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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인생-41화 (4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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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특히 구황작물(救荒作物)이라는 데서 눈이 번쩍 뜨여지더이다. 그것을 경이 구체적으로 적시해 놓기는 했지만 과인 또한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작물이라........ 실제로 있긴 한 거요?"

"그 전에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지구에 대해 먼저 말씀 올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조선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여진이 서쪽에는 명나라가 남쪽에는 왜가, 그리고 더 먼 남쪽에는 우리에게도 조공(朝貢)을 받친바 있던 유구국(琉球國)이 있고, 그 옆 바다건너에는 섬라(暹羅:지금의 타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훨씬 먼 나라에는 우리가 양이(洋夷)라 부르는 다수의 나라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일단 말을 끊었던 나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와 바다 건너 반대편에는 명국보다도 몇 배는 더 큰 땅덩어리가 있는데, 이를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에 소위 양이라 부르는 족속들이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신이 언급하고자 하는 그 신대륙에 구황작물이 재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양이들이 가져다가 재배를 하고 있으나 아직 그들도 널리 보급된 실정은 아닙니다."

내 말을 강조하기 위해 여기서 일단 끊었던 나의 말이 이어졌다.

"해서 신이 드리고자 하는 요점은 양이와의 접촉을 통해 이를 조선으로 들여와야겠는데, 사무역의 엄금으로 현재로서는 법에 저촉된다는 것이죠. 이를 해량(海量하여 전하께옵서 융통성을 발휘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흐흠.......! 참으로 곤란한 문제로군."

망설이는 환에게 나는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법은 백성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백성이 없는 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해 전하의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나의 간절한 말에 환이 한걸음 물러섰다.

"바다로 나가기만 하면 구황작물을 구할 수 있는 것이오."

"나간다 해도 쉽게 구해지는 물건이 아닙니다. 먼 신대륙은 거리가 너무 멀어 우리의 항해술로는 갈 수도 없고, 천생 양이에게 구해야 하나, 신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 나라들 역시 대대적으로 보급된 것이 아니라, 구하기가 쉽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우리가 노력하면 결국에는 구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럼, 경은 사무역을 해제하자는 것이오."

"그렇게 하신다면 조정의 발전을 위해 더한 바람이 없겠사오나, 그것이 어렵다면 제가 운항하는 선박 몇 척이 있사온데, 이만이라도 융통성을 발휘해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군."

계속하여 망설이는 명종에게 나는 또 다른 말로 유인하였다.

"지금 왜는 내전으로 인하여 조선을 침략할 여력이 없으나, 조만간 이들이 한 사람에 의해 일통되는 날에는 아국이 큰 위험에 처하리라고 봅니다. 그런 그들에게는 조선이 갖지 못한 조총(鳥銃)이라는 신무기가 있는데, 우리도 이를 빨리 입수하여 대량으로 복제하거나 개량할 필요가 있습니다."

"흐흠........! 이는 과인이 허락을 한다 해도 조정중신들이 들고 일어날 소지가 많소."

명종의 입에서 더 부정적인 말이 나오기 전에 나는 얼른 발언을 했다.

"육의전(六矣廛)과 시전(市廛) 상인들에게 주고 있는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특권인 금난전권(禁亂廛權)과 같이 저에게 사 무역을 단속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다면 그 빌미로........."

나는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이만하면 충분히 내 뜻을 전달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좋소, 그것도 중신들 간에 설왕설래 말들이 많겠으나, 내 그것은 어떻게든 막아보리다. 이것이 곧 백성들을 위한 참 정치이니, 내 어찌 자그마한 시달림에 연연하리오. 과인은 경이 부마라서가 아니라, 내 경의 우국충정을 높이 사, 금난무권(禁亂貿權)을 드리겠소."

'부마 얘기는.........'

"망극하옵니다. 전하!"

나는 진심으로 명종 환에게 부복하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도 잠시, 나는 챙길 때 확실하게 챙기겠다는 심정으로 한 가지를 더 요구하였다.

"전하, 염초 만드는 방법을 아시는 지요?"

"그것은 잘 모르겠소."

"염초를 만들려면 대궐 높이의 흙더미를 정제해야 사발 정도 크기의 염초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다른 나라에서 사들인다면 그것에 투입되는 절반 이하의 노임만으로도 구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신이 사들인다면 나라에서 구매하여 주옵소서. 하여 취토꾼을 다른 생산적인 일로 돌린다면 나라의 큰 이익이 아닌가 하옵니다."

"경의 발상은 항상 엉뚱하니 과인이 경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동서 어디로 튈지 감을 잡을 수가 없소. 일단은 병조에 검토는 해보라고 지시하리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하고 탐관들이야 수시로 어사를 파견해 단속을 한다지만 조정의 일신을 거론한 것은 정확히 그 의도가 무엇이오?"

명종의 물음에 나는 다시 한 번 정신을 가다듬고 찬찬히 이야기 하였다.

"전하, 심히 무례한 말이라 백번 고두(叩頭)하옵고 아뢰옵나이다. 일전에 신이 아뢰온 대로

군왕이 바로 서지 않고는 군신 상호간의 청정한 기풍을 유지하기 어렵사옵니다. 하여 대비마마를 연금하옵시고, 주상의 권위에 도전하는 척신(戚臣) 세력을 단죄해야 하옵나이다."

"내 일찍이 그런 뜻을 세웠으나 현실적으로 이루기 난망하여........."

"우선 믿을 수 있는 신하를, 내금위장(內禁衛將)에 임명하시고, 또한 신임할 수 있는 신하를

의금부(義禁府) 진무((鎭撫)로 삼으시옵소서. 하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할 때는 여차즉시 결행하옵시면 됩니다."

"알겠소. 일단 그렇게 해봅시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후 명종과 나는 일각 정도 더 대화를 나누었으나 나머지는 사소한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미처 언급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사창(社倉)과 종학당(宗學堂)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를 서면으로 올렸다.

[고두하고 아뢰옵나이다.

신이 황해도 지방을 돌아본 결과 의창(義倉)의 환곡(還穀)에 따른 폐해가 매우 컸으므로 대책의 일환으로 문종대왕 이후 실시되고 있지 않는 사창(社倉)의 부활을 건의하옵나이다.

그 시행방법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아래의 방법으로 시행할 것을 건의하는 바입니다.

첫째: 전국에 실시할 것을 목표로 하되 우선 전라도 지방에 먼저 실시하여 그 폐해에 따른 단점을 보완한다. 둘째: 각 사창마다 의창곡(義倉穀) 200석을 분급해주거나, 뜻있는 지방 유지의 출원을 환영한다. 셋째: 매년 본 곡 1석에 이식 3두를 부가해서 수납하되 전실농(全失農)의 흉년일 때는 3두의 이식을 면제한다.

넷째: 매 창에는 사장(社長)을 두어 사창사무를 관장한다. 다섯째; 1창의 원래 있던 200석에서 이식이 500석에 이르면 그 200석은 의창에 반납한다. 여섯째: 사장은 9품의 산관에 제수하고 이로부터 500석이 찰 때마다 1자씩(一資式) 승급하는 포상의 특전을 준다.

일곱째: 사장의 근무상태는 당해 수령으로 하여금 점검시켜 연말마다 근무실적을 기록해서 감사에게 보고하고 서용에 참고하며 염산불균한 사장은 처벌한다.

이를 시행함에 있어서 각 고을의 토호나 유수한 부호의 경우에, 농민의 재생산을 보증한다는 점에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으나, 장리와 같은 고리대 운영에 있어 이익이 축소되고, 그에 따른 농민의 장악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쉽게 동조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이들의 반대와 횡포를 견제해야 할 것입니다.

지방 토호나 유력가문의 종학당(宗學堂) 설치를 권장하여, 종친뿐만 아니라 향당의 가난한 백성까지 배움에 이르게 하여 실로 조정이 인재로 가득 찰 기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로써 아국은 좀 더 개화된 사회가 될 것이고, 이는 나라의 발전으로 이어져 문명이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 건의는 곧 비답(批答)으로 돌아왔는데, 묘당의 논의를 거쳐 곧바로 실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나는 공식적인 은행의 허가를 인가받은 셈이 되었고, 만경당 역시 공식 종학당으로써 인가가 되었다.

그리고 칠일 후.

돌연한 인사이동이 있었다.

내금위장(內禁衛將)에 고맹영(고孟英)이 임명되고, 의금부(義禁府) 진무(鎭撫)에 내가 임명된 것이었다.

아! 돌이켜 보건대 나는 명종에게 있어서 구원투수였다. 이쪽저쪽 그가 필요한 곳에 배치하다보니, 사람과 사귀는 것은 고사하고 채 업무도 파악할 새 없이 이동하기 바빴다.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종2품 내금위장에 임명된 고맹영이라는 사람이었다. 나와 병조에서 같이 근무했던 고경명(高敬命)의 부친이 그라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고, 내가 의금부 진무로 승차하기 위해서는 품계가 좀 모자랐는데, 남치근(南致勤)의 공적 위조 건이 때마침 발고되어, 이를 의금부에서 엄밀히 조사한 바, 사실로 드러나자 나는 종삼품에서 정삼품(正三品)으로 승차되고, 남치근은 공적으로 갔던 한성판윤에서조차 파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어 내가 정삼품 의금부 진무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내 위로 타부서의 장 출신의 제조(提調)가 있었으나, 그들은 평소 업무에 관여치 않고 중요한 사안에 도장을 찍는 역할만 했으니 실제적 지휘자는 나인 셈이었다.

진무(鎭撫)는 낭관이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2인을 두게 되어 있었으나, 웬일인지 나 하나만을 임명하였다. 나의 발령과 동시에 기존의 진무 둘이 동시에 인사이동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밑으로는 아래와 같은 부하들이 있었다.

부진무(副鎭撫, 종3품) 2인, 지사(知事, 4품) 2인, 도사(都事, 5·6품) 4인이 있었고, 하부구조로는 영사(令史) 40인, 백호(百戶) 80인, 나장(羅將) 100인, 도부외(都部外) 1,000인을 두었다.

백호는 군인 신분으로 죄인의 감시, 압송, 체포를 주로 맡았다. 나장은 신문고(申聞鼓)지기, 순행원, 시위군졸(侍衛軍卒)이 되거나 죄인 압송에 활용되었다. 그리고 의금부의 주요 기능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았다.

의금부의 주요 기능으로 사법기능을 들 수 있는데, 첫째: 전제왕권을 옹호하는 역할을 들 수 있었다. 왕권의 확립과 유지를 해치는 일체의 반란 및 음모, 난언(亂言)이나 요언(妖言)을 처단하였다. 또한 왕권에 도전하거나 왕명을 거역하거나 왕의 심경을 거스르는 경우, 의금부가 동원되어 냉혹하게 응징하였다.

둘째: 유교 윤리를 옹호하는 기관이었다. 조선시대의 기본 윤리인 유교 도덕에 어긋나는 행위, 즉 강상죄(綱常罪)는 의금부가 전담해 치죄하였다.

셋째: 왕의 교지를 받들어 추국하는 최고의 사법기관이었다. 다른 법사에서 추핵(推劾:탄핵을 추진함)하던 사건을 재심 혹은 시정하거나 이관 받아 재판하는 기관이었다. 또한 신문고를 주관해 실질적인 삼심기관(三審機關)의 구실을 했는데, 의금부의 후신이 고등재판소가 되었다는 점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넷째: 대외관계 범죄를 전담하는 기관이었다. 외국 공관의 감시, 밀무역사범의 단속, 외국인의 무례한 행위, 외국인의 범죄 등을 다뤘다.

다섯째: 양반관료의 범죄를 취급해 일반백성들과는 달리 양반관료를 우대하였다.

여섯째: 의금부는 사법기능 외에 여러 임무도 담당하였다. 왕명을 받들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거나 그 밖의 잡무에 종사하였다. 즉, 왕명으로 실정을 파악하거나 민폐를 금지하는 임무를 수행하거나, 몰수한 죄인의 재산을 처리하거나, 소방서에 해당하는 금화도감(禁火都監)의 주된 구성원으로 의금부의 관원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고사장(考査場)의 금란임무를 수행했고, 나례의식(儺禮儀式)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위의 임무에서 알 수 있듯이 명종은 여러 수를 감안했던 것 같다. 임무 중 네 번째에 열거된 것 중에 밀무역사범의 단속도 의금부의 임무에 포함되어 있는 바, 이는 고양에게 생선 가게를 맡긴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로써 별도로 시끄럽게 금난무권(禁亂貿權)이니 어쩌구 하며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아무튼 명을 받았으니 어쩌겠나, 나는 다음날부터 한성부 중부 견평방(堅平坊:현재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의금부로 출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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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고맙습니다!

^^

늘 행복한 날들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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