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애 -->
3
다시 자리로 돌아온 그가 힘없이 말했다.
"아무래도 수월치가 않을 것 같다."
내가 왜와 명을 찍어 누를 수 있다는 말에 혹 했으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금의 힘을 깨닫고는 포기한 듯한 발언이었다.
"그 밖에 나라를 망치지 않고 중흥시킬 다른 방도도 있느냐?"
"........"
그의 물음에도 나는 한참동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하고 있자니, 명종이 답답한지 약간은 짜증이 묻어나는 어투로 물었다.
"왜 말이 없느냐?"
"이는 제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기에 자연히 망설여질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래........?"
목소리가 약간 올라가며 야릇한 웃음으로 반문하는 명종이었다.
이어 재미있겠다. 호기심이 생긴다. 이런 표정으로 전이된 명종이 다시 말했다.
"여기는 과인과 그대 둘 뿐이거늘 못 할 말이 무엇이더냐?"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했습니다."
내가 흘깃 뒤를 돌아보자, 명종도 이를 깨닫고 상선은 물론 입시한 궁녀마저 다 내쫓았다.
"이제 할 말을 해보아라."
나는 얼른 부복하여 말 했다.
"전하! 망극하오나 신이 작성한 책문은 각론 이옵고 진정으로 나라가 망하지 않고 유지되려면 정치가 바로 서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당연하다! 계속하라!"
"전하 옥음이 너무 크시옵니다!"
"하하하.........! 그런가? 내 이제 목소리를 낮출 터이니, 얘기나 계속해 보거라."
"첫째는 전하부터 대비님의 품을 벗어나야 하고, 두 번째로는 세도가 당당한 외척 권신들을 일제히 몰아내야 합니다."
"그래........?"
또 야릇한 웃음을 짓는데 내가 아뢴 말이 있는지라 왠지 가슴이 섬뜩했다.
"그대는 내가 몰라서 행하지 않고 있는 줄 아느냐?"
내가 묵묵히 대답이 없자 명종이 조금은 더 열기가 느껴지는 음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토로했다.
"어마마마에 대해서는 성현의 가르침을 숭배하는 나라로써, 효(孝)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전하! 어마마마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으로. 쫓겨날까 두려우십니까?"
"하하하.........! 전혀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과인이 보기에는 어마마의 천성이 거칠어........ 헙........."
'쯧쯧.......... 저러니.......!'
나의 생각을 하는지 얼른 대전을 한 바퀴 휘돌아본 명종의 말이 이어졌다.
"조금 더 참고 견디고자 함이니라."
"과연 그렇게 해서 정치가 바로 설까요? 능멸당하는 주상을 누가 제대로 보필하겠느냐 말입니다."
나의 말에 진정으로 놀란 듯 명종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렇게 거침없이 얘기하는 놈은 아마 내가 처음 일 것이기에 많이 놀란 듯했다.
"하하하.........! 과인의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보통 배짱이 아니로구나!"
"그래서 신이 목숨을 걸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과연, 그대의 말대로다. 일찍이 과인의 면전에서 그런 이야기 하는 신하를 보지 못했으니, 참으로 오늘 내가 귀한 사람을 얻은 듯하다. 더 가까이 오너라!"
"네, 전하!"
"그래 과인이 어마마마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길 바라는가?"
한 톤 낮아진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하는 명종이었다.
"연금을 시켜 일체의 사람의 내왕을 금해야 합니다."
"안에서도 못 나오고 밖에서도 못 들어가게 하란 말이냐?"
"그래야만 전하의 뜻이 신하들에게 고루 전해져 위엄이 설 것입니다."
"흐흠........! 그대가 참으로 괴로운 제안을 하는구나. 그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시일을 두고 생각해 보기로 하고, 외척 권신들 문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느냐? 아니 그 전에 과인이 네게 들려 줄 이야기가 있다."
잠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명종의 말이 이어졌다. 한층 차분한 음성이었다.
"내 외삼촌인 윤원형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들인 이가 중전의 외숙인 이량(李樑)이다. 이 사람이 들어와서 처음에는 잘 하는 것 같더니, 곧 윤가와 한통속으로 세도와 재물을 탐했다. 해서 과인이 평안도 관찰사로 내쫓았다가, 금번에 이조참판으로 불러들이기는 했으나, 믿을 만한 사람이 못된다. 또 심통원(沈通源)을 대항마로 키우려했으나, 그 역시 궐 밖에서 손가락질 하는 삼흉(三凶)의 하나가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방법이 잘못되었사옵니다."
"뭐?"
"일거에 싹 쓸어내야 합니다. 삭초제근 하지 않으면 이듬해 봄에 또 싹이 돋을 것입니다."
"방법이 있느냐?"
명종은 점점 물음이 빨라지며 목소리는 열기를 띠었고 상체는 점점 내게 숙여졌다.
"쉽다고는 할 수 없겠사오나,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을 것 같사옵니다."
"당장은 방법이 없구나."
"신을 가까이 두면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올 것입니다."
"네, 이놈.........!"
갑작스런 명종의 호통에 나는 깜짝 놀라 무엄하게도 그의 표정을 살폈다. 진짜 노한 표정이었다.
"네가 윤원형의 조카사위인 줄 내 모르는 줄 아느냐? 너를 입조시키기 전에 다 조사가 되었다. 지금 네가 나를 떠보려 하느냐?"
"신 목숨을 걸었사옵니다!"
나는 여기서 물러서면 잘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절박한 심정이 되어, 정말로 대전바닥에 머리가 피가 나도록 찧었다. 나도 이때는 결사적(決死的)이었다.
머리가 깨져 피가 철철 흘러 사모(紗帽)를 적시는 것도 모자라, 이마와 눈썹까지 흘러내렸다.
"너의 진심을 알겠다. 그만 하라!"
여기서 그치면 안 된다. 나는 계속하여 더 찧었다.
"그만 하래도 그러는 구나! 과인이 그대의 진심을 알았다 하지 않더냐?"
"망극하옵니다! 전하!"
"고개를 들라!"
내가 고개를 드니 핏물이 이제 눈까지 파고들어 눈조차 뜰 수 없었다.
"경을 진실로 가까이 두고 싶다. 방법이 없느냐?"
"묻는 자체가 글렀습니다. 이 나라 조선의 군주로서 그게 신하에게 물을 말이옵니까?"
"허허허........!"
어이가 없는지 껄껄껄 웃는 명종 환이었다.
웃음을 그치고 정색을 한 명종 환이 말했다.
"경은 과인이 주상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틀렸다. 과인의 솔직한 마음으로는 경을 승지로 임명하여 곁에 두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경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쉽지 않다."
여기서 일단 말을 맺은 환이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모든 절차가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거니와 과인이 조금이라도 책을 잡힐 일을 하면 삼사(三司는 물론 대신들이 절대로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면전에서 아뢰는 것도 아뢰는 것이지만, 충동질을 하여 상소가 빗발치듯 할 것이다. 해서 이는 좋은 방법이 못된다."
또 한 번 나를 유심히 관찰하던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안 되겠다. 피가 눈으로 흘러들어 도저히 눈을 뜨지를 못 하지 않느냐? 상선! 게 있느냐?"
"네, 전하!"
"전하! 아직은 참을 만 하옵니다."
"아니다. 이대로는 대화가 제대로 진행이 안 되겠다."
둘이 속삭이듯 대화를 하고 있는데 상선내관이 종종 걸음으로 들어왔다.
"가서 어의를 불러오너라!"
"전하, 일이 번잡해지옵니다. 약솜만 있으면 되옵니다."
"알겠다."
나의 말에 동의를 한 명종 환이 나가는 상선내관을 다시 불렀다.
"상선!"
"네, 전하!"
"내의원에 가서 약솜이나 좀 얻어오너라."
"네이, 전하!"
상선이 종종 걸음으로 빠르게 뒤로 물러나자 둘의 대화가 이어졌다.
"경이 장원을 했으니 제대로 된 품계는 종사품이다. 맞느냐?"
"네, 전하!"
"승지가 되기 위해서는 3품(三品)이 되어야 하는데, 일품(一品)이 모자라서 과인과 경의 대화가 길어지는 것이다.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 이것이 과인의 본래 묻는 의도였다."
"전하, 너무 조급히 생각하지 마옵소서! 신도 물러나 대책을 강구해 보겠나이다. 그 전에 신과 전하의 연락책으로 한 사람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게 누구냐?"
달려들 듯이 묻는 명종 환에게 나는 조용한 어투로 대답했다.
"오건이라고 4년 전의 식년시에서 탐화를 한 재원이나, 나라의 벼슬도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자가 있습니다. 곧 나의 사형으로 남명 조식의 첫째 제자 되는 자이옵니다."
"과연 경의 사형이라면 믿을 만 하겠구나! 그래 일단 그 사람을 들이도록 하자. 지금 어디 있느냐?"
"그 전에 그를 승정원의 주서(注書)로 쓰면 전하의 측근에 있게 되고 딱 맞을 것입니다. 주서의 품계가 칠품(七品)이니, 탐화 출신이라면 품계도 적절합니다. 하고 그는 며칠 전 소신을 방문하와, 제 집에 묵고 있는 줄로 아뢰옵니다."
주서는 도승지와 함께 입시하여 기록하는 자이기 때문에 항상 왕의 측근에 머무는 자리 중의 하나라 내가 그 직책에 오건 사형을 추천한 것이다.
"옳거니, 내 바로 명을 하달하리로다. 하고 경은 종4품으로 승차될 것이니 그리 알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내가 새삼 엎드려 부복하자 청년 명종 환은 흐뭇한 웃음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때 상선 내시가 급히 약솜을 가져왔으므로 명종은 상선이 치료하겠다는 것을 물리치고 손수 나의 눈에 들어간 피는 물론 이마며, 사모를 벗겨내고 환부까지 일일이, 피를 닦아내고 말린 엉겅퀴 약솜을 붙여주었다. 일종의 지혈제였다.
모든 치료가 끝나 나도 사모를 바로 쓰고, 명종 또한 한숨을 들리는데, 뜻밖에 밖에서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은 왜 여기 나와 있느냐?"
"아, 네. 대비마마!"
우물쭈물 말을 못하는 상선과 궁녀였다.
"묻질 않느냐?"
"소자가 잠시 물리쳤습니다."
보다 못한 명종 환이 나서서 그들을 구원했다. 그러자 환갑이 넘은 문정왕후 윤 씨가 대전 안으로 들어오며, 예사롭지 않는 눈빛으로 나와 명종을 쓸어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주상은 무슨 긴한 대화를 하고 있길래, 내관도 물리치고 이 자와 독대를 하고 계십니까?"
"아, 네! 금번에 장원급제한 병조정랑 윤 흥인데, 책문이 신선해서 대화 좀 나누었습니다."
"그까짓 일이 무에 중하다고, 이 사람들을 밖에다 세워둔단 말입니까?"
"아, 글쎄 그게........"
"잠깐! 지금 윤 흥이라고 했습니까?"
"네, 어마마마!"
"그럼, 내 동생 되는 원형이의 조카사위 되는 자 아닌가?"
"맞습니다. 어마마마!"
"그래요? 어디 자세히 좀 봅시다."
점점 용상 곁으로 와, 용상을 등지고 서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나를 예리하게 훑는 왕대비 문정왕후였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내가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지 않느냐?"
어미의 말에 얼른 내게 명령을 내리는 명종이었다.
"고개를 들라!"
"저런, 저런......... 어찌 얼굴이 저 모양이오?"
명종이 핏물을 닦아낸다고 닦았으나, 핏자국까지는 다 지우지 못해 문정왕후가 그런 질문을 한 모양이었다.
"소자가 좀 질책을 했더니, 결코 아니라고 항변하다가 그만........"
"하긴 원형이 사위로 삼았을 정도면 보통내기는 아니겠죠. 아무튼 지난번에는 동생으로부터 혼사 소식은 들었으나, 내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참석을 못했네. 그 점은 본전이 미안하게 생각하네."
"황공하옵니다. 대비마마!"
내가 얼른 부복하여 공경하자, 엷은 미소로 나를 바라보던 문정왕후가 종내는 시선을 거둬 명종을 향해 말했다.
"주상 보우(普雨)를 다시 병판으로 등용하세요!"
"어마마마! 그건 지난번 유생들의 탄핵으로 삭직된 것을 다시 등용한다면....... 조정이 시끄러워질 것입니다."
"지금 주상은 어미 말을 거역하자는 것입니까? 쓸데없는 소리 다 집어치우고, 이 어미 말대로 하세요. 하고 정수사(淨水士)에 좀 다녀와야겠으니, 채비 좀 해주세요."
"어마마마, 인순(仁順)의 병이 악화되기라도 했답니까?"
"어의들이냐고 하나 같이 덜 떨어진 것들만 모아놨는지, 십 수 년이 지나도 딸아이 병 하나 못 고치고, 원......... 내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그러니 그런 줄 아오. 아시겠소? 주상!"
"네, 어마마마!"
올해 29살로 삼십이 다 된 명종 환이지만, 여전히 고양이 앞의 쥐처럼 어미 앞에서는 기를 못 펴는 당금의 임금이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대 센 여인답게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대전을 벗어나는 대비를 보고, 내가 환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인순공주(仁順公主)라면 세간에 졸(卒)했다고 알려진......."
-----------------------------------------
.. /작가의 말/..................................
고맙습니다!
^^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
이전글: 총애
다음글: 총애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