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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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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의 안내를 받아 뒤채의 여각에 이른 나는 저절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나만이 묵게 되어 있어 흥선도 청소를 확인하는 외에는 얼씬 않는 안채 여각에, 외삼촌 박포 양홍손이 근 칠팔 명에 달하는 떨거지들과 함께 술판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찌푸린 인상을 보고도 양홍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축하하네! 생원이 된 것을."
그래도 내가 여전히 기분 나쁜 표정으로 말이 없자, 그가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조카가 초시에 합격했다는 말을 듣고 겸사겸사 해서 왔다네. 왜 그렇게 서있기만 하는가?"
이제 내 나이 17세로 그동안 키도 더 자라 근 8척 장신에 가까웠다. 현대의 신장으로 180cm가 넘는 큰 키에 숙성한 얼굴로 조용히 서있기만 해도 위압감이 풍기는 모양이었다.
"무고하셨습니까?"
내가 여전히 언잖은 표정으로 무겁게 말하자 양홍손이 물었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나, 아니면 고민이 있나?"
그의 말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그에게 한 번 상의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세에게 뇌물로 줄을 대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음서로 관직에 나가는 것은 별개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민에 잠겨 있는데, 이 사람이 평소에 술을 좋아 하지만, 나름대로 잔꾀도 밝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잠시 의논할 일이 있소이다."
"옆방으로 갈까?"
"그러지요."
"이봐, 그렇게 쳐다만 보지 말고 새롭게 술상하나 봐오시게."
제 종 부리듯 흥선에게 명령 투로 말하는 개차반 양홍손이었다. 이에 내 눈치를 보는 흥선에게 그렇게 하라는 뜻으로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흥선이 그 길로 물러났다.
술상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딴청만하다가 술이 들어오자 자작으로 게걸스럽게 한 잔을 쭉 따러 마신 그가 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아, 자네도 이제 성년이 되어 술 한 잔씩 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깜빡했군. 한 자 하려나?"
"한 잔 하지요."
말과 함께 내가 잔을 들고 있자 내 잔에 술을 치며 말했다.
"나도 한 잔 따라주게."
실소한 내가 한 잔을 따라주자 거침없이 들이키고 게트림까지 한 그가 비로소 물었다.
"무슨 고민인데?"
"음서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나의 말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홍손이 바로 대답했다.
"거 요즘 잘나가는 10촌 아재비 있지 않은가?"
요즘 누님 문정왕후를 끼고 세도를 부려 세간의 지탄을 받는 윤원형을 이르는 말이었다.
"나도 그쯤은 생각 안 해본 게 아니오 만은?"
"흐흠.........! 그렇다라........?"
잠시 생각하던 그가 영 좋은 꾀가 떠오르지 않는지 고개를 흔들더니, 상체를 반쯤 일으킨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말했다.
"내 지모도 한계가 있거든. 내 장자방과 의논해 보아야겠네. 아니 그럴게 아니라 그들을 전부 이리로 불러들이지?"
"그들을 어찌 믿고........."
"어허........!"
나의 말에 꾸짖듯 한마디 한 홍손이 말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는가? 다 자네를 위해 모아놓은 재주꾼들일세. 자네가 50마지기에서 나오는 소출을 마음대로 쓰게 하여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을 사귀라 할 때는, 다 생각이 있어서인데, 내 자네 돈을 허투루만 쓰고 다닐 수 있남. 해서 자네들을 위한 사람들을 모아봤지.
그런 눈치도 없으면 공으로 술 얻어먹고 다니기도 힘들어. 허허허........!
"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옆방으로 가려는 홍선을 내가 제지했다.
"잠깐만요. 이곳은 비좁으니 내가 그곳으로 가지요."
"잘 생각했네. 겸해서 오늘 상견례도 하고 크게 한 턱 내시게나."
"위인들을 좀 보고요."
"만족할 걸세. 지모가 출중한 자도 두셋 되지만, 어의 출신의 의야(醫冶),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검객, 모리배, 힘꼴깨나 쓰는 부랑자 별 온갖 잡동사니가 다 있다네."
"하하하.........! 하여튼 외삼촌부터가 기인 아닙니까!"
그의 말에 내가 기분이 풀려 밝은 어투로 말하자. 홍손도 기분이 좋은지 껄껄 웃으며 옆방으로 가기를 재촉했다.
"야, 다들 일어나 맞으라고 장차 자네들의 주군 되실 주인공이 방금 납시셨으니까!"
말하는 모양새가 삼국지를 아무래도 너무 많이 읽은 모양 같았다. 홍손의 말에 일제히 일어나는데 하나 같이 범상한 자가 없었다.
"다들 앉으세요. 너무 예의 차릴 것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손짓까지 동원해 모두를 앉게 한 후, 나도 비워진 정중앙의 자리에 앉았다.
"허 생원, 손 첨지부터 차례들 인사하시게. 내가 말한 그분일세."
양 홍손의 말에 처음으로 지목받은 허 생원이라는 자부터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데, 자못 기개도 있고 준수하게 생긴 자였다.
"허필량(許 弼良)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조선 최대의 갑부며, 웅대한 포부가 계시다고요."
"허허........! 누가 들으면 역적질이라도 하자는 줄 알겠소. 내 꿈은 조선이 좀 더 부강해지고, 백성들이 고루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해 보자는 것이오."
"그 꿈이 웅대하지 않으면, 뭔 꿈이 웅대하단 말입니까?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대개 신분이 미천하지만, 가슴 속에는 그런 불타는 열망들을 품은 자들입니다."
"뜻을 함께 하겠다니 고맙소."
미리 정중하게 사의를 표한 나는 다음으로 지목된 손 첨지라는 인물을 살펴보았다.
염소수염에 쥐처럼 작은 눈을 또르르 굴리는 모양새가, 간신 아니면 기궤(奇詭)가 풍부한 모사꾼 같아 보였다.
"손 자대(孫 自大)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많은 쓰임이 있기를 바랍니다."
허풍을 잔뜩 늘어놓을지 알았더니, 손 첨지의 말은 의외로 점잖았다.
이어 양홍손은 두 명의 중을 소개를 하는데, 운봉(雲峰), 운곡(雲谷) 사형제라 내게 소개를 했다. 운봉은 생김이 위로 보다는 옆으로 더 퍼졌는데 목덜미 하나가 웬만한 사람 허벅지보다도 굵어보였다. 힘꼴깨나 쓰는 장사 형의 생김이었다. 운곡은 그에 비하면 왜소하다고 보일 정도로 점잖은 학승 같은 검객이었다.
이어 홍손은 백동(白銅) 은동(銀銅) 이라는 이마에 묵자 된 망나니 같은 덩치들을 소개했는데 한눈에 척 보기에도 불량배 같이 보였다. 이어 어의(御醫) 출신이라는 수염이 하얀 공 진택(孔 眞擇)이라는 의자(醫者)가 끝으로 내게 소개되었다.
모든 사람의 소개를 받은 나는 그들에게 간단하게 답례의 말을 했다.
"모든 인연은 소중하거늘, 만나게 되어 반갑소. 함께 좋은 일을 해나가 봅시다."
나의 말이 끝나자 외삼촌 양홍손이 허필량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물었다.
"윤 생원이 음서로 관가로 진출하고 싶어 하는데 노비를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올려놓은 허 생원께서 힘을 좀 써보시면 어떨까 하오."
얘기를 들어보니 정난정을 일약 노비에서 정1품 재상의 아내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 모양이었다.
"그런 부탁이 하도 들어와서 이제는 관직 매직도 씨가 말랐소. 비상한 수단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소."
그의 말에 갑자기 좌중에 어색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이때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손 자대라는 자가 뜬금없이 공 진택이라는 의자에게 물었다.
"사람을 감쪽같이 마비시킬 수 있는 약재가 있을까요? 일종의 풍(風) 같이."
"음........! 있소. 초오(草烏)의 괴근(塊根)이 그렇소. 사약의 일종인데 치사량 직전으로 쓰면 풍과 같이 마비가 오고, 또 이를 잘만 법제화 쓰면 풍을 몰아내기도 하는 신비한 약이오."
"그렇다면 일을 진행하기가 쉽겠습니다."
비릿한 웃음으로 마감하는 손자대의 표정은 의기양양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 간신 같은 염소수염을 자랑스럽게 한참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하더니, 밖의 누가 들을세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데 나도 듣기 어려울 정도로 작았다.
손자대의 '왕망지계(王莽之計)'라는 작전명에 따라 우리는 역할분담을 하여 신속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 내가 상견례주로 그날은 이들 모두가 코가 삐뚤어지도록 호궤(犒饋)한 다음이었다. 운봉, 운곡 사형제도 누가 파계승 아니랄까봐 닭다리까지 뜯으며 말술을 마셨다.
아무튼 그 이튿날부터 작전이 개시되었는데, 제일 먼저 일을 착수한 사람은 의외로 이날 자리에도 없었던 흥선이 담당하게 되었다. 정난정과 전부터 뇌물을 받치느라고 안면이 있던 그가 이번에도 뇌물을 받치고, 나와 정난정은 물론 궁극적으로 윤원형까지 면담을 주선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흥선은 남의 눈에 잘 안 띄는 인경(人定: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을 치기 한 시진 전에 예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윤원형의 사랑채를 방문했다. 그 결과는 즉각 효험을 발휘에 다음날 바로 정난정과 나와의 면담날짜가 잡혔다.
시간도 윤원형이 궐에서 퇴근한 이후인 초경 무렵이라 딱 좋았다. 아무튼 나는 흥선을 앞세우고 또 간단한 예물을 준비해서 정난정이 전용으로 운영하는 사랑채를 찾았다. 하인들이 쥐방울 마냥 드나들며 나와 흥선이 온 것을 통보하고 나서야 그녀와 나와의 대면은 이루어졌다.
댓돌위에 신발을 벗어놓고 사랑채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방 두 개를 텄는지, 두 칸짜리 방 중 하나는 손님이 앉을 수 있게 했고, 하나는 주렴이 내려진 채 정난정이 앉아 있었다. 이 모습에 나는 첫 대면부터 실망을 했다.
얼마나 잘난 여인이기에 윤원형이 자신의 본부인을 독살하는 것마저 용인할 정도인지 그 미모를 보고 싶었으나 나의 희망은 희망으로 끝내야 했다. 그렇다고 이를 내색할 수는 없고 나는 시침을 뚝 떼고 문안인사부터 드렸다.
"정경마님께 문후인사 올립니다. 진즉부터 찾아뵙는다는 것이 면목이 없어서 서얼만 몇 차례 보내 인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하다가 금번에 제가 생원시에 합격하는 바람에 좀 면이 서서 이렇게 문안인사차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잘 오셨네. 그렇잖아도 우리 집안과는 10촌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인데, 지난번 큰 아비 되는 윤임사건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바, 괜히 죄 없는 춘부장까지 이 일에 연루되어 한동안 소원했었지?"
"과거의 사소한 불미스런 일은 잊었고 오히려 복권에 힘써주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호호.........! 생긴 것만큼이나 아주 시원시원해서 좋네. 헌데 그렇게 많은 예물을 보낼 때는 내게 청이 있질 않겠는가?"
"친인척지간에 괜히 부담만 되게 무슨 청이 있겠습니까? 단지 오늘 저의 방문은 예전의 교통이 잦았던 날들을 그리워한 족질이, 그런 날들을 다시 염원하면서 예물을 준비한 것뿐이옵니다."
"좋아, 아주 좋아. 내가 한 십년 만 젊다면 청혼이라도 하고픈 기남아일세. 아 참, 그러고 보니 내게 쓸 만한 수양 딸아이 하나가 있는데, 자네만 괜찮다면 차제에 혼인을 하는 것은 어떻겠나?"
"말씀은 고마우나 저는 이미 성혼을 한 몸입니다."
"그래? 아깝군, 아까워! 재물도 조선에서 첫째 둘째를 다툰다면서?"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할만치는 있습니다."
"호호호........! 겸손이 지나치군. 마음마저 저러니........ 정말 놓치기 아까운 혼처인데......."
잠시 호두알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던 정난정이 다시 말했다.
"자네만 좋다면 첩으로 들이시게. 곧 양 가문의 통교를 잇는 좋은 가교(架橋)가 아니겠는가?"
"저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부인 하나로 만족합니다만.........?"
"어허! 무슨 소릴! 양반가에서 삼첩사첩은 큰 흉이 아니거늘........ 여러 말 할 것 없이 내일 이 시각에 다시 한 번 들리시게. 오늘의 만남은 이것으로 끝내는 것으로 하고. 만약......."
잠시 나를 노려보던 그녀가 나를 협박하듯 한마디 툭 던졌다.
"거절하면 후과가 좋지 않을 게야!"
그러고는 남자마냥 벌떡 일어나 예의도 없이 휭 하니 먼저 사라지는 정난정이었다.
대략난감 했지만 일은 요상하게 손 자대가 예상한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 바람에 예정되었던 윤원형과의 면담은 실패로 돌아갔다. 윤원형의 집사격인 허필량이 중간에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후과가 두려워서라도 다음 날 초경 무렵에 또 다시 정난정의 사랑채를 방문하게 되었다. 역시 정난정은 주렴 뒤의 보료 위에 앉아 있었는데 어제와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정난정의 옆에 한 사람이 더 앉아 있다는 것이고, 내가 앉은 곳에 어제와 달리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와 주었군. 고맙네."
나에게 한마디 한 정난정이 이번에는 옆의 수양 딸아인 듯한 여인에게 물었다.
"어떠냐?"
내 귀에 대답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얼굴만 붉히며 고개만 숙이고 있지 말고 대답을 해야 네 의사를 알 것 아니냐?"
".........."
그래도 여전히 대답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것이 정말!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냐."
"몰라요. 어머님 뜻대로 하세요."
그리고 그 여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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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고맙습니다!
^^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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