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행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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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근을 하니 왕이 나를 불렀다.
"불러 계시옵니까? 전하!"
"그렇소.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그 수많은 관군을 동원하고도 지리멸렬인지, 경이 감군(監軍) 역할도 하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용상에서 내려온 명종은 나에게 친히 관찰사나 절도사 등이 지휘할 때 쓰는 사령기(司令旗)에 감군(監軍)이라 씌어진 깃발을 내려주고, 이어 팔도어사재거사목(八道御史賫去事目) 한 권, 마패(馬牌) 한 개, 유척(鍮尺) 두 개를 내려주고, 감군 겸 특별 암행어사인 경차관(敬差官)에 임명하였다.
또 내금위(內禁衛) 중에서 무예에 뛰어난 무사 네 명을 선발하여 나의 호위로 붙여주었다. 또 두 명의 대리(帶吏:곁에서 시중을 두는 하급 관리) 또한 붙여주었다. 이에 나는 아침부터 나를 호종하여 나선 운봉 사형제와 함께 이들을 데리고 황해도로 출발하였다.
나와 공주의 소식을 들은 아내가 끙끙 앓아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떠나는 내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 잔뜩 찌푸리고 있던 하늘에서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원행에 눈마저 내리면 고생할 것이 훤히 보였지만 눈이 많이 온 해는 풍년이 든다는 속설을 믿고, 나는 오히려 눈이 많이 내려줬으면 하는 심정이기도 했다. 거위 털 같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는 길을 뚫고 우리 일행은 임진강 나루를 건너 개성 유수가 다스리고 있는 개성 관아로 향하였다.
가면서 우리 일행은 암행 감찰이기 때문에 역소(驛所)의 역관(驛館)을 피해 민간에 묵게 되었는데, 머무는 곳마다 우리가 밥을 얻어먹어야 하는 게 아니라, 말 잔등에 실린 쌀말에서 오히려 쌀을 내어 도와줘야 했다.
이틀을 내린 눈이 오늘은 그쳐 찬란한 노을이 펼쳐졌지만 산 아래 작은 마을의 어느 집에서도 저녁을 짓는 흰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고 있었다. 아니 딱 두 집이 피어오르긴 했다. 우리 일행은 자연스럽게 하루를 묵으려고, 두 집 중 첫 번째 집으로 향했다.
두 집중에서도 그나마 집 크기가 나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두 명의 대리 중 한 대리의 부름에 60대 초반의 허리가 꾸부정한 노인 하나가 눈을 희 번뜩이며 나타났다.
"우리 먹을 양식도 없어 굶고 있으니, 다른 집이나 알아보시오."
대뜸 삿대질까지 하며 한다는 소리가 우리의 축객령이었다. 이에 내가 점잖게 말했다.
"우리가 먹을 양식은 우리가 가지고 다니니 밥이나 좀 지어주시오. 반찬을 아무래도 좋소."
"그렇다면야........."
내키지 않은 기색으로 동의하는 노인은 이빨이 하나도 없었다. 나의 눈짓에 삼돌이가 말 등에서 쌀자루를 내려 그 집안으로 들고 들어갔다.
옛날에는 제법 살았는지 삼 칸 초가집에 사랑채도 두 칸이나 되는 실한 집에 우리는 주인장의 안내로 사랑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우리부터 지은 저녁 먼저 먹고, 그대들 것은 짓는 대로 같다드리겠소."
"고맙소!"
노인장의 말에 가볍게 대꾸한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장의 뒤를 따랐다.
"왜 가만히 앉아 계시지........."
"사는 모습을 좀 보고 싶어서요."
나의 말에 새삼스럽게 나의 위아래를 훑으며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노인장이었다. 그래봐야 암행어사의 전형인 폐포파립(弊袍破笠)은 아니고 수수하게 차려입은 나였다.
"실례지만 나라에서 나오셨소? 생김하며 범상치가 않소?"
"아, 아니오."
노인의 예리한 눈치에 급하게 부정한 나는 급히 변명을 하였다.
"평양에 사는 장사치인데 한양에서 물건을 다 떨어 넘기고 돌아가는 길이오."
나의 말이 잘 믿기지 않는 지 고개를 갸웃 갸웃하는 노인장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안채의 툇마루까지 왔고, 노인장은 들어오라는 말없이 불쑥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염치 좋게 뒤따라 들어가 윗목에 좌정을 했다.
"그러지 말고 아래로 내려오오. 지은 지 오래된 집이라 그 윗목까지는 불기운이 닿지 않는다오."
"괜찮습니다. 영감님!"
"어허, 노인이 말을 하면 듣지 뭔 말이 그리 많소."
말하는 모양새가 일반 상민은 아니었다. 그래도 근동에서는 세도깨나 부리고 살지 않았을 까 하는 위엄이 그에게는 있었다.
"이리와 앉으오."
아랫목을 짚으며 거듭되는 요청에 내가 마지못해 아랫목 일부를 차지했다. 노인은 내가 내려오자 절절 끓어 새까맣게 탄 방바닥을 피해 옆으로 나앉았다.
그러고 있으니, 며느리로 보이는 사십대 초반쯤 보이는 촌부가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상을 내려놓고 물러가는데, 그 상을 보니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암녹색이다 못해 씨꺼멓게 보이는 씨래기에 그나마 쌀 몇 알이 둥둥 떠다니는 죽이 밥과 반찬의 전부였다.
아니 반찬이 한 가지 있긴 있었다. 암갈색 보다 더 진한 진 거의 검은색으로 보이는 간장 한 종지가 상 위에 달랑 놓여 있었다.
"내려와 저녁 먹어라!"
노인의 말에 허리를 반쯤 굽혀야 하는 윗방 문이 열리며 우르르 몇몇이 쏟아져 나오는데, 여아는 없고 모두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소년들이었다. 장가를 안 갔는지 상투 튼 자는 하나도 없고 전부 더벅머리였다.
외부의 낯모르는 손님들이 들이닥치니 윗방에서 숨소리도 안내고 추이를 치켜보았던 모양이었다.
"보다시피 이러니 손님은 저녁 짓는 대로 드시고, 우리 먼저 먹으오."
"네, 먼저 잡수세요."
나의 말에 따라 씨래기 몇 점을 제외하면 멀건 국물뿐인 씨래기 죽을 휘휘 젓던 영감이 그 중에 밥알 몇 알이 나오자, 그 중의 몇 알을 막내로 보이는 손자 놈에게 건네주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나 드세요."
"너나 많이 먹고 빨리 빨리 커라."
"할아버지가 오래 사셔야지요. 우리는 아직 살날이 창창한데........"
"그만 됐다. 어서 먹기나 해라."
노인의 말에도 숟가락 들기를 주저주저하는 막내 손자 놈을 보고 있노라니 내 입가에 엷은 미소가 맺혔다. '죽 그릇 속에 웃음'이라고 비록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정을 보는 즐거움에 짓는 웃음이었다.
삼시 세 끼 쌀밥을 먹어도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면, 비록 죽을 먹지만 행복해 하며 웃음이 끊이지 않는 집에 비하면, 참된 행복은 이런 집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무튼 단란한 가정의 모습이 보기가 좋았다.
"할아버지, 아버지와 엄마는 요?"
"네미는 이 손님들 저녁 짓고, 아비는 사랑방에 군불을 집히고 있다."
"네~!"
큰 손자 놈의 물음에 자상하게 답을 하는 노인이었다.
그것도 먹을 것이라고 내 입에서 군침이 돌고 침이 꼴깍거리려 하자 나는 급히 방문을 열고 나왔다. 방문을 나와 툇마루에 올라서보니 찬란한 모색(暮色)도 사위고 어느덧 주변에는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그길로 사랑채에 군불을 지피는 부엌으로 갔다. 그곳에는 사십대의 아들이 군불을 지피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잔솔가지에 시선을 주었다.
나의 출현에 아들이 불편하지 괜한 헛기침을 하였다. 나는 이를 무시하고 홍염(紅焰)으로 빛나는 불을 지그시 노려보듯이 쳐다보았다. 문득 이때 다른 집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제법 살만해 보이는 이 집도 이 모양인데 다른 집들의 살림살이도 대충 짐작이 되었지만 나는 이를 확인하고 싶어 여덟 명을 모두 밖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그들의 사는 모습을 한 점 거짓 없이 보고하도록 했다.
나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아들이 대충 내 정체를 눈치 챘는지 그때부터 더욱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괜히 잘 타고 있는 불에 삭정이를 더 놓고 불을 헤집기도 했다. 이에 내가 조용히 아들에게 말했다.
"대충은 뭔가 짐작을 했겠지만 괜히 내 신분을 알아봐야 더욱 불편하기만 할 것이니, 입을 다물고 있으시오."
"네, 나리!"
그러고 있는 동안 설설 끓던 물이 더욱 끓어오르고 큰 가마솥도 더욱 많은 눈물을 지었다. 그러자 아들은 추가로 땔감을 넣지 않고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려는지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다 타고 남은 뜨거운 불씨를 밖으로 헤집어 내어 손을 쬐며 생각에 잠겼다. 이때 마을을 돌아보러 갔던 자들이 하나씩 돌아와 보고를 했다. 그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대부분의 가정이 저녁도 못 먹고 군불을 지피는 과정에서 생긴 뜨거운 물만 먹고 자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랗게 떴고, 아이들 배는 올챙이배를 방불케 한다는 것이었다. 또 어느 집은 누워서 일어날 기운은 물론 말한 기운도 없어, 물어도 대꾸도 안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대충 저녁을 먹고 이를 보고하기 위한 서계(書啓: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를 못한다는 말처럼 어느 한 두 집이어야 구제를 하던지 하지, 도대체가 가는 곳마다 다들 이럴 것이니 대책이 안 섰다.
그 와중에 내 머리를 얼핏 스치는 단어가 있으니 '구황작물(救荒作物)'이었다.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이 그들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가 1492년이니 유럽에는 위의 세 종이 모두 들어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 아메리카 원산지로, 내가 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인 1492년을 또렷이 기억하느냐 하면, 몇 가지 역사의 연도를 아는데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었다. 1492년에 100년을 더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이고, 100년을 빼면 조선의 건국 년도인 1392년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나는 다음 왜(倭)로의 항해에는 이들을 꼭 구해오라는 지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황작물이라도 있으면 이렇게 굶어 죽는 백성들이 덜 할 것 같아, 나는 이를 하루빨리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초조감까지 들었다.
다음 날 나는 우리가 묵은 집에 쌀 두되를 주고 물러나와 개성 관아로 향했다. 관아로 들어서니 왠지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육방관속들에게 물으니 개성유수(開城留守)는 물론 종삼품으로 그의 보좌관(補佐官)인 중군(中軍)을 비롯해 종사품의 경력(經歷) 등 윗대가리들은 모두 임꺽정을 토벌하러 나갔다 했다. 예하들과 상대하기 싫어 나는 그곳을 벗어나 모처럼 역관에 묵었다.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쌀도 이제는 언제 떨어질지 몰라 비상시를 대비해서 아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황해도 감영이 있는 해주(海州)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도 텅 빈 관아를 목격하고, 경기, 황해, 평안의 삼도토포군(三道討捕軍)이 집결해 있다는 재령군(載寧郡)으로 항하였다.
재령에서도 우리는 물어물어 삼도토포사(三道討捕使) 남치근(南致勤) 이하 천여 관군이 머물고 있다는 곳을 찾아가니, 그곳에서도 한참을 동북방으로 더 간 서흥(瑞興)이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니 때가 마침 정오 무렵이었다. 한 끼 식사라도 얻어먹을까 했더니 토포사 남치근은 애꿎은 농민들만 잡아다 문초를 하느라고 고함만 난무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점잖게 한 쪽으로 불러내어 천막 밖으로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품에서 명종이 직접 하사한 감군기(監軍旗)를 보여주며 말했다.
"왜 아직도 도둑의 괴수를 못 잡아들이는지 주상 전하의 진노가 대단하시어, 나를 또 파견하셨소.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이오?"
"그간 몇 놈을 잡아들이긴 했으나, 후에 문초를 해보니 모두 가짜로 밝혀졌소."
이때였다.
포졸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남치근에게 아뢰었다.
"토포사 나리, 임꺽정의 행방이 밝혀졌습니다."
"그래? 어디냐? 속히 가자!"
다급한 마음에 혼자라도 연락한 포졸을 쫓으려다, 무안한 낯빛으로 삼도의 동원된 포졸들에게 명령을 내려 연락 온 포졸의 뒤를 따르도록 하는 남치근이었다.
나 또한 무춤하여 이들의 뒤를 슬슬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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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고맙습니다!
^^
늘 행복한 날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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