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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인생-53화 (53/141)

<-- 개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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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동갑이라고 아는데, 그가 한양의 동쪽 건천동 아니면 아산에 있을 것아 나는 그곳으로 사람을 급파해 그도 불러올리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동문들 생각도 나서 스승 남명 선생에게 문안 편지도 올리면서 동문들 모두를 한양으로 초대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우리 집에서 이순신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인 10대손 백록(百祿)이 기묘사화의 참변을 겪게 된 뒤, 아버지 정도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민으로 지내 가세가 많이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 되는 1572년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지며 낙마하여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등과에 실패했다. 그 뒤 1576년 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12월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부임한 것이 그의 첫 관계 진출이었다.

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집안의 가세가 많이 기울어진 상태로 나에게 불려오자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민족의 위대한 성웅(聖雄)이 아직은 초라한 모습으로 나를 보고 있음에, 나는 실소가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고 물었다.

"내 뜻을 전해 들었소?"

"심부름 온 자에 의해 대강의 뜻은 전해 들었으나, 일면식도 없는 제게 온 나라에서도 유명한 분이 그런 호의를 베푸는지 의아함을 금 할 수 없사옵니다."

"음........! 그것은 말이오."

이렇게 운을 뗀 나는 비록 의복은 허름했지만, 속되지 않은 의표를 지닌 그를 정시하며 말했다.

"나라가 지금은 평안해 보이나 미구에 큰 어려움에 빠질 것이오. 해서 나는 그 어려움에 대처하고자 유망한 젊은 문신들은 물론 여기 있는 만취당과 같이 장차 군에서도 크게 빛을 발할 인재들을 모아, 국가의 환란에 대비하고자 함이오. 해서 그대가 내 눈에 들었은즉 그런 줄 아고 이곳에 계신, 전 운검으로부터 무예와 학문을 열심히 익히도록 하오."

"저는 그럴 형편이 못 되와........"

"그런 것은 전혀 걱정 마오. 내 집안에 생계 걱정 없도록 철 따라 의복은 물론 매달 쌀말이라도 지원하여, 그대가 전혀 가계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끔 조치를 취할 테니, 학문과 무예에만 정진하기 바라오."

"아직 저는 무예에 입문도 안 한 사람이라........"

"그 역시 걱정 마오. 누구든 태어날 때부터 무예에 능한 것이 아니니,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배우기만 하면 되오."

"감사합니다. 영감마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내게서 은혜를 느낀다면, 나라에 보답하면 그 뿐. 나에 대해서는 잊어도 좋소."

"거듭 감사드립니다. 영감마님!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영감마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러면 된 것이오!"

나는 동갑내기 청년 순신의 등을 두드려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출근하자마자 사간원과 사헌부에 근무하고 있는 성혼과 정철을 내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대들도 아시다시피 세간에서 아직도 삼흉(三凶)이라 불리는 자들 중에서도, 이 인이나 나라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소. 이는 나라를 위해서나 당금 주상을 위해서라도 안 될 일이니, 나는 그대들의 날카로운 붓 끝을 기대하오."

나의 의해 사헌부 지평으로 승차한 정철이 신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래도 저 역시 못 마땅해 하던 참이었소. 곧 제가 탄핵의 상소문을 올려 이들을 곧 조정에서 쫓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좋소. 내 그대의 정론(正論)을 기대하리다."

"저 역시 영감마님의 뜻에 동참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성혼의 말에 나 또한 흔쾌한 뜻을 표했다.

"늙은 중신들이야 일신을 보신하느라 그렇다 쳐도, 젊은 사람들도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이 못 마땅하던 참에, 그대 같은 충정의 언관(言官)들을 보게 되다니, 어린 주상을 위해서라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소."

나의 칭찬에 고무된 그들이 곧 나의 집무실을 물러나 당일로 좌의정 심통원과 우의정 이량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시발이 되어 홍문관에서도 연일 탄핵 상소가 올라오더니, 이제는 삼사(三司)가 연명하여 매일 같이 하다시피 탄핵의 상소가 올라왔다.

뿐만 아니라 이를 기화로 재야에서도 이들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나는 이제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보고, 이를 정면으로 거론했다.

그것도 어명으로 주요 대신들이 전부 참석하는 조강의 경연장에서였다.

* * *

경연장(經筵場).

나는 조강이 끝나자 전 주요 관리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 앞에 수북이 쌓인 상소를 집었다 놓으며 입을 열었다.

"심 좌의정은 왕대비마마의 뜻을 받들어 어진 정사를 펼쳐야 했고, 또 이 좌의정 역시 선대왕의 뜻을 받들어 윤원형 일파를 견제했음이 마땅하나, 그분들의 뜻을 받들기는 고사하고, 축재와 자신의 세력을 심기에 부심하였으니, 오늘 날 이런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오? 이 상소 전에 군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저로서도 더 이상 둘의 비행을 묵과할 수 없다고 보고, 두 사람의 삭탈관직은 물론 귀양을 건의 드리는 바입니다."

나의 말에 좌중이 싸했다. 침묵만이 감도는 좌중에 다시 내가 발언을 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척신 윤원형 일당의 발호가 먼저 문제가 되었지만 저는 이렇게 중신들이 축재에나 열을 올리고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게 된 배경에는 삼사(三司)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데 그 큰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해서 저는 조보(朝報)를 활성화 하여 이의 폐단을 막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른 나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까지 조보는 인쇄(印刷)를 못 하고, 필사하는 바램에 볼 수 있는 사람들이 한계가 있었다고 봅니다. 해서 저는 조보를 아예 활자로 찍어내어 지방의 말단 서리들까지 보게 하여, 국정의 중요 정책을 홍보하는 것은 물론 오늘과 같은 사건도 대대적으로 보도케 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경각심과 아울러 관료 사회에 일대 경종을 울리는 사건으로 취급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간에 의한 조보도 발행케 함으로써 이를 통해 국정의 홍보는 물론 관리들의 비행까지 낱낱이 까발려 다시는 백성들의 눈과 여론이 무서워서라도 권력을 탐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하는 자들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해서 저는 민간의 조보는 세종대왕의 어지신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으로 발행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의 견해가 어떠한지요?"

"말단 무지렁이까지 국정에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나와 삼사에 의해 탄핵된 이량이 눈에 불을 켜고 반대했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예로부터 백성을 하늘과 같이 모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취지에도 부합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따가운 시선이 무서워서라도 나라의 중책을 맡은 분들이 못 된 짓을 못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을 위한 정책도 많이 쏟아질 것으로 봅니다."

"엄연히 이 나라에는 국법이 있고, 신분제가 있거늘........"

심통원의 반발에 내가 또 반론을 제기했다.

"신분제라는 것도 이제는 다 무너지다시피 했습니다. 개국 초에는 농민들도 과거를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는 것에 급급하다보니 지금은 과거가 양반들의 전유물로 전락하지 않았습니까? 이 부터가 태조대왕의 어지신 뜻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신 대광보국승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이 준경 아뢰옵니다. 이는 도승지의 말이 맞는 바, 두 사람을 삭탈관직하고 조보를 인쇄할 수 있게끔 함은 물론 민간의 발행도 허용해야만 나라의 기강이 바로서지 않을까 사료되어집니다. 전하! 윤허하여 주옵소서!"

"윤허하여 조옵소서! 전하!"

이 준경에 이에 나까지 읍소하자 선조 균이 말했다.

"오늘부로 좌의정 심통원과 우의정 이량에 대해서는 삭탈관직하고, 귀양지에 대해서는 여러 대신들이 논해 품의하기 바란다. 조보 인쇄문제와 민간의 발행 문제는 일단 허하되 문제점이 발생 될 시 보강하도록 한다."

의젓한 선조 이 균의 명에 두 사람이 대성통곡을 하고 나는 슬며시 웃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 균이 나에게 물었다.

"경이 하도 강력히 주장하길래 과인이 허락하기는 했소만, 아무 문제가 없을까? 내 말은 구중궁궐의 일과 대신들에 대해 일반 백성들이 너무 자세히 알아도 권위가 안 설 텐데?"

"중요한 정책들에 대해서 피알을 하고........"

'이크........!'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전생의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일이 지금도 가끔 있었다. 지금도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균을 위해 나는 급히 둘러대지 않을 수 없었다.

"중요 정책들을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만 제대로 알리면, 기득권층의 반발로 시행이 늦추어지거나 보류되었던 정책들도, 백성들의 여론이라는 힘을 얻고 제대로 추진될 수도 있습니다. 하고 낱낱이 까발려지는 비행이 두려워서라도 대신들이나 관료들도 비행을 덜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럴까?"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균을 보니 그의 생각의 일단을 알 수 있었다. 원 역사에서 1578년 민간인들이 생계를 위한 방편의 하나로 이른바 민간 조보를 인쇄하여 발행한 사건이 발생하자, 선조는 곧 그 발행을 중단시키고 관련자들을 모두 유배시킨 바가 있었다.

그 일단의 생각이 벌써부터 드는 것인지 회의적인 그의 생각이 나는 못마땅하여 더욱 웅변조로 이의 간행을 역설하였다.

"3사(三司) 이외의 또 하나의 중요 감시 집단을 세우는 것이니, 상하가 보다 더 투명해지고 맑은 기풍이 흐를 것입니다. 여기에 국정의 중요한 정책들의 홍보도 강화하고요."

"알단 알겠소. 조보 발행이 원래부터 승정원의 소관행위이니 알아서 잘 하도록 해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선조 균에게 급히 감사를 표하는 나이지만 내심에는 득의양양 했다.

'이것이 네가 두는 최초의 자충수인지는 모를 것이다. 음 하하하.........!'

여기서 당시의 조보에 대해서 언급하면 이랬다.

조선 시대 관보(官報)로, 기별지(奇別紙), 조지(朝紙), 저보(邸報), 난보(爛報), 한경보(漢京報) 등으로도 불렸었다. 조보란 조정의 소식 또는 조정에서 내는 신문이라는 뜻이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기별 또는 기별지로 통하였는데, 기별은 곧 소식이라는 뜻으로 조보가 소식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조보의 기원에 대해서 현재까지 알려진 조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종실록』 권38 중종 15년(1520) 3월 26일자에 실려 있는 기록이다.

이 조보는 중종 이후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계속 발행되었으며, 1895년 2월 '관보(官報)'로 바뀌면서 없어졌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발행하였던 조보는 정부의 공보 매체 내지 관보의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오늘날 관보와 비슷한 성격 및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조보에는 단순한 보도 사항인 조정의 소식보다 관민의 사상과 여론의 계도(啓導)를 위한 내용들이 더 많았다. 발행 절차는 승정원에서 국가 통치 상 필요한 사건들에 대한 소식을 취사선택해 그 자료들을 산하 기관인 조보소에 내려보내면 조보소에서 이들을 발표하였다.

발표된 소식은 각 관청이나 기관으로부터 파견된 서리 또는 기별서리(寄別書吏)들이 그곳에 와서 서사(書寫)하여 각자의 기관으로 발송하였는데, 그 서사된 것이 바로 조보였다. 필사된 각각의 조보는 필사자에 따라서 그 내용과 체재가 동일하지 않았으나 처음 필사된 것은 다시 계속 복사되어 여러 산하 기관 또는 독자들에게 배포됨으로써 그 내용과 체재가 다소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보의 크기는 대체로 세로 35㎝이고 길이는 일정하지 않았다. 제호나 기사의 제목도 없었으며, 발행일자 일부(日附)만이 매호의 첫머리에 적혀 있다. 편집에서도 각 기사들을 사건 처리 순서에 따라 기록할 뿐이었다. 기사는 붓으로 필사하였으며, 사용 문자는 한문이었으나 모든 문장이 한문식 표현은 아니었고, 이두식 표현을 섞어 쓰기도 하였다.

당시의 인쇄 기술 수준으로 볼 때 조보는 충분히 인쇄될 수도 있었으나, 인쇄하자는 신하들의 논의를 왕이 여러 번 묵살한 것으로 보아 그 배포 범위를 제한 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필사만 하게 했던 것 같다. 또, 왕은 조보의 내용까지 엄격히 통제해 게재할 사항들과 게재해서는 안 될 사항들을 직접 지시하기도 하였다.

조보의 배포 범위는 원칙적으로는 삼공(三公:삼정승), 판서, 한성부윤 및 기타 중앙관의 서장, 그리고 지방의 절도사, 병마절도사 등 현직 및 전직 고급 관리들에게만 배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공식적으로 일부 사대부들까지도 볼 수 있었던 것 같으며, 조선 말기에는 일반 양반들도 기별서리나 조보를 배포하던 기별군사(奇別軍士)들에게 돈을 주고 이를 입수해 읽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대중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 영향의 범위도 적었다. 한편, 사대부들에게는 조정의 정사에 관한 관심을 어느 정도 만족시켜줌으로써 오늘날의 신문과 같은 기능도 담당하였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산청에서 나의 동문들이 떼거리로 상경하였다. 스승 남명 선생은 오시지 않았지만, 정인홍(鄭仁弘), 김우옹(金宇顒), 하항(河沆), 정구(鄭逑), 최영경(崔永慶)이 그들이었다. 이들의 상경 소식에 나는 평소 보다 빠르게 퇴근하였다.

"잘들 오셨소. 사형 세제들!"

"우와........! 이젠 완전히 청년이 다되었는데요?"

김우옹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러는 자네는 벌써 노티가 나네."

"에이, 말을 해도 모처럼 만난 사제에게 할 소리예요."

"사실이 그런 걸! 하하하.......!"

"하하하.........!'

모두 내가 놀리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본인만 울상을 짓고 나머지는 따라 웃으며 즐거워했다.

"스승님은 무고하시고?"

나의 물음에 사형되는 정인홍이 받았다.

"무고 하시네만, 얼마 전에 받은 제자 곽재우(郭再祐)라는 놈이 보통 개구쟁이가 아니어서, 우리가 다 올라왔으니, 애 좀 태우실 걸세."

"몇 살인데요?"

"이제 12살이야."

"한창 동서남북도 모르고 날 뛸 때겠군요."

"왜 아니겠는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모처럼 만났는데,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 합시다."

나는 동문들을 데리고 내가 기거하는 사랑채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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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고맙습니다!

^^

늘 행복한 날들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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