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안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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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나이가 잘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삼십대 초반에서 삼십대 중반까지도 보이는 중키의 사내였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하는 양을 보기 위해 삼돌이에게 명했다.
"술 한 병 갖다 주어라."
나의 명에 우리 일행만 놀란 것이 아니라 청한 본인도 놀랐는지 누런 이를 순간적으로 히죽였다.
"임 선달(林 先達)이오."
술 한 병 받은 답례로 자신을 소개하는 죽장을 짚은 사내였다. 이때였다. 지금까지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던 운봉이 나섰다.
"의빈마마께서 거하는 배다. 함부로 나대지 마라."
운봉의 말에 대한 임 선달의 답은 히죽 한 번 더 웃는 것으로 그치고, 방금 받은 술병의 마개를 따더니 입안으로 쑤셔 박고 꿀꺽 꿀꺽 도랑물 내려가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는지 운봉도 피식 웃고는 내 곁으로와 쪼그려 앉아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 가는 배요?"
"충주까지 가네만."
"잘 되었소. 내 공술을 좋아하지 않는 성미라, 혹여 노정에 무슨 일이 생기면 의빈을 지켜주리 다. 하고 저 산적 같은 아이가 무예를 좀 익혔는가본데, 한수 지도해주는 것으로 술값에 갈음하리다."
내 신분을 알면서도 말 하는 것을 보니, 웬만해서는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호방한 기개가 엿보이는 인물이었다.
"선달(先達)이라면 과거에 급제를 하고도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사실이 그런가?"
"급제를 하면 뭘 하오. 매번 미관말직으로 남의 뒤나 닦아주다 마는 것. 서로 끼리 끼리 끌어주고 밀어주어, 우리 같은 놈들은 말직을 벗어나기 힘들다오. 해서 차라리 이렇게 하고 다닌다오."
"흐흠........! 그게 당금의 우리네 실정일지도.......! 그럼, 자네도 충주까지 가는가?"
그가 나에게 말을 높이지 않으므로 나도 시종 그에게 반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긴 내 지체가 있으니 반말을 해도 상관이 없었다.
"집에 잠깐 들렀다가 이번에는 새재를 넘어 경상도 땅이나 한 번 가보려 하오."
"집이 어디 인데?"
"충주요."
"나도 금곡리의 처갓집에 가는 길일세."
"금곡리라면 저도 잘 알고 있습죠."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아는 사람이 있다기보다도 고향집에서 가까우니 안다한 것이오."
우리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이상하게 호감이 가 호로에 술을 채워주도록 하고, 주먹밥이나마 한 덩이 주라 했더니 아주 게걸스럽게 아주 잘 먹었다. 중간에 하루를 쉬고 우리는 이틀 만에 선착장에 도착했다.
이제 그와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그 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약속을 지켜야지요."
선착장에 내려 말에 가지고온 예물을 싣고 하인들이 가마를 꾸미는 동안 그가 불쑥 한 말이었다.
나는 곧 선착장을 벗어나 민가가 없는 곳에 둘이 대결을 하도록 했다. 선착장을 벗어나 얼마쯤 가니 얕은 여울과 함께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둘의 대결을 주선했다.
"이쯤에서 둘이 대결을 해보는 게 어떤가?"
"좋소!"
나의 말에 임 선달이 호쾌하게 대답하는데 반해 운봉은 기가 차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백사장 중간으로 가 우뚝 섰다.
"무기를 들게."
"나는 박투술이 전문이다."
"제길, 나는 검이 전문인데, 그럼 이겨도 무기의 이점으로 이겼다 할 것 아닌가? 그러지 말고 내가 검으로 시범을 보일 테니, 자네가 평가를 해보게. 취할 점이 있으면 취해도 좋고."
"일단 한 번 봅시다."
운봉의 말에 히죽 한 번 웃어 보인 임 선달이 죽장에서 시퍼런 검을 꺼내들었다. 곡 죽장을 한쪽에 팽개친 그가 검을 바투 들더니 발끝만으로 섰다. 그는 얇은 가죽신을 신고 있었는데, 선 자세부터가 기이했다. 발끝으로만 선 것이다.
곧 검을 떨쳐내기 시작하는데 나는 도저히 얼마나 빠르고 현란한지 내 눈으로는 쫓을 수가 없었다. 때로는 몸이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 듯 했고, 강렬할 때는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는 듯 요란했다. 때로는 온 지상에 꽃잎이 낙화하듯 화려하기조차 했다. 한 사람의 몸으로 저렇게 여러 형의 검술을 체득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잠시 후 그의 시연이 멈추어졌는데, 운봉과 나는 놀람으로 눈을 부릅떠야 했다. 그가 격렬한 시연 후에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것은, 고수의 반열에 든 자라면 그렇다 쳐도 백사장에 희미한 발자국조차 남지 않은 것은 무슨 조화인가!
내가 그의 신의 경지에 이른 듯한 검무(劍舞)에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래도 고수라고 먼저 정신을 수습한 운봉이 임 선달에게 물었다.
"구름 속에 숨은 듯 온 세상에 꽃비를 뿌리는 듯한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었소. 내 검의 고수를 수없이 봐왔지만 그런 검술을 구사하는 자를 보지 못했거늘......."
운봉의 말이 장황한 듯 임 선달이 가로채 말했다.
"내가 작명을 했지. 만지낙화세(滿地落花勢)라 하네. 내가 왜국과 명을 떠돌길 십여 성상 만만에 비로소 검리를 체득하고 독창한 검법이니,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을 걸세."
이제야 깨어나 질문할 거리를 발견한 내가 물었다.
"나이가 몇인데 십여 년을 외국으로 떠돌았다는 말인가?"
"몇으로 보이오?"
"덥수룩한 수염을 깎아놓으면 더 어려보일 게야. 많아야 삼십대 중반?"
"하하하.........!"
"마흔이 넘었소이다."
"뭐라고?"
나만 놀란 것이 아니다. 일행 모두가 놀라 입만 벙긋거렸다.
"수염을 깎아놓으면 대개 삼십대 초반으로 보더이다. 그게 싫어서 이 모양을 하고 다녔더니, 상거지인 줄 알고 괄시가 심하고........."
"자네 말대로 그렇다 치고 특별히 젊게 보이는 이유라도 있나?"
"어려서부터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태식(胎息)을 익힌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아버님도 그랬었거든요."
"그렇군."
수긍을 하는 내 머리는 분주했다. 또 고질인 인재 욕이 발동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내 수중에 넣을까? 일단은 가볍게 물어보기로 했다.
"풍진세상을 떠돌지 말고 나와 함께 뜻을 펴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불감청(不敢請) 일지언정 고소원(固所願) 올시다."
"뭐?"
너무 쉽게 허락하는 바람에 내가 무의식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하하........! 너무 쉽지 않나?"
"하하하.........! 소인도 일찍이 의빈마마의 정체를 알고 이 배에 뛰어들었소이다. 저기........ 배가 떠났군요."
그가 가리키려했던 것은 우리가 타고 온 배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배에는 '의빈상단(儀賓商團)이라고 커다랗게 쓰인 깃발이 종전까지만 해도 펄럭이고 있었다. 외삼촌의 부마상단을 본 따 내가 금와상단을 의빈상단으로 개명하라고 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양반들도 상업을 천시하는데 하물며 왕족과 통혼한 사람이 버젓이 상호로 내거는 사람은 아마 조선 천지에 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또 잡인의 접근을 엄금하는 역할도 하기에 나는 기꺼이 이렇게 개명했다.
훗날 종친부에서 한마디 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저희들이 내 입에 밥 떠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웬 소란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 길로 임 선달은 나의 호위가 되어 앞길을 열었다.
"물렀거라! 의빈마마 납신다!"
당장 민가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벽제소리를 높인 것이다.
* * *
"어서 오시게, 사위!"
내가 말안장에 올라 끄덕끄덕 졸고 있는데, 어느덧 처갓집에 다와 장모님이 벌써 마중을 나오신 모양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말안장에서 급히 뛰어내리다가 하마터면 다리를 다칠 뻔했다.
"아, 장모님!"
"이게 얼마만인가, 그래?"
"헤헤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서 들어 가세나."
"네!"
비로소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동구 밖 초입이었다.
"처남들은 요?"
"급(汲)이는 장가를 들어 충주에 나가사는데 과거시험 준비한다고 집에는 얼씬도 않는다네."
하긴 나나 서얼을 인정해서 처남이라 부르지, 누가 서얼들을 처남이라 부르겠는가. 그러니 장모님의 입에서는 당연히 막내처남 급에 대한 언급 밖에 없을 수밖에. 막내처남이 나랑 동갑으로 장가를 갔을 정도면, 나머지 처제들은 물으나마마 모두 시집을 갔다는 소리였다.
이렇게 처갓집에 무관심 했으니 오늘 한마디 들어도 할 말 없게 생겼다.
"장인어른은 요?"
"아마 집 앞에 나와 계실 걸? 주변머리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혼자 투덜대는 장모님을 보니 할머니에 대해서는 물을 염치가 없었다. 땅 사 준 공은 어디 가고, 내가 장가를 잘 들어(?) 멀쩡한 딸을 첩으로 만들어 놨으니, 나를 부르는 호칭부터가 '부마'가 아닌 그냥 '사위'이지 않는가.
내가 가려운 곳을, 어느새 가마에서 내려 걷고 있던 아내가 긁어주었다.
"할머니는 요?"
"벌써 네 해전에 돌아가셨다. 성가실까봐 알리지도 않았다."
"흑흑흑.........!"
할머니의 소식에 금방 울음을 터트리며 어머니 품에 안겨 우는 아내였다.
"슬퍼할 것 없다. 때가 되면 다, 가는 게 자연의 섭리 아니겠니?"
"그래도요. 저를 얼마나 아끼셨는데. 맛있는 것 있으면 챙겨두셨다가 꼭 절 주시곤 하셨는데......."
"이것아, 그것도 급이 낳기 전까지였지."
진정을 시키려는지 정 떼는 말을 하는 장모님이었다.
그 말 때문인지 많이 잦아든 아내였다. 그러다 보니 행렬이 마을에 들어서 있었다. 모처럼의 구경거리에 동네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한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우리의 행렬을 힐끔 힐끔 곁눈질 하고 있었다.
내 지체가 있으니 근친 왔을 때하고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이때 임 선달이라도 있으면 벽제소리 한 번 요란하게 할 텐데, 잠시 고향에 다녀와 합류하겠다고 충주 본가로 간 상태였다.
혹여 훗날 조선 중기의 명장(名將) 소리를 듣는 임경업(林慶業)을 만들러 갔는지도 모르겠다. 임경업의 고향이 이곳 충주였다. 아무튼 우리의 행렬이 어느덧 처갓집 가까이 이르니 장인어른이 집밖에 나와 멀거니 우리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녕하셨습니까? 장인어른!"
"어서 오시게. 요새 내 몸이 부실해 멀리 못 나갔음이야."
아닌 게 아니라 장인 김 사원은 벌써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었다.
"몸을 잘 간수 하셨어야죠."
"농사 좀 짓는다고 들로 산으로 어리대더니 저 모양일세. 허구헌날 양반 체면에 농사나 돌보게 한다고 불평하더니........ 일도 즐겨해야지. 억지로 하니........ 쯧쯧........."
"이 마누라가 정말........!"
여전히 말이 많은 장모의 말에 화가 불끈 솟는지 지팡이를 들었다 놓는 장이어른이었다.
"어서 들어가시죠."
서로 더 심한 말이 나오기 전에 중간에 내가 얼른 끼어들어 장인을 비롯해 식구들을 안으로 들였다.
"흡, 보, 승이 아무도 안 보이네요?"
"그야, 자네가 사준 목장에서 양치고, 소 키우느라고 만정리와 무극에 있질 않는가. 막내는 농사짓느라고 바쁘고."
"그렇군요."
서로 이렇게 인사를 나눈 우리는 곧 안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아내에게 일러 준비한 선물을 장모님께 드리도록 했다. 특히 감자와 고구마는 잘 재배해 인근에 널리 보급하도록 신신당부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이고, 이렇게 많은 선물을 다.........."
"예쁜 따님을 제게 주신 데 대한 보은의 인사입니다. 더 많은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으나 나머지는 현금으로 드릴게요."
"정말?"
돈 싫어하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없었다.
"물론입니다. 이번에도 한 스무 마지기 살 돈 드리고 갈게요."
"아니래도 이제 우리도 부자인데........."
"조선 팔도의 갑부인 저만 하세요?"
"암, 어림없지."
"그럼, 두 말 말고 받으세요."
"이렇게 고마울 데가........"
앞치마를 들어 눈가를 찍는 장모님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지려하자 딸인 아내가 나섰다.
"엄마! 울지 마세요. 이 좋은 날에........."
"고맙네. 사위!"
딸의 닦으러 오는 손을 치운 장모님이 급 방긋 웃는 바람에 분위기는 한층 더 화기애애해졌다.
그런데 이때 마당에서는 한 판의 광대놀음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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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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