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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인생-54화 (54/141)

<-- 개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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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세태는 술상도 각각 독상으로 받아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싫어 교자상 두 개를 합쳐놓고 푸짐한 안주에 동문들을 전부 상머리에 불러 앉혀놓고 함께 술을 마셨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사형되는 정인홍이 좀 부러운 낯빛으로 동문사제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스승님의 눈이 정확하셨습니다. 벌써 고명대신에 도승지라니요?"

"왜 아니겠습니까? 스승님의 혜안을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죠. 저도 명년에는 과거에 응시하여 출사하고자 합니다."

바로 밑의 사제 김우옹의 말을 받아 내가 말했다.

"아니래도 내가 동문들을 부른 데는 다 이유가 있다네. 중앙 관계에는 나의 인맥으로는 오건 사형이 유일하니 너무 외로워. 해서 내가 주상께 학행으로 천거하여 사형과 사제를 승정원 주서로 임명할 생각이야. 그곳에서 중요한 임무를 하나 맡아주었으면 해. 조보의 발행이 그것이지."

나의 말에 두 사람은 처음에는 희색이 감돌았으나 조보나 발행하라고 하나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조보 알기를 우습게 아는 모양인데, 그게 그렇지 않아요. 삼사(三司)에 이은 제 사의 언론기관이라 할 수 있어요. 아니 어떤 면으로 보면 더욱 막강하지. 조정의 정책홍보는 물론 앞으로는 관리의 비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도가 될 테니, 모두 주서에게 잘 보이려고 아마 뇌물깨나 싸들고 올 거야. 물론 받으면 당장 파직이지."

"하하하.........!"

나의 말에 비로소 표정이 펴지며 좋아하는 정인홍과 김우옹이었다. 나 또한 웃음 띤 얼굴로 이를 바라보다가 나머지 나이 많은 세 사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 사제도 할 일이 있는데, 바로 민간 조보가 탄생하면 거기서 주서가 되어 정론직필을 마음껏 휘둘러, 우리 조선에 맑은 기풍이 흐르도록 하고,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 하도록 해야 돼. 내 동문들에게 한 사람을 소개하도록 하지."

나는 곧 밖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을 시켜 송익필을 들어오도록 했다. 곧 송익필이 들어오자 나는 동문들에게 그를 소개했다.

"당대의 팔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구봉 송익필이오. 서로 인사 나누시오."

나의 말에 따라 잠시 서로 인사를 나누느라 좌중이 시끌벅적했다. 나는 좌중이 다시 조용해지길 기다려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제 주상의 어명으로 민간 조보도 발행할 수 있게 되었소. 그래서 나는 '한양순보(漢陽旬報)'라 해서 열흘에 한 번씩 발행되는 조보를 발행하려하오. 이를 통해 나는 나라의 정책을 홍보하는 것은 물론 백성들의 의식을 개혁코자 하오. 또 보급방법은 곧 송 대방을 만나 전국적으로 보부상을 확대하고 이들을 통해 각 지방에 보급할 계획이오. 물론 유료이겠으나 이문을 남길 생각은 전혀 없소."

"해서 이 중대차한 임무를 구봉이 책임자가 되어 맡아주고, 나머지 동문사제들은 주서가 되어 적극 이의 발행에 임해주기 바라오. 주서라고 해서 우습게보지 마오. 주상과 독대할 수도 있고, 어느 권세가도 무시 못 할 영향력을 발휘할 테니까."

나의 말에 떨떠름하던 사제들의 표정도 펴졌다.

주보의 주서라 하면 오늘날의 신문기자와 마찬가지인데 과거라고 그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보면 오산이었다. 내가 결코 그것은 용납할 수 없으니까. 나는 이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조선을 개혁할 생각인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좋은 말과 글로 주상을 비롯해 중신들을 적당히 띄워주다가 이들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글이 쏟아질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이미 때가 늦어 손을 쓸래야 쓸 수 없는 지경이 이르러 있을 것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이를 통해 역성혁명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관보는 물론 민간 조보에 대해서도 나는 확실한 방향을 정하고 이를 추진해 나갔다.

* * *

다음 날 나는 선조 균에게 주청하여 정인홍과 김우옹을 학행으로 추천하여 정7품 주서에 임명하여 조보 발행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경연장에서 격론 끝에 명종 이후 지금껏 흐지부지 되고 있던 법화(法貨) 발행을 강력히 추진하도록 했다.

상평통보(常平通寶) 1전(錢) 즉 1문(文)은 쌀 1되의 가격과 같게 하고, 이 보다 큰돈도 세 종류발행하게 되니 곧 당오전(當五錢), 당십전(當十錢), 당백전(當百錢)이 그것이었다. 또 뒷면의 액면가 표시 외에 크기와 무게도 차별을 두었다. 1문(文)의 무게는 1전(錢)을 원칙으로 하고, 당오전은 1전(錢)5푼(分), 당십전은 2전, 당백전은 2전5푼을 원칙으로 발행하도록 했다.

또 이 화폐발행은 호조(戶曹) 내에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여 전담하도록 했다. 또 화폐를 임의적으로 발행하다 적발되는 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해 위화를 방지하도록 했다. 이는 곧 쌀과 포로 대표되는 물품화폐와 칭량화폐(稱量貨幣)를 대신하여 상업이 급속도로 발달할 것을 나는 의심치 않았다.

다음으로 내가 이이와 공동 발의한 것은 전국적인 대동법(大同法) 실시였다. 호역(戶役)으로서 존재하던 각종 공납(貢納)과 잡역(雜役)의 전세화(田稅化)가 주요내용이었으며, 이는 중세적 수취체계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제도였다.

조선정부 재정수입의 하나인 그 지역 특산물을 내는 공물은 농민의 생산물량을 기준으로 한 과세가 아니라, 국가의 수요를 기준으로 한 과세였기 때문에 과세량에 무리가 있었다. 또한 고을에 따라서는 생산되지 않거나 이미 절산(絶産)된 물품이 부과됨에 따라 방납 (防納)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제안한 것이 공물을 미곡으로 대신 거두는 대공수미(代貢收米)의 방안이었다. 나와 이이(李珥)에 의해 건의된 대공수미법은 징수된 공납미를 정부가 지정한 공납 청부업자에게 지급하고, 이들로 하여금 왕실, 관아의 수요물품을 조달케 함으로써 종래 불법적으로 관행되던 방납을 합법화시켜, 정부의 통제 하에 두고 이를 통하여 재정을 확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가 공동 제안한 대동법은 새로운 토지세인 대동세를 부담하게 된 양반지주와 중간이득을 취할 수 없게 된 방납인들의 반대가 심했다 따라서 찬반양론의 격심한 충돌이 일어나는 가운데, 우리는 우선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시행하기로 하고, 그 추이를 보아가며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키로 했다.

대동법 하에서는 공물을 각종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하여 징수하게 했고, 과세의 기준도 종전의 가호(家戶)에서 토지의 결수로 바꾸었다. 따라서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1결 당 쌀 12두(斗)만을 납부하면 되었으므로 공납의 부담이 다소 경감되었고, 무전농민(無田農民)이나 영세농민들은 일단 이 부담에서 제외되었다.

대동세는 쌀로만 징수하지 않고 운반의 편의를 위해서나 쌀의 생산이 부족한 고을을 위해 포(布)나 전(錢)으로 대신 징수키로도 했다. 따라서 장차 충청, 전라, 경상, 황해의 4도에서는 연해읍(沿海邑)과 산군(山郡)을 구별하여 각각 미 혹은 포, 전으로 상납하도록 했다.

이를 관리하는 전담기관으로서 선혜청(宣惠廳)이 신설되었고, 여기서는 징수된 대동미를 물종에 따라 공인들에게 공물가로 지급하고, 필요한 물품을 받아 각 궁방과 관청에 공급했다. 따라서 공물의 조달은 선혜청으로 일원화되었다.

대동법의 시행은 지금까지의 현물징수가 미, 포, 전으로 대신 됨으로써 조세의 금납화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촉진시킬 것이다. 그리고 공인들의 활동에 의해 유통경제가 활발해지고 상업자본이 발달하며, 또한 공인의 주문을 받아 수요품을 생산하는 도시와 농촌의 수공업도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과정에서 토지 있는 곳에 세금 있다. 없는 백성들을 공물이라는 미명 하에 계속 울린 것인가? 가진 자는 더 부담해야 된다는 논조로 계속해서 관보는 물론 내가 발행하는 한양순보에도 주장함으로써, 그나마 경기도만이라도 대동법을 실시할 수 있게끔 양보를 얻어낸 것이다.

이 저항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원 역사에서 처음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시작한 것이 충청, 경상, 전라, 황해도까지 실시되는데 꼭 100년이 걸리겠는가. 어쨌든 일단 시작이 되었으니 됐다. 시작이 반이라 하지 않았는가.

아무튼 이어 나는 신분과 관계없이 호(戶) 단위로 군포를 징수하자는 호포론(戶布論)을 제기했다. 호포론은 군역을 지지 않던 양반층에게도 군역세(軍役稅)를 부담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이는 양반층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이에 감필론(減匹論), 결포론(結布論), 결역론(結役論)도 대두되었지만 강력하게 밀고나갔다. 나의 지론인즉슨 백성들의 피 땀 위에서 온갖 지위와 향락은 다 누리면서, 호당 2필을 내게 되어있는 군역세마저 내지 않는 것은 조선을 떠받치고 있는 양반들의 횡포라는 주장이었다.

또 나는 여기서 한 술 더 떠 가난한 일반 백성들은 호당 1필을 내야 마땅하고 부유한 양반들은 호당 세 필을 내야 공평하다는 주장까지, 연일 관보 및 내가 발행하는 한양순보에 떠들게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양반층도 호당 2필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동안 벌집 쑤셔놓은 것 같은 양반들의 상소가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는데, 이는 선조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다시 대제학에 임명된 이황과, 신원된 홍섬 우의정 등이 내 편에 서서 힘을 많이 실어준 덕분이기도 했다.

이 모든 정책의 시행으로 나는 백성들과 상인들로부터는 열렬한 환영을 받는 인물이 되었지만 부유한 양반층에서는 기피 인물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나는 전국적으로 5일장을 활성화 할 것을 또 다시 제의하였다.

인근 중요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주요 소읍이 돌아가며 매일 장이 서는 날이 틀리게 하여, 시장만 떠돌아다녀도 먹고 살 수 있게끔 하는 전문 상인도 양성하기 위해서였고, 점차 이 나라를 농업에서 탈피하여 상공업이 발전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또 여기에 광업촉진책의 일환으로 개인도 광산을 개발할 수 있되, 채굴된 광석은 전부 나라에서 사들이고, 그 대가로 노임을 지급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제동이 걸려 농한기인 겨울에만 시행이 되도록 보완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꼭 농지에서만 백성들이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니라, 대동법 등의 시행으로 수공업이 발달하고, 오일장의 전국적 실시로 상업이 더욱 발달하며, 광업마저 발전시켜 궁극적으로 백성들이 잘 살고, 나라는 풍족한 세원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고, 보다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요리조리 세금에서는 전부 빠져나가는 양반 계층에도 일정 세 부담을 지워 그들이 누리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의무는 행하도록 했다.

나의 이런 방침이 양반들에게는 미움을, 일반백성들에게는 열렬한 환영을 받는 바가 되었지만, 고명대신 이라는 대의명분과 대비와 선조 균을 꼭 붙들고 행하는 나의 개혁에, 온 조선이 일희일비한 것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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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

늘 좋은 날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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