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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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날 대충 시간을 때우다가 집으로 바로 일찍 퇴근했다. 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한 사람 찾아와 있었다. 일찍 퇴근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손님은 바로 남명 선생의 수제자 오건 선생이었다.
사랑방에서 그를 맞은 내가 인사를 꾸벅하며 말했다.
"오래 간만입니다. 사형! 그간 잘 지내셨죠?"
"허허, 이젠 출세 좀 하고 머리가 굵어졌다고 선생 소리는 아예 잊어버린 건가?"
"그야........!"
대답할 말이 궁해 나는 머리만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그런 내게 오건 선생이 말씀 하셨다.
"스승님의 분부를 받았네. 서찰도 전하고 자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고 오라고 해서."
이렇게 말한 그가 내게 한 통의 서찰을 전했다. 피봉을 뜯고 읽어보니 낯익은 남명 선생의 필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묵묵히 글을 읽어내려 갔다.
읽어내려 가던 내 표정이 몇 번 굳어졌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간의 안부를 전하는 외에 문면의 주된 내용은 이러 했다.
자신이 듣기에 내가 역적탐관 윤원형과 인척관계를 맺고 그와 한통속이 되어 어울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네가 그러는 데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고, 결코 그와 한 무리가 되어 나라를 어지럽히지는 않을 것을.
그리고 네가 최연소 장원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멀리서나마 진심으로 축하한다. 앞으로 행동거지에 조심하고 매사를 신중하게 처신하길 바란다. 서신 하나 제대로 없는 네놈을 제자들의 분분한 의견에 따라 징치하고 싶지만, 나는 결코 너의 품성 상 그런 일은 없으리라고 단언하고, 오건을 보내니 그에게 좋은 소식 들려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어본 나는 묵묵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내 가슴에 원대한 계획이 있지만 이것은 누구에게 표출하거나 상의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내 행실로만 판단해 본다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음도 알게 되었다.
또 제대로 소식 한 자 전하지 않은 무정한 나를 책하게 되었고, 이런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나를 믿어주는 스승님의 사랑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이 후에도 잠시 더 생각에 잠겼던 내가 무거운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제 행동에는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변명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제 계획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운을 뗀 내가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옛말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굴로 들어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스승님께서 내려주신 검에 맹세하건데, 기필코 윤원형 일당을 제거하여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제 처신이 올바르지 않더라도 많은 이해를 바라겠습니다."
"네 말에 한 점 거짓이 없느냐?"
스승을 대신한 오건 선생의 입에서 준엄한 말이 떨어지고, 표정 또한 못지않게 삼엄했다.
"절대 참입니다. 다시 한 번 맹세하건데 기필코 나라를 좀먹는 자들을 처단하여 제 의기와 함께 진심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단........."
이렇게 말하고 나는 오건 선생을 정면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저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너무 힘들고 괴롭습니다. 선생님부터 아니 우리 동문 전체가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에 대한 오해는 길어지고 시간은 더욱 지체될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다만........"
이렇게 말하고 생각이 깊어지는 오건 선생이었다.
잠시 후 결연한 표정의 오건 선생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느냐?"
"제가 알기로 저 저번 식년시에서 당당히 탐화로 합격하고서도 주상이 내리는 벼슬을 거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관위에 진출하셔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네가 귀를 완전히 막고 산 줄은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구나. 내 소식도 다 알고. 그건 그렇고........ 이제 와서 벼슬길에 나서려 해도 무슨 건더기가 있어야........."
"잠시만 제 집에 머물러 계십시오. 그동안 제 사업체나 한양구경도 하고 계시면 제가 어떻게든 힘써 보겠습니다."
"네가 그동안 윤원형과 어울리더니 아주 힘이 세진 모양이구나."
"그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제가 힘써볼 테니 말미 좀 주십시오."
"알았다. 부자라면서 나를 이렇게 괄시해도 되는 거냐? 박주 한 잔 없고 말이야."
"하하하........! 진즉 말씀하시지요. 하긴 제가 알아서 챙겼어야 하거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알았다."
"여봐라!"
"네이~!"
"안채에 일러 거하게 주안상 하나 봐오너라!"
"네이~!"
"길게 끌지 말고 짧게 말 못해!"
"네!"
물러나는 하인에게 괜한 역정을 내는 나였다. 그동안 오건 선생에게 당한 분풀이를 하듯.
잠시 후, 푸짐한 주안상이 들어오자 둘은 권하고 마시며 거나하게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물론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시국담과 그동안 내가 못 본 사형사제들의 이야기였다. 와중에 정인홍과 김우옹의 이야기도 나왔다.
다음날.
오건 선생을 내가 머무는 바로 옆 사랑채에 머물게 한 나는 오늘도 병조로 일찍 출근을 했다. 업무 시간이 되자 고경명은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선사(武選司)를 방문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 바가 있어 군기시(軍器寺)로 가자고 했다. 내 뜻을 거절할 수 없어 고경명은 군기시로 앞장을 서게 되었다. 군기시나 군기감(軍器監)이나 한 부서로 시대에 따라 명칭이 혼재되어 사용했으므로 같은 말이었다. 참고로 신장쇠가 이곳 출신이었다.
아무튼 우리가 군기시를 찾아드니 주부(主簿) 두 명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이를 본 내 이맛살이 초장부터 찌푸려졌다. 이렇게 중요한 부서에 제조(提調)는 간 곳없고, 종육품(從六品) 구임(久任) 둘만 나와 나를 맞으니, 한심하다 못해 인과응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원래 이곳에는 병조판서나 병조참판 둘 중 하나 그리고 무장(武將) 중에서 하나, 이렇게 해서 두 명의 제조를 두게 되어 있었다. 하긴 그렇게 높은 양반들이 상시 근무할 리가 없었다.
제조(提調) 직은 겸임하는 것이니 이해를 한다쳐도 이렇게 중요한 부서에 종육품 구임 두 명을 실질적 책임자로 두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임진왜란 때 호되게 당하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여기서 구임(久任)이라는 것은, 한 관직에 기술자나 여타 그 부서에 꼭 필요한 사람을 오래 근무하게 하는 관리 유임제도로, 최소 임명이 되면 3년 이상 근무하게 되어 있었고, 3년 후에도 타부서에서 함부로 못 빼가게 되어있었다. 이런 제도는 잘 한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정랑님!"
'또 정랑이라네.'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일일이 시정하기 싫어 할 말만 했다.
"이곳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해 병기, 기치(旗幟), 융장(戎仗), 집물(什物) 등의 제조를 맡는 곳입니다."
"조총(鳥銃)은 있습니까?"
"네? 처음 들어보는 말입니다만?"
하긴 질문한 내가 어리석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더니 역시나였다.
내가 알기로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오는 길에 쓰시마 도주(對馬島主)로부터 몇 자루를 선사받아 가지고 옴으로써 처음 전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있을 턱이 없었고, 말조차도 못 들어본 모양이었다.
실망한 내가 침울하게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박영준(朴永準)입니다."
이름을 들어보니 천민출신은 아닌 것 같았다.
"당신은 요?"
나는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을 지목하여 물었다.
"장 돌쇠(張乭金)입니다."
보아하니 이 사람은 천출이다.
"박 주부는 구임 신분이니 잘 하는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제일 잘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총포류를 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요? 반갑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의외의 행동에 입만 쩍 벌리고 내가 내민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박영준이었다.
'이런, 이런 아무리 좋기로서 현대에서나 행할 일을.........'
너무나 기뿐 나머지 전생의 버릇이 나와 악수를 청하니 그가 멍 때리는 것은 당연했다.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던 내가 말했다.
"명장(名匠)의 손 한 번 잡아보고 싶어 그런 것을, 그렇게 서있으면 내가 뭐가 됩니까?"
"아, 네........!"
이번에는 그가 당황하여 얼른 내 손을 맞잡아와 왔다.
"역시 명장의 손은 거칠군요."
"고맙습니다. 정랑님! 정랑님 같이 고귀한 분이........ 제 손을 잡아보자고 한 사람은....... 처음입죠. 암........ 그렇고말고요."
감격하여 말을 더듬는 그를 보니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내심 잘 된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 실로 그 분야의 학문과 기술 모두가 뛰어난 명장(明匠)이었다.
"장 주부는 주특기가 무엇입니까?"
"소인은 주로 활과 화살을 잘 만듭니다."
"그럼, 신기전(神機箭)도 잘 만들겠네요?"
"알긴 압니다만, 화약을 너무 많이 잡아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그래요? 예산만 있으면 만들 수는 있겠죠?"
"가능합니다."
"좋습니다. 어디 당신 손도 한 번 잡아봅시다."
"고, 고맙습니다. 이 천출을........."
우물쭈물하면서도 내 손을 잡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고 있었다.
"천출이 어떻게 주부가 다 되었죠?"
"기술이 좋다고 선, 선대 대왕으로부터 면천이 되었다가, 차츰 승진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긴 그의 나이를 보니 대충 사십대 후반이나 오십쯤은 되어 보이는 지라 이해가 되었다. 그가 말한 선, 선대 대왕은 중종(中宗)이 맞을 것이다. 하긴 그에게는 면천에 직첩까지 내렸으니 대왕이긴 대왕일 것이다.
"좋습니다. 두 사람의 말 잘 들었습니다. 내 조총도 구해다 주고 예산도 뒷받침해 줄 테니, 의식주 걱정 말고 연구에만 두 사람 다 매진하십시오. 내 두 사람의 뒷바라지를 다 해주겠단 말입니다."
"고, 고맙습니다!"
"실로 망극....... 헙.......!"
주로 임금에게 쓰는 말을 함부로 내뱉다가는 주리를 틀리는 수가 있었다. 하긴 엄밀히 따지면 못 쓸 말도 아니었지만. 그 은혜가 한 없이 깊고 크다는 뜻이니.......
이때였다.
병조 소속의 말단 참봉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고했다.
"정랑님, 주상 전하께서 찾으시니 얼른 가보십시오."
"그래요?"
힐끗 고경명과 마주친 나는 곧 마무리 발언을 했다.
"내 수시로 들릴 테니 열심히 하고 계시오."
"네, 정랑님!"
나는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그곳을 떠났다.
나는 뛰다시피 걸어 왕의 집무실을 찾아들었다. 곧 승지가 나의 신분을 확인하고 입실을 허락했다. 곧 상선내관이 안에다 대고 고함을 질렀다.
"전하, 병조정랑 입시 옵니다!"
"들라하라!"
명종 환의 명령이 떨어지자 나는 고개를 숙이고 종종 걸음으로 들어가 용상에 점잖게 앉아 있는 명종을 흘깃 보고는 얼른 부복하여 절을 올린 후 말 하였다.
"신 병조정랑 윤 흥, 주상전하의 명 받자와 대령하였사옵니다."
"고개를 들라!"
환의 명에 나는 시선을 들어 그의 인중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 한 번의 명이 떨어졌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네이~!"
'아, 이거 사극이라도 열심히 볼걸. 궁중예법에 어긋나면 경을 칠 텐데.'
그가 부르는데 그가 가까이 부르는 이유보다도 이런 쓸데없는 생각부터 드는 나였다.
내가 환의 지근거리에 이르자 그가 물었다.
"그래, 그게 모두 사실이더냐?"
'이거, 네 죄를 네가 알렸다와 비슷한 말이군.'
일단 긍정부터 하고 보았다.
"네, 전하!"
"내 듣기로 경의 책문을 장원으로 뽑는데 왈가왈부 말이 많았다 들었다. 하지만 상시관의
강력한 주장으로 탐화를 주장하던 일부 시험관도 동의하여 장원이 된 것으로 안다. 해서 과인이 책문을 가져오라 하여 세세히 읽어 보았느니라."
내 표정을 한 번 유심히 살핀 환의 말이 이어졌다.
"과연 선지식인지 몰라도 당금의 실정과는 맞지 않는 제안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도 펼칠 수도 있구나 하는 신선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허면 과연 그대가 주장한 말들이 사실인가 궁금하여 내 직접 불렀느니라."
"전하! 제가 책문에 논한 것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만을 고한 것입니다. 농사에 대해 적시한 것은 소인이 직접 전라도 만경에서 행하고 난 후의 결과를 적은 것 이옵고........"
"가만........!"
나의 말이 더 이어지려는데 환이 제지를 했다.
"실제 만경에서 행한 작법이라고?"
"그렇사옵니다. 전하!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옵니다."
"그렇다 라........?"
길게 기른 턱수염을 매만지며 명종 환이 생각에 잠겼다.
"이는 만경 현감이나 관리를 파견하여 확인해보면 될 일이고....... 상업에 대한 논조는 또 무엇이냐?"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도 언급된 바와 같이 물가를 조절하고 실업자를 구제하는 순 기능이 있사오나, 다만 매점매석의 폐해는 경계해야 할 것으로 아뢰옵니다. 또한 하나 더 언급을 하자면, 제대로 상업을 중흥시키자면 절대적으로 화폐의 유통이 필요합니다."
"흐흠.........! 그래, 그렇다 치고 광공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전하! 실로 왜놈들을 찍어 누르고 상국인 명나라를 제치기 위해서는 실로 광공업이 발전해야 하옵니다."
"그래, 그것이 가능한 이야기냐?"
"그렇사옵니다. 쉽지는 않겠사오나 최소 10년의 세월만 투자한다면, 결과가 뚜렷이 이를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래........?"
자리에서 일어난 환이 턱을 매만지며 창가를 서성였다.
생각이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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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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