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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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비 전을 나와 잠시 견평방으로 돌아와 업무지시를 하고는 바로 퇴근을 했다. 며칠 밤샘을 했다고 하얀 백주대낮이 낯설었다. 호위하느라고 같이 집을 못 들어간 운봉 사형제가 내가 터벅거리자, 말을 끌고 같이 박자를 맞추어 터벅거렸다.
"가까운 주막으로 가자."
"네? 집으로 가시는 게 아니고요?"
"오늘은 마포나루로 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내 심정을 짐작했는지 반문했던 운곡이 짧게 대답하며 보폭을 넓혔다. 주청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우리는 채 반각도 걷지 않아 축 늘어진 주기(酒旗) 아래로 들어섰다.
생전 처음 와보는 집이었다. 그렇지만 상관이 없었다.
"어서 오세요. 나으리. 우리 집은 처음이신가보죠?"
"독주를 동이 째 내와. 안주는 제일 비싼 것으로."
"네, 네!"
나의 말에 황급히 달려가는 주모였다.
"자네들도 앉지."
"저희들은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내 생각만 했군. 시키시게."
"네, 영감마님!"
나의 지시에도 지체가 지체인지라 그들이 채 앉지 못하고 서서 망설이자 내가 말했다.
"술자리까지 와서 행세할 것 없잖아?"
"네, 네!"
잠시 후 주모가 중년사내에게 지워 술독을 내왔다. 기둥서방인지 아닌지 그딴 것에는 지금 관심도 없었다.
"마침 전 부쳐놓은 게 몇 장 있어서 우선 안주하시라고......"
"놓고 가."
"네, 네!"
나는 독을 들어 막사발에 부으려하니 무거워서 힘들었다.
"제가 따라 드리겠습니다."
"이젠 완전히 속인이 다 되었군. 하고 왜어는 제대로 익히고 있나?"
"매일 업무가 번잡하다 보니........."
"바쁜 건 나야. 자네들은 뻗치고 있는 동안 뭐 하고 있나?"
나의 말에 조개 입이 되어 굳게 다무는 사형제였다.
그로부터 나는 사발째 입으로 쏟아 붓고 운봉은 미처 주발에 따르기 바빴다. 그렇게 반독을 마시고 나니 얼얼한 정도가 아니라 취기가 급속도로 올라왔다.
"가자! 셈 해!"
"네, 네!"
미처 다 먹지 못한 국밥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며 운봉이 말을 끌러 달려가고, 운곡은 입에 묵은 밥풀을 연신 떼어먹으며 주모를 찾아 계산에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말 잔등에서 안 떨어지고 윤 연을 볼 수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상공........!"
내가 말에서 뛰어내려 휘청하는 사이, 말방울 소리를 들었음인지 윤 연이 울며 달려 나왔다.
"소식 들었나?"
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물었다.
"네!"
겁먹은 눈이었다. 혹시 자신도 잡으러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윤 연!"
내가 휘청이며 주정하듯 그녀를 불렀다.
"네, 상공!"
"대답 한 번 잘했다. 내가 분명 네 서방 맞지?"
"네, 상공!"
"그래. 어제도 내일도 영원히 너는 내 마누라다!"
"상공........!"
갑자기 울며불며 내 품으로 달려드는 윤 연이었다. 나는 정말 술이 취해 윤 연의 그 지푸라기 같은 몸무게를 감당 못하고 뒤로 꽈당 넘어갈 뻔했다. 뒤에서 운봉이 잡아주지 않았으면.
"방으로 들어가자."
"네, 상공!"
환한 웃음으로 앞장을 서는 윤 연이었다.
방안으로 들어오자 나는 널브러지듯 앞으로 쓰러졌다. 윤 연이 내달아 나를 부축했지만 나는 내 할 말만 했다.
"요!"
내 뜻을 알아들은 윤 연이 급하게 농에서 비단금침을 꺼내 아랫목에 깔았다.
"넌 내 심정을 알아?"
"상공...........!"
다만 눈물 맺힌 눈으로 부를 뿐 답을 못하는 윤 연이었다.
"내 손으로 장인 장모를 처단하는 심정을."
내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내 손으로 장인장모를 처단하지 않으면 초록은 동색이라고, 나는 만고의 역적이 되어 그들과 같이 사약을 받아야 했어. 그래서 내 손에 피를 잔뜩 묻혔음이야. 아니면 난 영원히 이 조선의 이방인이 되어, 아니 주변인이 되어....... 기름과 물처럼 걷돌다가 ........."
어느새 나는 쓰러져 잠이 들었고, 윤 연은 그런 내 품에 안겨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와중에 내가 잠꼬대를 했다.
"맨 정신에는 너를 보러 올 수 없었음이야!"
"너는 누가 뭐래도 영원한 내 마누라고."
* * *
"물.......! 물.......!"
잠에서 깨어나니 갈증이 엄청났다.
나의 물을 찾는 소리에 나의 팔을 베고 엎드려 깜빡 잠이 들었던 윤 연이 깜짝 놀라 밖으로 달려 나갔다. 비녀들이 있었지만 윤 연은 손수 큰 사발에다 냉수를 한 가득 담아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상반신을 반쯤 일으켜 세워 물을 먹이니 얼마나 갈증이 났었는지, 금방 한 사발을 다 비워내고 물을 더 찾았다. 다시 부엌으로 가 물 한 사발을 떠서 먹이니, 반쯤 먹고는 다시 자리에 눕는 애증이 교차되는 서방이었다.
처음에는 부모가 투옥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주재자가 자신의 서방임을 알았을 때는 배신감과 분노로 온몸이 떨려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비록 양부모이긴 하나 자신의 부모까지 하옥시키는 서방이다 보니, 자신 또한 같은 떨거지로 몰아 횡액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공포를 주체지 못하고 연신 대문가로 귀와 눈이 가고 있는 시점에 서방이 돌아왔다. 광대놀음인지 진짜인지는 몰라도 그는 대취해 있었다.
'나도 잡으러 왔나?'
하는 두려움이 일었지만 모처럼 만나고 보니 우선은 반가웠다.
그래서 울음으로 달려가 맞으니 그는 내게 큰 위안을 주는 말을 했다.
'너는 내 영원한 마누라!'
라고.
주체치 못할 감격과 함께 울음이 쏟아졌다.
어떻게 그를 끌어들여 잠을 재웠는지 모르지만 그가 잠꼬대로 하는 말에서 나는 그이의 진심을 알았다.
'맨 정신으로 나를 볼 수 없었다.'
는 말에서 냉혹해 보이는 그도 크게 괴로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너는 영원한 내 마누라!'
라는 말에서 그이의 진심을 보았다.
그러나 참으로 간사한 것이 사람 심리라서. 그이의 편안히 잠든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까닭 없이 지금쯤 옥에 갇혀 있을 양부모의 생각이 나며 새삼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는 내 안위가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들자, 새로운 걱정거리가 치밀었음에 틀림없었다.
이런 내 생각을 방해라도 하듯 서방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물었다.
"지금 몇 점이지?"
"오경쯤 되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많이 잤나?"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부산을 떨었다.
"세숫물 가져오라 해."
"새벽녘이니 아이들도 곤히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소첩이 떠오도록 하겠습니다."
"음! 그럼, 그렇게 해."
내가 세면대에 물을 떠가니 그는 사발의 남은 물로 입을 헹궈내고 급하게 세면을 했다.
그리고 면포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장인 장모를 사(死)하는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 마. 그리고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밝은 생각만 하고."
"네, 서방님!"
나는 급 밝아진 안색으로 서방의 품에 매달려 아양을 떨었다. 그런 나를 가벼운 웃음으로 대하던, 그가 갑자기 내 입술에 가볍게 뽀뽀를 하고는 방을 나섰다. 아직 효성(曉星)이 빛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 * *
방을 나선 나는 새벽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별 속에 내 별도 있을까?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이는 또 누구일까? 전생부터 풀지 못한 숙제가 이 시점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방은 고요한데 어디선가 야경을 도는 순검들의 딱딱이 소리만 들려왔다. 문득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등청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행랑채에서 고이 잠들어 있을 운봉 사형제에게 생각이 미쳤다.
'곤하게 자고 있는 것을 깨우느니 혼자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그런 생각을 나는 지웠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듯, 그들도 주어진 임무라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로 행랑채로 가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둘을 깨웠다. 그리고 연신 하품을 하는 그들을 재촉해 말을 타고 의금부 관아가 있는 견평방으로 갔다. 가는 내내 나는 생각이 많았다.
윤원형과 정난정을 생각하다보니 그들은 과(過)가 대부분이지만 공(功)도 생각났다. 노비 출신인 정난정의 권유로 윤원형에 의해 정책으로 결정된 서얼허통(庶孼許通) 책(策)이 그것이었다.
첩의 자녀인 서얼도 과거를 치르고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로, 많은 서얼들에게 환영을 받은 제도이지만, 많은 양반 고위 관료들의 비토로 제대로 시행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 하나의 공(功)이라면 문정왕후와 정난정에 의해 주도된 불교진흥책이었다. 승 보우를 병판으로 임명하는 것은 물론,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부활시키는 의미로서 승과를 부활시키는 등 불교진흥책을 폈다는 점일 것이다.
유교가 국교인 조선조에서 불교의 재건이야말로 사상이나 종교의 다양화와 함께 세력의 다양화에도 일조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정왕후 사후 불교진흥책은 바로 철퇴를 맞아 병판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고 승과는 다시 폐지된다.
폐일언하고 나의 사념(思念)은 새삼 내 주변을 둘러보는 데까지 미쳤다. 내 둥지라 할 수 있는 장인 세력을 스스로 박살내고 얻은 것은, 이들을 제외한 전 조선의 양반 관료와 일반 백성들의 지지였지만, 이는 당장 내게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당장은 외척권신들을 일망타진한데 대해 환영 일색이지만, 그들이 내게 큰 우호 세력이 될 리는 없고, 단지 배척만 하지 않을 뿐 그들 사이에 크게 끼어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후원 세력이라고 남은 것은 나의 스승을 비롯한 사문인데, 이들 또한 당장 내게 큰 도움은 못 되었다.
스승 조식은 스스로 고고하여 헛된 명예에는 관심이 없었고, 나의 동문들은 대체적으로 나이가 어려 고위직은 하나도 없고 아직 제대로 관직에 진출도 안 한 상태이니, 현 시점에서 이제 나 스스로 사방을 둘러보아도 고단한 형세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위해를 가할 세력도 아직은 없으니 그것은 크게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설핏 나의 우호 세력이라고 왕이 떠올랐으나 나는 곧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위정자라는 위인들이 다 그렇듯이, 총애를 하다가도 자신의 치세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등을 돌리는 생리인지라, 나는 그저 명종 환과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원칙을 적용하여, 너무 멀리도 가까이도 아닌 저만큼에서 이제 적당히 총애를 다툴 생각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 속에 견평방에 도착하니 형벌을 가하는 소리와 비명 소리로 얼룩졌던 관아는 언제의 일인 양 고요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의금부 감옥에서 들려오는 죄인들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만이, 이곳이 조선 백성 모두가 두려워하는 권부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었다.
이날 사시 정이 되자 나는 지금까지 밝혀진 죄인들의 소장(訴狀)을 들고 명종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내가 고하길 이제 죄인들의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난바, 그 죄상이 심히 무거우니 친히 국문(鞠問)에 임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석을 걸러 많이 핼쑥해진 명종은 고개를 저으며 나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다고 했다. 여전히 정사에는 뜻이 없고 아들의 영혼에 갇혀 방황하는, 일국의 군왕이 아닌 일개 범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날 오후.
나는 의금부 관아에 제조와 부제조 각각 1인씩을 모시고 추국(推鞫)을 끝내고 본격적인 심리에 들어갔다. 그것도 이제 이번 건의 핵심인 윤원형과 정난정의 판시만 남았다.
일당인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 정순붕(鄭順朋), 황대임(黃大任) 등등은 모두 귀양을 보내기로 판시가 된 뒤였다. 내가 최고 추국관의 자리에 오연히 앉아 있자, 머리는 봉두난발이고 씻지를 못해 비루한 몰골의 두 사람이 포승에 엮이어 비틀거리며 심문장에 들어섰다.
이들을 자세히 보니 고문에 의한 것인지 곳곳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래도 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둘을 오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형리에 의해 곧 그들이 맨바닥에 꿇려졌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심문을 시작했다.
"그대 죄인들 부부는 주상의 외숙이라는 광영 된 위치에 선 자들로서,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질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힘써야 하거늘, 이 자리를 빌미로 많은 도당을 결성하여 매관매직을 일삼는 것은 물론, 모리배를 동원하여 밤낮으로 축재를 일삼았다. 이를 인정하는가?"
나의 물음에 윤원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반해 정난정만이 오연히 고개를 치켜들고 강력하게 항변하였다.
"결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소첩은 대비마마 전과 통교하면서 설움 받는 서얼들의 등과에 힘썼고, 탄압받고 억압받는 많은 승려들을 위해 승과의 부활도 논의했습니다. 비록 사적으로 재산을 치부한 것은 인정하나, 다 상거래를 통한 정상적인 획득방법이었지만, 편법을 동원한 적은 없습니다."
"괘씸하다. 그 죄를 인정해도 정상을 참작하기 어렵거늘 제 죄를 부인하다니, 이런 해괴망측한 일이 고금 역사 이래로 어디 있는고. 본관이 곧 판시를 할 예정이니 끝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라."
"죄 많습니다. 다만 사적인 정분을 생각해서라도 손속에 인정을 베푸시기를 원하고 바라옵니다."
윤원형이 최후 진술을 하고 정난정만이 남았는데 종전의 내 말이 있어서인지 그녀가 한결 대 꺾인 모습으로 말했다.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사적인 정분을 들먹일 수 없으나, 그래도 지난날의 정리를 생각해서 붙 끝에 한 줌의 온정이라도 남겨주시기를 간곡히 청원하옵나이다."
"흐흠.......!"
침음한 내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지금으로부터 두 죄인의 죄상을 판시하겠다."
이렇게 운을 뗀 내가 두 사람을 바라보니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떨어뜨린 채 귀만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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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감사드리고요!
^^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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