를 하려는 것을 손짓으로 주저앉힌 내가 말했다.

"토요히사가 말한 내용을 이야기 해봐."

"이웃한 휴가와 오스미 국에서는 호시탐탐 자신들의 영지를 넘보는데, 부친인 이에히사(家久)를 비롯한 세 숙부는 무기력하게 앉아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부친을 설득하여, 부친의 병력을 빼내어 이곳으로 온 것이랍니다."

"물론 이곳에 와서 이들을 점령하여 이들로 병력이나 물자를 충원하려 했겠지?"

"네!"

"한 가지 의문은 이헤이사 본인이 출병을 하지, 왜 아직 어린 아들에게 이런 대임을 맡겼느냐는 것이지?"

"이 문제를 당주 앞에서 거론을 했는데 다른 형제들은 전부 출병불가를 외쳤답니다. 그래서

이헤이사 본인은 와병을 핑계로 자꾸 조르는 토요히사에게 병력을 맡긴 것이고, 이면에는 동생이 있다는 것이죠. 즉 토요히사가 잘못되어도 자신의 동생에게 가문이 이어진다는 토요히사의 변이었습니다.

"

"흐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내가 눈을 들어 송익필에게 물었다.

"어때? 들어온 정보와 맞나?"

이즈음 모든 세작들이 보내는 정보와 그들에 대한 지시는 송익필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네, 우리가 파악한 정보와 한 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거짓을 고한 것은 아니로군."

가볍게 말한 내가 다시 송익필을 보고 물었다.

"얼마의 군사를 보내야 저들이 규슈 전체를 점령할 수 있을까?"

"들어온 정보로는 이에히스 4형제 모두 범상한 자가 하나도 없답니다. 즉 장재들이라는 것이죠. 다만 부족한 것이 병력인데, 2천 정도만 보내면 그들의 용맹으로 보아 차고 넘칠 것 같습니다."

"흐흠........! 우리가 저들을 그냥 지원해준다는 것도 우습잖은가? 무슨 구실이 있어야 할 텐데.........?"

"추후 조건을 붙이겠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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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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