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준과 노처녀 공주 -->
1
"그래, 주상! 용한 의원을 모셔왔다고."
"그렇사옵니다. 어마마마!"
"어디 좀 봅시다. 어머.......! 너무 젊잖아!"
여인은 할머니가 되어도 여자라고, 요상한 감탄사를 터트리며 허준을 보고 약간은 실망을 하는 문정왕후였다. 그래도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터, 실망의 기운은 곧 서서히 기대감으로 전이되었다.
"일단 조카사위가 믿고 데려온 사람이니, 한 번 보이기는 해보십시다. 주상!"
"네, 어마마마!"
이렇게 되어 허준이 정수사로 인순공주를 보러가게 되었는데, 하필 내가 허준을 안내하여 데리고 갔다 오라고 명종이 하명하였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 나는 어쩔 수 없이 허준과 지리를 잘 아는 궁녀 하나와, 관병 4인과 함께 정수사가 있는 강화도로 향했다. 팔자에 없는 강화도로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일단 허준과 일행을 데리고 나는 집에 들러 간단하게 소식을 전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3일이 걸려 정수사에 도착한 나는 적잖이 실망을 했다. 그래도 일국의 공주가 요양하고 있다고 하는 절이라, 규모가 제법 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3칸 법당 하나에 4칸으로 이루어진 요사채가 전부인 절이었다.
우리는 곧 주지스님의 안내로 인순공주가 머물고 있는 요사 채 중 한 칸을 찾아들었다. 너무 비좁아 안내를 해온 궁녀 하나와 허준 만이 들어갔다. 나는 밖에서 하릴없이 법당을 구경하고 절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전부였다.
초겨울이라 모든 것이 을씨년스러웠지만 나름대로 운치는 있었다. 그렇게 반각이 지냈을까 궁녀가 나를 데리러 왔다. 요사 채에 가보니 진맥을 하러 들어갔던 허준이 벌써 밖에 나와 있었는데, 초겨울임에도 이마는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병명이라도 알아냈나?"
마음이 급하니 부지불식간에 반말이 튀어나왔다.
"네, 간신히........"
"무슨 병인데?"
"홀구금체경불언불수(忽口噤體硬不言不遂)라고....... 여기에 혼혼묵묵정신불쾌(昏昏嘿嘿精神不快)라는 병까지 ."
말을 해놓고 고개를 흔드는데 척 보기에도 별로 자신이 없어보였다. 나는 나 나름대로 짜증이 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병명이 그렇게 길어?"
그렇게 하고 나니 허준 보기가 미안해서 나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척 듣기에도 쉽게 나을 병이 아니로고만."
이어 허준이 전문 용어로 설명을 하는데 도저히 못 알아먹겠다.
훗날 안 일이지만
"홀구금체경불언불수(忽口噤體硬不言不遂)라는 병은 오늘날 쉽게 말하면 중풍의 일종인데, 아주 심한 정도는 아니고 이것이 늦추어졌다 나았다하면서 계속 진행 중인 병이라 했다.
또 혼혼묵묵정신불쾌(昏昏嘿嘿精神不快)라는 병은 오늘날의신경쇠약증에 해당되는 병이라고 내가 알아들었다. 세상에 이런 질병들도 다 있나 싶었는데, 허준의 이야기에는 옛날 고서의 기록에도 나오는 병이라니, 내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어야 했다.
헌데 나에게 이 병명을 설명하던 도중 허준이 무언가 실마리를 잡았는지 나와 이야기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요사 채로 뛰어갔다. 그리고 일각 만에 나왔는데 종전보다는 얼굴이 많이 밝아져 있었다.
"어찌 된 일인가?"
"침 치료를 병행하고 처방을 좀 달리하면 고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반가운 마음에 반색을 하는데 허준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왜 그러나? 자신 없나?"
"그게 아니라 머물기가 불편할 것 같고, 환자분이 공주마마라서 진료하기가 좀 거북살스럽습니다."
"그야 좀 참으면 되는 거고, 그냥 공주고 뭐고 의식할 필요 없이, 여느 어염집 아낙이라고 생각하고 진료하도록 해."
말이야 쉽지만 그게 잘 안될게 번하면서도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네, 나리!"
그때부터 허준이 본격적으로 진료에 들어갔는데 내 입장이 난처했다. 여기서 하릴없이 계속 죽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입장이 대략난감해서 나는 곧 서신을 써서 관병을 시켜 명종에게 보냈다.
곧 비답(批答)이 온 것이 아니라, 문정왕후가 직접 허겁지겁 날아왔다. 이로 인해 나는 곧 연금 아닌 연금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나는 공주와 허준의 일을 까맣게 잊고 병조의 일에 전념하고 있는데, 하루는 오건 사형이 나를 부르러 왔다. 명종의 호출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이들에게 생각이 미치는 나였다.
내가 강화도에서 돌아 온지 벌써 2달이 지나 해가 바뀐 정월달이었다. 나는 곧 크게 심호흡을 하고 사정전으로 향했다.
대전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이를 흘깃 보고 명종 앞에 부복하여 고했다.
"신 병조정랑 윤 흥 주상전하의 명 받자와, 대령 했사옵니다. 전하!"
"편히 앉으시게."
명종의 명에 따라 그제야 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대전 안을 자세히 둘러볼 수 있었다. 문정왕후 윤 씨와 허준이 보이고 그 옆에 못 보던 여인 한 명이 더 있었다. 그 때였다. 문정왕후가 나를 보고 말했다.
"고맙네! 조카사위 덕분에 인순공주가 병마에서 해방되었음이야. 진실로 감사를 표하네."
"대비마마, 그게 어찌 제 공이겠습니까? 옆에 앉은 구암의 공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그의 공도 크지. 하지만 조카사위의 천거가 없었다면 우리가 어찌 그를 볼 수나 있었겠나. 그러니 공을 사양하지 말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주상전하께 고하여 챙기시게."
"없사옵니다. 대비마마. 신은 공주님께서 밝은 햇빛을 볼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크게 만족하고 있습니다."
나의 말에 인순공주의 시선이 일순 내게 향했으나 나는 서둘러 외면했다.
"호호호........! 참으로 기특한지고. 심성마저 어쩌면 저렇게 착할꼬. 주상! 조카사위의 품계를 이번 기회에 1등급 승차 시켜주세요. 지금 품계가 어떻게 된다고?"
문정왕후가 내게 묻는데 명종이 곧바로 대답했다.
"종4품입니다. 어마마마!"
"벌써? 빠르기도 하여라! 장차 이 나라의 동량이 될 것임에 틀림없음이야! 하면 종3품으로 승차시키도록 하세요. 주상! 아셨죠?"
"네, 어마마마!"
"호호호.........! 참으로 기특한지고........!"
문정왕후가 계속하여 나를 보고 감탄하는 것이 민망하여 나도 얼른 한마디 하였다.
"신은 차지하고 구암이나 어의(御醫)로 봉하여 계속하여 공주마마를 돌보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아뢰옵나이다."
"하하하........! 이미 과인이 구암은 어의로 봉하였으니, 경은 근심 말게."
"망극하옵니다! 전하!"
내가 새삼 부복하느라 못 보았지만 허준 또한 내게 감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에 문정왕후는 자신의 딸 인순공주를 보고 속삭이고 있었다.
"어떠냐? 네가 보기에."
"어마마마! 부끄럽사옵니다."
말을 하고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인순공주였다.
"호호호.........! 그 나이에도 부끄러움을 타냐?"
"외간남자는 태어나 처음이옵니다."
"하긴 쯧쯧쯧.........! 불쌍도 하지. 좋단 말이지?"
"부끄럽사옵니다. 어마마마!"
'젠장........!'
점점 대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부녀였다.
못 들은 체 하고 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내가 황급히 아뢰었다.
"신은 이만 물러가는 것이........"
"가긴 어딜 간다고 주상 전하의 어명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건방진......."
정말 성격을 종잡을 수 없는 할망구였다.
"내놔!"
"네?"
문정왕후가 내노라는 말에 나는 영문을 몰라 반사적으로 반문하고 벙 찐 표정을 지었다.
"호호호........!"
나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목소리 높여 웃은 문정왕후가 돌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으면, 보따리도 내놓아야 할 게 아닌가?"
"대비마마! 그게 어인 말씀인지.........?"
"저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서야. 일부러 능청을 떠는 거야 뭐야? 공주를 구해줬으니, 이제 그 아이의 앞길도 책임져야 할 것 아닌가?"
"신은 이미 결혼하여 두 아내가 있고, 딸아이마저 있는 가장이옵니다."
"누가 몰라! 다 물려!"
"네? 그런 억지가.........?"
"무엄하다! 뉘 안전이라고!"
이건 또 명종까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고 있었다.
"찾아보면 좋은 혼처 많을 것이오니........"
"시끄럽다. 내 택일하는 즉시 혼수 장만하여 정동 부마의 집으로 보낼 테니, 그리 알라!"
아예 오금을 박는 문정왕후의 말에 나는 대꾸할 기력을 잃고 멍하니 한동안 천장을 쳐다보고 있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얼은 대전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간하였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대비마마!"
연신 내가 이마를 대전바닥에 찧고 있는데도 문정왕후는 야멸차게 콧방귀를 날리더니 한마디 하였다.
"흥, 그 따위 짓은 주상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내게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짓이야."
'에에, 썅!'
더해봐야 내 머리만 깨질 것 같아 나는 그만 두고 불쌍한 표정으로 대비 전을 쳐다보고 있는데, 휭 하니 치맛바람을 일으킨 문정왕후가 딸아이의 손을 잡고 나가며 말했다.
"가자! 주상은 내 말뜻이 무엇인지 아셨지요?"
"네, 어마마마!"
이제 나는 하소연 할 사람이 없이 명종 밖에 없는지라 얼른 부복하여 간절한 애원을 담아 부르짖었다.
"전하..........!"
그러나 한 술 더 뜨는 명종이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가재는 게 편이라 했던가!
"축하하네! 부마도위(駙馬都尉)!"
"아니, 주상 전하까지.........!"
"하하하.........! 과인도 경을 자형으로 얻고 싶은 걸."
"어찌 이러 실 수가.........!"
처절한 나의 애원에도 명종은 빙글빙글 웃기만 할 뿐, 나의 애원은 본체 만 체였다. 이럴 때는 무슨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되는데 그 잘 돌아가던 머리도 이럴 때는 도움이 안 되었다.
해서 내가 멍하니 넋이 빠진 사람마냥 앉아 있는데 명종이 말했다.
"당장은 심란하겠지만 결코 해가 되는 일이 아니니, 속히 안정을 찾으시게."
'젠장! 안정이고 나발이고, 나 보고 어쩌라고?'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내 발등을 찍은 꼴이었다. 차라리 그렇게 앓다가 죽게 내버려 둘걸. 이게 내 진심이었다. 후회는 이미 백 번을 해도 늦는 것. 백 번을 양보하여 내가 부마가 되면 어찌 되는가?
경우의 수를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부마가 되면 자동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공주나 끼고 일평생을 호가호위, 호의호식 하다가 죽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껏 어리댄다는 것이 종친부에나 가서 어쩌고 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제일 억울해 하지 않겠는가? 더 더군다나 부마는 공식적으로 재가도 허용이 되지 않았다.
다행이 이미 두 여자는 얻어놨으니 그 여자들이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 일 테지만, 만약 저 잔병치례 귀신이 덜컥 죽기라도 한다면 내 입장은 또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 현대를 경험한 나로서는 이 여자 저 여자 직접거리는 것도 도덕관에 위배되었다. 이렇게 나는 온갖 상념이 떠올라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때였다.
명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알고, 이만 나가 보시게!"
"전하.........!"
내가 뭐라고 아뢰려고 하자 역정을 벌컥 내는 명종이었다.
"뭐 하고 있나? 냉큼 나가라니까!"
"네, 전하!"
그래도 절은 하고 힘없이 대전을 벗어나는데 허준에 대한 생각은 저만치 달아난 지 오래였다. 이제 어의가 되었으니 궁에서 잘 지내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대전을 벗어난 내 머리에는 새삼 '부마(駙馬)라는 말뜻을 되새기고 있었다.
.. /작가의 말/..................................
고맙습니다!
^^
늘 좋은 날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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