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원급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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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것이 세월이었다.
어느덧 한 해가 훌쩍 지나 내 나이 18세의 봄이 찾아왔다.
나는 여전히 봉사로 순찰이나 하며 마포나루를 드나드는데 비해, 아내는 무사히 해산을 했다.
작년 섣달 스무닷새 날에 출산을 했는데 아쉽게도 딸아이였다. 이에 특히 어머니가 매우 아쉬워했지만 삼신할머니가 점지하는 것을 인력으로 어찌 하겠는가. 그래도 하나 다행인 것은 딸아이의 생일이, 내가 영원히 기억하게 하려는지, 12월 25일로 전생에서의 크리스마스 날이라는 것이다.
전생에서 나는 내 생일 외에 부모님의 생신도 몰라 많은 곤욕을 치렀다. 이것을 면하게 해준 딸이 나는 기특했다. 그런데 내게 요즈음 반가운 일인지 부담되는 일인지 헛갈리는 일이 하나 생겼다.
사월 초순에 성균관(成均館)에서 실시되는 별시(別試)가 그것이었다. 삼년마다 치르는 정식 과거시험인 식년시 외에, 문자 그대로 특별히 실시하는 과거시험이 별시(別試)인데, 대개는 국가적으로 무슨 큰 기념할 일이 있을 때 치르는 것이 통례였다.
당금 임금 즉위 20년이 된 것도 아니고, 태후가 회갑을 맞은 것도 아니었다. 더더군다나 명나라 황제가 새로 즉위하거나 회갑을 맞은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이번 별시는 이에 해당되는 사항이 아무 것도 없는데 실시되어, 유독 의아하게 생각하는 유생들이 많았다.
아무튼 이렇게 뚜렷한 대의명분 없이 느닷없이 별시 공고가 난 것이다. 그것도 딱 한 달간의 유예기간만 주고서. 한 달간의 유예기간이라면 현대에서는 큰 불만이 없겠지만 교통이 불편한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의 극단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준비는 고사하고, 소식을 듣자마자 출발을 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느 때는 단 칠일만 주고 시험이 시행된 적도 있었다니 큰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칠일의 유예기간이라면 당시 한양이나 경기지방의 사람들이나 시험 치르라는 이야기인데, 이때부터 수도권 집중화 현상을 부르는 폐단이 발생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나는 이에 응시하기로 하고 10일 전에 녹명소(錄名所)에 접수를 마친 상태였다. 어 하다 보니 또 열흘이 훌쩍 지나가 나는 과거시험을 보았다. 그 결과 초시에서 또 합격을 한 것이다. 이어 나는 연이어 복시를 치렀다.
별과가 식년시와 다른 또 하나의 특징은 초시와 복시, 전시를 기간을 주지 않고, 연이어 치러 급제자를 낸다는 것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복시도 잘 치러, 전국의 내노라하는 수재 들 중에서도 33위 안에 들었다.
일단은 과거시험에 합격을 한 것이다. 이제 남은 단 하나, 전시(殿試)였다. 임금이 보는 앞에서 치르는 시험인데, 이 마지막 시험에서 33명의 최종 순위를 가리는 것이다. 장원부터 병과 합격자의 등위까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시간이 되자 명종이 입회를 하고 33명은 서로 남의 답을 볼 수 없도록 육척 이상 자리를 벌려 앉은 가운데 시험이 시작되었다. 이윽고 책문(策文)이 펼쳐지는데 내용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책문의 내용은 이러 했다.
[나라를 망치지 않으려면, 왕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우선 답안지에 반드시 옮겨 쓰게 되어있는 시험문제인 책문을 먼저 썼다. 당연히 해서(楷書)로 썼다. 규정에 반드시 해서체로 쓰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초중장에 반드시 쓰게 되어있는 신복독(臣伏讀:신은 엎드려 읽습니다)이라 쓰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데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왜냐하면 답을 솔직하게 쓰라면 나는 이렇게 쓰고 싶었다.
'주상 당신부터 어머니 젖 떼고, 권신들 특히 외척의 사슬에서 벗어나야만, 나라의 근본이 바로 설 수 있소!'
이렇게 쓰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후대의 일이지만 광해군 3년(1611)에 실시한 과거시험에 응시한 임숙영이 책문을 쓰면서, 당시 왕비의 오빠인 유희분을 욕하는 글을 썼다가 합격이 취소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고, 영조 13년에는 이현필이 영조의 잘못 26가지를 공격하였다가 귀양을 간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위와 같이 썼다면 합격은 고사하고 당장 귀양 가기 딱 맞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명종이 저런 문제를 내는 역설이었다.
외숙인 윤원형 일파의 전횡으로 나라의 정사는 어지럽기 짝이 없는데, 하늘마저 명종을 시험하는지 내리 3년간 가뭄이 들었다. 그 결과 임꺽정 무리가 벌써 3년간을 황해도에서 횡행해도 그 하나 못 잡아들이고, 백성들은 유리걸식에 나선지 오래였다.
게다가 더욱 웃기는 것은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횡포였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종이에 적어 보냈다가, 그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떼를 쓰는 것은 약과고, 왕을 불러다가 반말로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심지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왕의 종아리를 때리거나 뺨을 때리기도 했다.
이런 사람이 저런 문제를 내니 얼마나 웃기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대과에서는 통상 인시정(9시)까지 답안을 내면 되지만 이 어전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딱 1시진 반 즉 3시간 이었다.
그 안에 답을 써내야 되는데 웃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더 더군다나 왕이 입조한 상태에서. 그래서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한 다음 나의 생각을 써 내려갔다.
[나라를 망치지 않으려면, 왕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복독 예로부터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했습니다. 백성이 없는 임금이 존재할 수 없고, 백성이 없는 나라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옛말을 빌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고로 백성이 가난하면 나라 전체가 가난한 것이고, 백성이 부유하면 나라 전체가 부강한 것입니다. 해서 나라를 망치지 않으려면 이 근본인 백성들부터 살찌워야 합니다. 그러면 절로 나라가 편안하고 흥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중국 역사의 예와 같이 왕조가 3백 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입니다. 왕조가 붕괴되는 데는 공통점이 있다면 반드시 라고 해도 좋을 만큼 3년 이상 계속되는 큰 기근 위에 혹리들의 착취가 동반됩니다. 이렇게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나라는 틀림없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엎드려 읽건데 나라를 망치지 않으려면 신이 누누이 강조한 대로 그 근본부터 살찌우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신이 그 방법으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농법의 개량을 들겠습니다.
수리시설이 확보된 것부터 이앙법을 적극적으로 실시해야 합니다. 이 작법을 행하면 최소한 소출이 1.2배 늘뿐만 아니라 4~5회 하는 김매기를 2~3회로 줄여, 잉여 인력으로 다른 생산성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직파법이 아닌 이랑과 고랑으로 구분하여 심으면, 이랑은 이랑대로 생산성이 높고, 고랑에도 여타 작물을 재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저 따뜻한 남쪽 지방부터 이모작을 실시하면 벼농사는 벼농사대로 짓고, 가을에 심은 밀과 보리는 춘궁기의 유용한 작물이 될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관건은 충분히 시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상공업을 활성화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업을 활성화시키면 식자의 우려대로 모두 어려운 농사는 기피하고 상업에 종사할 것으로 판단하여 금하는 것은 절대 단견입니다. 저 불랑기 같은 양이(洋夷)의 나라에서는 농업이 아닌 상업을 국가의 대본으로 삼은 바 즉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한 결과, 중농정책을 실시할 때보다 국가의 부가 더욱 늘었으며 백성들 또한 부유해졌습니다.
이를 당장 전부 본받을 수는 없지만 신이 제안한 농법을 시행하다보면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농지가 늘어 분명히 실업자가 발생할 것입니다. 신은 이들이 부랑자가 되어 떠도는 것보다는 등에 지고 이고서라도 장사를 한다면 백성과 나라 전체에 많은 이익이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를 예로 들 것도 없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물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낮은 가격이 형성된 곳의 물건을 떼어다가 비싼 곳에 파는 것이 상도의 기본인 바, 이는 물가를 진정시켜 백성들이 보다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사 쓸 수 있어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수공업과 광공업을 보다 활성화시켜 기 발생하는 실업자를 흡수한다면 공히 이쪽, 저쪽 모두 나라에 도움이 되는 즉 훌륭한 세원(稅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연장선상에서 대국(명)과 같은 해금(海禁)정책을 버리고, 적극 바다로 진출시켜 외국과의 무역도 활성화 하는가 하면, 멀리 대양으로 나가 근해에서 나지 않는 어종도 수확해야 합니다. 이 또한 백성과 나라를 살찌우는 한 방편이 아니겠습니까?
신복독건데
부유해진 백성으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말단 아전과 세리까지 먹고살 걱정 없는 충분한 녹봉을 지급한다면, 신이 예단컨대 발본색원(拔本塞源)이라는 말이 없어지지 않을까 사료되어 집니다. 또한 이 풍부한 세금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여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명군이 취할 도리요 태도가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적기를 마친 나는 시간이 남아 다시 한 번 훑어보고 나서 나의 관직, 성명, 연령, 본관, 거주지 등을 썼다. 그리고 이어 위로 네 조상들의 관직, 성명, 본관을 또 적었다. 그리고 내 신상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을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도록 종이에 풀칠을 해 여러 번 덧붙였다. 그리고 이 피봉 된 부분 상중하에 근봉(謹封)이라고 써서 마감을 했다.
그러고 나자 시험의 마감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곧 답안지를 제출하고 어전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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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치지 않으려면, 왕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의 책문은 명종 때 실제 출제되었던 책문입니다.
..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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