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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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마님!"
뒤돌아보니 대비 전을 책임지고 관리하고 있는 정(鄭) 부진무였다.
"무슨 일이오?"
"아니래도 영감마님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무슨 일로?"
"대비마마께서 한 번 뵈었으면 합니다."
"알았소. 언제?"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하셨습니다."
"알겠소. 지금 즉시 가봅시다."
"네, 영감마님!"
나는 정 부진무를 앞장세워 대비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통명전으로 향했다. 내가 통명전 앞에 이르니 의금부 소속 나장 4명과 내금위 위사 8명이 함께 번을 서고 있었다.
윤원형에 대한 거사가 성공하자 비로소 협조적으로 나오는 내금위장이었다. 나는 인간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쓰게 웃으며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게. 우리 부마! 내 입 뗀지 얼마 안 되었는데 바로 왔군."
"잠시 주상을 뵙고 가던 길에 부진무와 마주쳤습니다."
"그래요? 그거 잘된 일이군요."
이때였다. 함께 있던 중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 씨(沈 氏)가 말했다.
"대비마마, 아무리 반가우셔도 너무 오래 서있게 하시는 것은 아니온지요?"
"호호호........! 그래요. 내 반가운 마음에 그만........ 거, 앉으세요."
"네, 대비마마!"
나는 내 편을 들어주는 중전이 결코 고맙지 않았다.
내 명 아니 주상의 명을 어기고 대비 전에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이를 들여보낸 위사와 내 부하에 대해서도 분노가 끓어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도 분위기가 아니어서 나는 내심 참고 벼르고 있었다.
내심 빠르게 이런 생각을 했지만 나는 대비의 말대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앉았다. 내가 말이 없자 계속해서 대비가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약조를 지켜줘서 고맙고, 또한 택일을 해야겠기에 불렀소."
"날짜는 잡으셨습니까?"
"10월 초아흐레로 잡았는데 이의는 없겠지요?"
"너무 촉박한 것 아니옵니까?"
"공주의 나이 까딱 하다가는 마흔을 넘기겠어요. 해서 이 어미는 하루라도 빨리 치우고 싶은 심정이라오."
그녀의 말에 오늘이 며칠 인가 자세히 셈해보니 구월 스무사흘로 딱 보름 밖에 남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약조한 혼례이니 이제 더 이상 미룰 명분도 없어 나는 선선히 동의하고 말았다. 그리고 시일이 촉박하다 하나 내가 준비할 일은 별로 없으므로 내게는 별로 지장이 없었다. 아니 집을 하나 또 장만하기는 해야 할 것 같다.
"그럼, 그대로 혼례 절차를 진행하기로 하겠소."
"네, 대비마마! 헌데 공주마마는 어디 갔사옵니까?"
"왜? 보고 싶소?"
"그게........!"
"호호호........! 부마도 부끄러움을 타는 것 같아 보기가 좋구료. 아무튼 택일을 한다니 부끄럽다고, 이 방 근처에는 얼씬도 않는구료."
"네, 그렇군요."
이때 중전 심 씨가 나서서 말했다.
"대비마마, 말씀 다 끝나셨습니까?"
"왜, 중전이 부마에게 할 이야기라도 있는 게요?"
"네, 대비마마! 다름이 아니오라, 어떻게 되었든 택일을 한다고 해서 오기는 왔지만 주상 전하의 명을 어기게 된 꼴이고, 부마의 휘하에게도 폐를 끼쳤으니 사과도 좀 하려합니다."
"여기서 오래 지체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좋지 않은 일이니, 서운하지만 오늘은 본전이 양보를 해야겠네요."
"다음에 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먼저 인사를 하고 일어나는데 중전도 몇 마디 대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함께 일어섰다. 둘은 다시 목례를 건네고 대비 전을 빠져나왔다. 앞서가던 중전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교태전(交泰殿)으로 갈까요?"
"네, 중전마마!"
나는 대답을 하고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교태전. 중전이 거처하고 전각이었다.
둘은 잡인을 물리치고 마주앉았다.
나를 청한 중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주상 전하의 건강이 안 좋아 걱정이 많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윤원형 일당을 제거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였어요. 이 이야기를 대비마마 계신 곳에서는 할 수는 없잖아요. 하고 주상 전하를 대비마마로부터 떼어나 줘서 고맙기도 하고요."
"그것은 엄연히 소신이 할 일이었습니다."
"그 많은 중신들이 있으면 뭘 해요. 지금까지 아무도 실행을 못했잖아요. 내 이번 일을 계기로 윤 진무와 좀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요."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중전마마!"
나는 얼른 부복하여 감사를 표했다.
중전 심 씨는 부덕(婦德)이 뛰어난 여인으로 한 점 행동거지가 흐트러짐이 없고, 훗날 명종 사후 선조를 수렴첨정하게 되는데, 딱 1년에 그쳤고, 수렴첨정 기간에도 윤 대비와는 달리 자신의 종족 즉, 친정인 심 씨 가문을 위해서 크게 나서지도 않았다.
아주 나서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무튼 내 계획에 따라 나도 접근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참인데, 중전이 먼저 손을 내밀어주니 내 입장으로서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여튼 이 번 사건을 계기로 나와 중전은 좀 더 긴밀한 관계가 되었다.
* * *
내가 혼례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어느 날이었다. 혼례 준비라야 내가 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흥선이 살집을 구해놓으면 적당한지 아닌지 판별하고 가부를 결정하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아직 선택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오늘도 나는 업무는 뒷전이고 퇴근 후에 어느 집을 구경하기로 하여 그 집은 괜찮을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혼례일이 오 일 밖에 남지 않아 이제는 웬만하면 결정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끼 내시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내게 말을 전했다.
"어명이옵니다. 속히 입실하라는 분부이옵니다."
"알았네. 앞장서시게."
"네, 영감마님!"
나는 달리듯이 빠르게 종종거리는 새끼 내시를 따라 나도 빠르게 걸었다. 그런데 새끼 내시가 간 곳은 정무를 보는 사정전이 아니라 왕의 침전인 강녕전이었다. 나는 요즈음 왕이 회복되어 사정전에서 정무를 보고 있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지난번 명종을 만난 이래로 나도 한 번 왕을 배알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의아하였지만 빠르게 새끼 내시를 따라 침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비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명종 환은 침전 바닥에 누워있고 중전은 그 머리맡에 앉아 간곡히 부르고 있었다.
"전하, 전하! 정신을 차리옵소서!"
명종이 혼수상태인 모양이었다. 중전의 뒤로도 두 사람이 보였는데 모두 초조한 낯빛이었다.
영의정이었던 윤원형의 유배 후 새로 영의정에 임명된 이준경(李浚慶)과, 대비 문정왕후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좌의정 심통원(沈通源)이 그였다. 그 외에도 어의 두 명이 명종에게 달라붙어 환후를 진맥하고 서로 처방을 상의하고 있었다.
나의 등장에 모두 한 차례 시선을 주었지만 그뿐이었다. 명종의 환후가 위중한지라 서로 인사를 나눌 게재도 못되었다. 나도 즉시 왕의 곁으로 다가가 상태를 지켜보았다. 이때 어의 양인은 상의가 끝났는지, 한 사람은 왕의 정수리에 침을 놓기 시작했고, 한 사람은 약을 조제하러 가는지 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러길 채 차 한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아 어의가 침이 효험을 보았는지 문득 명종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어눌한 말투로 물었다. 눈도 잘 보이지 않는지 초점도 없었다.
"진무....... 윤 흥....... 왔는가?"
"신 대령했사옵니다. 주상 전하!"
"후사를 ......... 잘....... 부탁하네."
이때 곁에 있던 중전이 급하게 물었다.
"후사는 누구로 정할까요?"
"........."
그러나 왕의 대답은 없었다. 약간 쳐들었던 고개가 다시 떨어지며 또 다시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전하!"
"전하!"
여기저기서 명종 환을 부르는 가운데 그 목소리에는 모두 울음기가 배어있었다.
이에 어의가 또 다시 급하게 명종의 정수리에 시침을 하자, 명종의 눈이 뜨여져 사방을 살피는 듯했다. 이때 어의가 말했다.
"다급하옵니다. 한 분이 내의원에 가셔서 얼른 약을 가져오십시오."
어의도 다급하니 제대로 설명을 못하지만 비상시에 쓰는 구급환을 이르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어의에 말에 영의정 이준경이 명종의 곁에 착 달라붙어 있는 심통원을 보고 말했다.
"주상의 환우가 심히 불안정하니 좌상대감이 얼른 가서 어의가 말한 약을 가져오시게."
"알겠소."
기분이 상하는지 심통원은 툴툴거리면서도 대전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금방 다시 돌아왔다.
"약은 어쩌고 바로 돌아오오?"
"아랫사람에게 시켰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상감에게 쓸 약을 아랫사람에게 맡기다니. 지금 제 정신이오!"
"알았소. 곧 다녀오면 될 것 아니오."
심기가 상해 다시 툴툴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심통원이었다.
이때였다.
중전이 다시 급하게 물었다.
"전하, 후사를 누구로 정할지 하교하여 주세요?"
순간적으로 다시 정신이 드는지 명종 환이 고개를 약간 들었다.
그리고 아주 미약한 음성으로 말했다.
"덕흥군의........"
여기서 한참 숨을 몰아쉬던 명종이 다시 새하얗게 말라붙은 입술을 떼었다.
"삼자!"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갑자기 고개가 뚝 떨어지더니 옆으로 돌아갔다.
"전하!"
"전하!"
대경하여 모두 부르짖는 가운데 명종은 이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이에 어의가 급히 진맥을 하고 눈까풀을 까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훙서(薨逝)하시었습니다."
진짜 모두 대경하여 다시 한 번 목 놓아 왕을 부르는 가운데, 나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른 밖을 향해 외쳤다.
"개 아무도 없느냐?"
"상선 대령이오."
"도승지 입시요!"
"빨리 주서를 입실시키시오!"
"네, 영감!"
잠시 후, 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아직 승정원 주서로 재직하고 있는 오건 사형이 들어왔다. 아는 체 할 겨를도 없었다.
"받아 적으시오!"
"네!"
"다음 대 주상의 보위요. 덕흥군(德興君) 제삼자(第三子) 하성군(河城君)이요!"
"네!"
오건이 빠르게 적어나가는 가운데 내가 좌중을 보고 물었다.
"모두 동의하지요?"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다음 대 보위는 결정되었다. 나는 다시 큰 소리로 밖을 향해 외쳤다.
"덕흥군 제삼자!"
나의 말을 복창하듯 오건이 큰소리로 따라외쳤다.
"덕흥군 제삼자 하성군!"
그리고 채 먹물이 마르지 않은 종이를 등에 짊어지고 다시 한 번 외치며 밖으로 나갔다.
외부의 사람에게 다음 왕을 결정하는데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는 요식 행위였다.
이어 궐내에서는 곡소리가 진동을 하는 가운데 모두 슬픔에 잠겼다.
* * *
내가 이 세계에 개입을 해서 그런지 역사가 예상외로 빠르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원래 명종은 실제 4년 후에 승하해야 맞았다. 2년 후 대비 문정왕후가 죽고 이 해에 죽을 고비를 넘긴 명종은 다시 2년이 지난 1567년에 죽음에 이르러야 맞으나, 나의 개입 탓인지 모두 일찍 훙서했다.
아무튼 명종 환의 국상(國喪)을 맞아 왕실의 요인들 모두가 관(冠)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흰옷과 흰 신과 거친 베로 된 버선을 신었고, 3일 동안 일체의 음식을 금했다. 일반 백성들도 예조의 계령에 따라 온 백성이 소복을 하고 백립(白笠)을 썼으며, 방방곡곡에 빈소를 차리고 곡반(哭班)을 편성하여 곡을 했다.
이렇게 6일이 지나자 모두 상복으로 갈아입고 왕위를 오래 비워둘 수 없기 때문에 6일 만에 임금의 즉위식이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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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고맙습니다!
^^
늘 행복한 날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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