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명 -->
3
선왕의 시신을 모신 빈전의 동쪽에 하성군 이 균이 머물 천막이 쳐지고, 유언장과 옥새 등 여러 가지 의장물과 함께 설치하여, 새 왕에게 옥새를 건네 줄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이 균은 천막 안에서 입고 있던 상복을 벗고 예복인 면복(冕服)으로 갈아입었다. 이어 이 균은 근정전의 뜰로 나아갔다.
이후 이 균은 선왕의 유언장과 옥새를 받아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에게 전해주고는 천막으로 돌아갔다. 천막에서 다시 나온 이 균은 면류관을 쓴 채 붉은 양산과 푸른 부채를 든 자들에게 둘러싸여, 가마를 타고 용상이 설치된 근정전으로 향했다.
이 균이 오른쪽 계단을 통해 용상에 올라앉았다. 새로운 왕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근정전 대에는 향이 피워지고 즉시 즉위교서가 반포되었다. 즉위식장을 가득 매운 대소 신료들은 두 손을 마주잡아 이마에 얹으면서 외치기 시작했다.
"천세(千歲)!"
"천세(千歲)!"
"천 천세(千 千歲)!"
이로써 모든 왕의 즉위식이 끝났다.
나 또한 열중에서 내 뜻대로 되었다는 안도의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또 내가 웃을 일이 있었으니 국상 기간이므로 당연히 혼례도 취소되었다. 아니 연기되었다. 3년 동안.
그렇지만 인순공주의 나이를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 더군다나 발을 구를 그녀를 생각하면.
* * *
왕의 즉위식 직후 중신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거기서 결정된 사항은 왕의 나이 이제 12살로 보령(寶齡) 아직 유치하므로, 대비가 된 인순왕후 심 씨에게 수렴첨정을 주청하였다.
그날 오후.
대비 인순왕후 심 씨가 나를 불렀다. 대비는 아직 교태전에서 머물고 있었다. 시녀와 상궁들까지 모두 물리친 가운데 독대가 이루어졌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대비가 부르튼 입술을 떼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윤 진무께서는 이 나라에 둘 밖에 없는 고명대신(顧命大臣)이 되셨습니다. 아직 보령 유치한 주상을 옆에서 잘 도와주세요."
"신의 의당 할 도리입니다."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아무래도 측근에 계셔야 할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만........"
"도승지(都承旨)를 맡아주세요."
"대비마마의 염려가 크시니, 마마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나의 승낙에 흡족한 표정을 지은 대비 심 씨가 말했다.
"하고 이제 왕대비마마를 연금에서 해제시켜도 되지 않겠어요?"
"아직은 이른 감이 있습니다. 아직도 중요 요직에 심통원을 비롯한 측근들이 시퍼렇게 살아있으므로 곤란할 것 같습니다."
"그럼, 좀 더 지켜볼까요?"
"네, 마마!"
"그럼, 그럽시다."
내가 말이 없자 대비 심 씨의 말이 이어졌다.
"당연히 국상기간이라 혼례가 미루어져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저야 그렇다 쳐도 공주마마의 상심이 크시겠지요."
"그야 이를 말입니까. 더욱 섧게 웁디다."
대비의 이 말에 내심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느라고 나는 애를 먹었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내가 물었다.
"중신들의 요청대로 수렴첨정을 하셔야겠지요?"
"글쎄, 그것이......... 나는 별로 뜻이 없는데......."
"안 됩니다. 하셔야 합니다. 괜히 왕대비마마가 또 하신다고 하면 골치 아픕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긴 해야겠지요."
대비 심 씨는 별로 내키지 않는지 표정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녀자로서 국정에 관여한 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심 씨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내 주상과 의논하여 그렇게 할 테니, 그런 줄 아세요."
"알겠습니다. 대비마마!"
"이만 물러가도 좋아요."
"신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대비마마!"
"멀리 나가지 않겠어요."
"그럼........!"
인사를 하고 나온 나는 새삼 도승지(都承旨)의 임무를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의금부 진무와 마찬가지로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이었으나, 그 임무는 요즈음 청와대 비서실장 격이었으니, 그 임무가 막중하기 짝이 없었다.
승정원 고유의 임무 외에 경연(經筵), 입시(入侍)에 참석하고 관리를 임명하는 일도 겸했으며, 예문관 직제학(直提學), 상서원(尙瑞院)의 정(正)을 겸직하는 막강한 자리였던 것이다.
여기서 예문관(藝文館)이 무엇을 하는 기관인가 하면, 사명(詞命:왕이 쓰는 각종 의례문서, 명령서 등)을 짓는 일을 하는 곳이다. 또 상서원(尙瑞院)은 정5품아문으로 새보(璽寶:왕의 인장), 부신(符信), 절월(節 鉞), 마패(馬牌)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아무튼 이 기관의 장(長)이 또한 나였던 것이다. 품계만 정삼품이었지, 막강한 실세가 아닐 수 없었다. 더 더군다나 선조 이 균의 나이 아직 어리니, 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이로써 측근 정치 즉 비서정치가 바야흐로 펼쳐지려 하는 것이다.
물론 수렴첨정을 하는 대비 심 씨가 있긴 했지만 아녀자가 정치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중요한 사항은 그녀와 상의하면서, 바야흐로 정계에 내 세력을 부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도래한 것이다.
여기에다가 대비 심 씨의 나에 대한 신임 역시 투철하니 새로운 세도가가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역대의 척신과는 달리 그렇게 심하게 할 의도는 없었다. 너무 나가도 좋은 끝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고명대신이라는 타이틀은 원로라도 함부로 하기 어려운 무게감이 있는 존재이니, 감히 내가 정삼품 당상관이라 해서 함부로 굴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왕의 측근에서 인사까지 주무를 수 있는 위치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다음 날이었다.
선조 이 균이 나를 부르더니 정식으로 나를 도승지(都承旨)로 임명하였다. 한편 대비 심 씨는 중신들의 수렴첨정 요구를 형식적으로는 사양하고 있지만, 불원간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상중이므로 백포(白袍)에 백 익선관(翼善冠)을 쓴 12살의 어린 임금 이 균이 제법 의젓하게 나를 불렀다.
"도승지!"
"네, 전하!"
"도승지는 어떻게 선대왕께서 익선관을 써보라고 할지 알았지?"
"꼭 그렇게까지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신이라면 어떻게 후계를 정할까? 한 번 생각을 해보다 보니, 그런 예상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을 끊고 이 균의 눈치를 보니 완전 나의 이야기에 빠져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해서 나의 말이 이어졌다.
"익선관은 곧 왕의 상징이니, 만약 왕위를 물려 줄 마음이 있는 후손 가운데, 이의 의미를 알고도 덥석 쓰는 자는 야심이 있는 자이니, 비록 선대왕께서 보령 아직 젊으셨으나, 그의 야심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을 테고, 모르고 그냥 덥석 쓰는 자는, 멍청하니 왕재(王才)가 아니라 판단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또 다시 말을 끊고 선조 이 균의 눈치를 보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알면서도 정중히 사양하셨으니 선대왕께서 흡족하시어 그날 바로 심중에 낙점을 하셨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허, 허.......!"
한숨 비슷하게 탄식을 내뱉은 이 균이 말했다.
"그러고 보면 도승지가 나를, 아니 과인을 왕을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뭐 원하는 것이라도 있소?"
"있습니다."
나의 말에 선조 이 균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뭐라고 할까?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랄까, 아무튼 그런 그에게 나는 찬물을 끼얹었다.
"바른 정사를 펼치셔서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주옵시고, 만백성을 편안하게 하시옵소서."
"에이, 난 또 뭐라고? 그런 정도 소리는 영감탱이들 입에서 나올 소리지, 경의 입에서 나오니 안 어울리는데.......? 다른 청을 해보세요."
"조식, 이황 등 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거유들과,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옵시고,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이이와 같은 젊은 인재들을 대거 발탁하여 조정을 청신케 하옵소서."
"에이, 실망인데........! 늙은이들 할 소리만 하니, 다른 청 없어?"
'아, 그거 정말 집요하네.'
아직 어린 놈(?)이 정말 집요하게 나를 간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작은 청이라도 하나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다.
"선대왕의 고명을 전해 전하가 보위에 오르게끔 일조를 한, 현 승정원 주서 오건의 품계를 올려주시옵소서."
"생각보다 청이 작군."
혼자 중얼거리듯 말한 이 균이 물었다.
"오건이 누구지?"
"개인적으로는 신의 사형되는 사람 되는 사람이옵니다."
비로소
'그러면 그렇지!'
하는 일종의 안도의 표정을 지은 이 균이 말했다.
"그건 내가, 아니 과인이........ 아직 입에 익지를 않으니 자꾸 말실수를 하네. 아무튼 그 사람은 과인이 조치할 테니, 다른 청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알았지?"
"네, 전하!"
나의 대답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이 균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남명선생과 퇴계 선생이야 온 나라 안에 유명하니 과인도 잘 알겠는데, 구도장원공 이이라는 사람은 누구지?"
"아홉 번씩이나 장원을 한 사람이니 인재 아니겠습니까? 불러 한 번 써보시되, 제 밑으로 보내주십시오. 인물 됨됨이를 한 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그럴까?"
"망극하옵니다. 전하!"
내가 갑자기 부복하여 머리를 조아리니 이 균은 심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경이 과인이 내린 명이라고 사명(詞命)을 작성하여 올리면, 내가 아니 과인이 허(許)하도록 하지."
이 당시 이이 율곡은 28세로 아직 관직에 발을 내딛지 않은 상태였다. 원래 이율곡은 29살이 되는 1564년에 정6품 호조(戶曹) 좌랑(佐郞)으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디게 되나, 나에 의해 한 해 빠르게 출사하게 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되어 율곡 이이와 나의 사형 오건은 정육품(正六品) 색승지(色承旨)가 되어 내 곁에 머물게 되었다.
색승지(色承旨)라 함은 일정한 일을 맡거나 또는 책임을 맡은 승지를 말함인데, 여기서 일정한 일이라 함은, 나의 좌우에서 내 비서실장 노릇을 하는 일이고, 책임을 맡는 일이란 내가 그 때 그때의 일을 전담시키면, 그 일만 맡아 전담 처리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왕의 비서실장으로서 아래에 오 승지(五 承旨)를 두고, 좌우로는 이 인의 색승지를 거느리고, 그 밑에 주서 2인 그리고 서리 28인을 거느리고, 정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 * *
내가 궐 밖으로 나가니 운봉 사형제가 말을 대령한 채 나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운봉은 입술이 터지고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는가 하면, 사제 운곡은 두루마기의 옷고름이 날카로운 예기에 베어져 앞섬이 그냥 열린 채였다.
내가 그들을 거느린 이래 누구에게 두드려 맞고 검에 옷섶을 잘린 정도로 낭패한 모습은 처음 보는 지라 대경하여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운봉은 창피한지 말을 않는데 운곡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사형제가 하산한 이래 수박(手搏)으로 사형이 진 일은 처음이고, 검으로 제가 패한 적도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들이 졌다는데 대해서 나는 괜히 내가 패하기라도 한양 기분이 나빠서 고함을 질렀다.
"자초지종을 말하라."
잠시 망설이던 운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 사형제가 평소와 같이 궐 밖에서 영감마님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데 마포여각에서 하인을 보내 기별을 보내왔습니다. 주사가 심한 자가 있어, 금동과 은동이 제지하다가 호되게 당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운곡이 잠시 허공을 노려보다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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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
늘 즐겁고 유쾌한 날들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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