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박인생-59화 (59/141)

<-- 부마 -->

3

그날 오후였다.

오전에 씨감자 작업도 모두 마치니 나는 문득 이제 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찾으면 지금도 할 일이 태산이었지만 당분간은 아무 것도 안 하고 무조건 쉬고 싶었다. 그간 정무에 시달리고 한양 생활에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던 모양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느긋한 마음을 먹고 새삼 하늘을 우러러 보니 온 누리에 따사로운 양광이 가득했다. 가만히 손바닥을 내밀어 봄의 기운을 느껴본다. 봄은 남으로부터 온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이 모처럼 한가한 내 마음에 내려앉았다.

내 마음만이 아니라 봄바람은 살랑살랑 처녀들 가슴이 저절로 뛰게 한다. 이런 날은 방안에 앉아 글을 읽기보다는 들을 거닐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전의 아내가 쓰던 방을 쓰고 있는 공주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갔다.

어린시녀가 무엇을 물었는지 내가 헛기침을 하고 들어가도, 공주는 공주가 아니라 아랫사람이라도 된 양 얼굴을 붉힌 채, 급히 일어나 나를 맞고 있었다. 나의 등장에 어린시녀가 무슨 잘못을 범했는지 몰라도 화들짝 놀라 외면을 하고 한쪽 구석으로 비켜섰다.

공주보다도 나이가 많은 엄 상궁만이 이런 풍경을 작은 웃음으로 즐기고 있었다.

"날씨가 매우 좋소. 이런 날은 집에 있기보다도 들에 나가 봄을 만끽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공주마마! 절 아니면 궁에만 갇혀 사셨으니 이런 기회에 백성들의 사는 모습도 한 번 봐두시는 것이 유익하지 않겠사옵니까?"

엄 상궁의 말에 공주가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좋아! 봄바람도 쏘일 겸 부마님 따라 ........"

여기까지 말하던 공주가 갑자기 상을 찡그렸다. 그러더니 곧 안색을 회복하고 말했다.

"아무튼 준비하도록 해!"

"네, 공주마마님!"

어린시녀가 엄 상궁보다 먼저 냉큼 대답을 하고 신이 나서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하는데, 공주의 얼굴은 처음의 환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어디가 아프오?"

"부마님!"

엄 상궁이 질색을 하며 나를 불렀다.

"왜? 내가 뭘 잘못 물었어?"

"첩이 둘씩이나 되시는 분이, 초야를 치르고 난 여인네의 행동거지가 얼마나 불편한지 몰라서 묻고 계시옵니까?"

"아하! 그렇군. 깜빡했소. 그런데 엄 상궁도 그런 경험이 있는 것이오?"

"부마님!"

이제는 공주까지 합세해서 고함을 빽 지르는 여인네들이었다.

"험, 험, 내 밖에 나가 기다릴 테니 준비하고 나오시오."

나는 더 있다가는 무슨 얄궂은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일단 밖으로 피신을 했다. 그리고 나는 멀찌감치 대기하고 서있는 삼돌이를 불러 명했다.

"내 외출할 테니, 흥정 삼형제를 모두 부르도록 해. 그리고 무사들도 수행할 준비하도록 하라 이르고."

"네, 부마님!"

"나는 부마보다도 대감이라 부르는 게 좋다."

말을 하며 나는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준비가 덜 끝났는지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알겠사옵니다. 대감마님!"

나의 행동에 삼돌이의 이마에 '재미있다'라고 씌어있었다.

몇 발짝 뗀 삼돌이를 불러세웠다.

"삼돌아!"

"네, 대감마님!"

"아이는 낳았느냐?"

"아들만 둘이옵니다. 대감마님!"

"네가 나보다 낫다."

"별말씀을........!"

나의 말에 삼돌이가 황송한 표정으로 달아나듯 내 명을 수행하러 갔다.

잠시 후.

흥정 형이 뛰듯이 빠르게 걸어오는 것이 보이고, 운검과 운봉사형제 그리고 권율과 이순신도 뒤에 보였다. 또 청하지도 않은 송익필과 손자대까지 따르는 것이 보였다.

'거, 나들이 한 번 거창하게 되었군.'

모여드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며 생각하던 나는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멀리서 일하던 사람까지 온 모양인데, 안에서는 무엇을 하는지 아직도 나올 기색이 없었다.

'하여튼, 여자들이란........!'

번번이 느끼는 것이지만 여자들과 함께 외출 한 번 하려면 무슨 준비할 게 그렇게 많은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남자들이야 자신의 몸만 간단히 치장하면 되지만, 여자들은 이것저것 아무래도 신경 쓸 것이 많으니, 당연히 늦으리라고 돌려 생각하니, 이해가 안 가는 바가 아니었다.

"부르셨사옵니까? 대감마님!"

"흥분과 흥부는?"

"흥부는 학당에 있고요. 흥분은 어제 잔치가 끝나자마자 바쁘다고 바로 비금도로 돌아갔습니다. 미처 인사 여쭙지 못하고 간다고........"

"알았어. 무슨 말인지."

나는 손까지 저으며 흥정의 말을 막았다.

"고구마 묘상(苗床)은 끝난 것이지."

"네, 부마님!"

"옥수수는 아직 못 구했고?"

"다음번에는 꼭 구해오겠다고 양이 선장이 약속을 했습니다."

"대포는?"

"그것도 아직........!"

"그것들도 빨리 구해서 보급하도록 해."

"네, 부마님!"

이때 내 곁까지 도착한 순신이 나에게 물었다.

"나들이를 가신다고요?"

"거창하게 나들이라기보다 날씨가 좋으니 들에 나가 바람이라도 씌자는 것이지."

"무예는 좀 늘었어?"

"쉽지 않습니다."

"뭐든지 첫술에 배부를 수 있나?"

순신과 나는 동갑내기지만 내 지위가 지위니 만큼 나는 하대를 하고 순신은 존대를 했다.

성웅 이순신을 하대하는 나! 이만하면 대박인생 아닌가?

이때 공주와 두 측근이 장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갑시다! 삼돌이는 하인들하고 술과 먹을 음식 좀 챙겨서 따라오도록 해."

"네, 대감마님!"

삼돌이가 부르는 호칭에 모두 그를 째려보았다.

내가 '대감'이라고 부르라고 해서 삼돌이만 눈총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내가 그렇게 부르도록 했으니, 너무 그러지들 마시게."

하긴 시킨 내가 잘못이지 째려보는 사람이나 부르는 사람이나 아무 잘못이 없었다. 정확히 현재 나의 신분은 부마들이 모두 소속되는, 의빈부(儀賓府) 소속 의빈(儀賓)으로 품계는 공주에게 장가를 들었으니, 종1품(從一品) 위(尉)였다.

공주는 정일품 보다 높아 아예 품계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사위는 백년손님이 맞나보다. 혼인을 했으면 동등하게 대해야지, 나는 종일품이고 공주는 더 높은 무품이라니?

아무튼 부마들은 모두 품계(品階)의 구별 없이 의빈(儀賓)이라 했는데, 신분의 높고 낮음을 구별할 수가 없어서 1484년(성종 15)에 의빈 2품 이상을 위(尉), 정3품 당상(堂上)을 부위(副尉), 정3품 당하(堂下)에서 4품까지를 첨위(僉位)라고 부르게 했다.

동시에 공주에게 장가든 사람에게는 종1품의 위를, 옹주에게 장가든 사람에게는 종2품의 위를 주었고, 왕세자의 적녀(嫡女)인 군주(郡主)에게 장가든 사람에게는 정3품의 부위를, 왕세자의 서녀(庶女)인 현주(縣主)에게 장가든 사람에게는 종3품의 첨위를 주었다.

또 부마에게는 주(州)나 현(縣)을 봉작(封爵)으로 하사하는데, 이 짠돌이들은 나에게 그런 것도 없었다. 쉽게 말해 나에게 선조 균이 만경 현을 봉작으로 주면, 관에 진출도 못하는데, 여기서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먹고 살라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되면 내 명칭이 하나 더 생기는데, 만경 위(萬頃 尉)가 또한 내 호칭이 되는 것이다.

내가 부자라서 안 준 모양인데 다음에 궐에 들어가면 챙길 것은 챙겨야겠다. 아무튼 공주도 듣고 있고 하니 앞으로 호칭을 통일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내가 말했다.

"앞으로 나를 부를 때는 모두 '의빈'이라 불러."

"네, 의빈님!"

"갑시다."

나의 명에 모두 발걸음도 가볍게 우리는 산보를 나섰다.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살랑살랑, 처녀들의 방심을 흔들기 딱 좋은 날씨였다. 이윽고 우리가 집을 나서니 전원의 풍경이 펼쳐졌다. 이제 봄을 맞아 논에 쟁기질을 하는 농부도 있었고, 써레질을 하는 농부도 있었다.

빠른 집은 모판을 조성하여 볍씨를 뿌리는 집안도 있었다. 또 어느 집은 잘 정리된 이랑에 씨감자를 심는 집도 있었다. 또 어느 집은 밭에 고구마 묘상을 설치하느라 분주한 집도 있었다. 저 심은 고구마가 잎과 줄기가 나와서 자라면, 그 줄기를 다시 한 번 옮겨 심으면 거기서 고구마가 수확되리라.

고구마 묘상 장면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아직 옥수수 종자를 구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아쉬운 문제가 또 금방 대두될 것이 있었다. 아내들의 집이었다. 생각난 김에 나는 흥정을 불러 말했다.

"부인 둘이 내려오면 거처할 집을 두 칸 새로 빠른 시일 내에 짓도록 해."

"알겠습니다. 의빈님!"

이때 멀리서 말을 채찍질하며 급히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일인일기(一人一騎)가 있었다.

누군가 궁금하여 손으로 해 가리개를 만들어보니 흥분 형이었다.

'바쁘다는 사람이 왜?'

내 마음속에 드는 의문이었다.

말이 입에서 거품을 내뿜던지 말든지 연신 채찍을 가해 달려온 흥분 형이 곧 말에서 가볍게 내려섰다.

"부마님!"

"의빈이라 부르도록 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하는 표정의 흥분이 말했다.

"의빈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래? 큰일 났으면 큰일 두 번 치르면 되지."

비록 썰렁한 농담이지만 긴장한 흥분을 다독이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양이가 비금도에 표류해왔습니다."

"양이(洋夷)? 몇 명이나?"

"열다섯 명입니다."

"많기도 하군."

이렇게 중얼거린 내가 또 물었다.

"표류해왔다는 것은 원래 우리 쪽으로 올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 아니야?"

"네, 원래는 명나라로 갈 예정이었으나 폭풍을 만나 배는 반파되고, 이곳으로 떠밀려온 모양입니다."

"지금 계절이 어느 떼인데 폭풍을 만나? 그것은 의도된 거짓말인데? 그래, 그들의 신분은 조사해봤어?"

"저희들 말로는 선교사가 두 명이고, 이들을 수호하는 군인이 여섯 명, 나머지는 선교사 밑에서 배우는 학생이라 했습니다."

"흐흠.......!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 시끄러울 테니, 음.......! 일단은 내가 그들을 만나보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의빈님!"

"마침 잘 왔어. 지난번에 내가 염초와 유황을 잘 보관하라면서, 이를 연구할 사람들이 곧 갈 것이니 숙소를 지어놓으라 했는데, 그것은 어떻게 됐어?"

"누구의 명이라고 어깁니까? 비금도와 붙은 도초도에 잘 지어놓았습니다."

"수고했어. 온 길에 그 연구원들도 함께 데리고 갈 것이니 그런 줄 알아."

"네!"

"두 척의 배 건조는 다 끝났지?"

"네, 시험 운항 중입니다."

"정말 수고 많이 했군. 제일 큰 배는 건조 중인가?"

"목하 그곳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제 유민들은 얼마나 돼?"

"우리에게 오면 먹고사는 것은 걱정 없다는 소문이 나서,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몰려드는 바람에 지금은 15만 명이 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는 있는 거야?"

"그래도 부족합니다."

"뭐? 뭐하는데, 그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해."

"어린아이와 노인들을 빼면 실제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채 10만 명이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부녀자가 4만 정도 되니 실제로 거친 일을 할 수 있는 장정들은 6만 정도인데, 거선을 만드는데 4만이 동원되고, 1만은 염전을 일구고, 1만은 지금 우리가 전조한 중형배의 절반 크기인 소형선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소형선은 왜?"

"우리가 제작한 중형선만 해도 너무 커서 강에 진입할 수가 없습니다. 천생 강으로 진입하려면 소형선으로 옮겨 싣거나 아예 소형선에 싣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해서 그런 용도로도 사용하고 장차 인근 해역에서 고기도 잡을 생각입니다. 또 신장쇠가 운영하는 대장간에도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합니다. 또 땅은 얼마든지 있으니 사람만 많으면 자급자족도 가능합니다. 해서 농사지을 사람도 필요합니다. 현재는 일부만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주로 노인과 아이들입니다."

"흐흠.........! 잘 하긴 한 일인데....... 일단 알았으니까, 알아서 운영하도록 하고......."

나는 느닷없이 고개를 돌려 흥정 형에게 물었다.

"인삼밭은 잘 되고 있는 거야?"

"네, 재배에 성공하여 곳곳에 삼포밭을 늘려가고 있으나, 음.......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니 최소 4년 근은 되어야 약효가 있고, 제대로 약효와 함께 상품가치를 인정받으려면 6년 근은 되어야 한다고 하기에, 아직 상품으로 출하되는 것은 없습니다."

"잘 하고 있군. 일단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 나들이는 이것으로 접고 각자 준비하도록 해."

"네!"

"연구원들은 가족 전체가 옮겨갈 것이니 그렇게 알고."

"네!"

마음껏 폼 잡고 생색내었던 나들이는 이렇게 허무하게 접어야 했다.

---------------------------------------

.. /작가의 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

이전글: 부마

다음글: 부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