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유를 찾아서 -->
5
이윽고 우리가 마사에 도착하니 줄줄이 늘어선 마사에서 각기 다른 말들이 구유통에 머리를 처박고 먹이를 먹고 있었다. 나는 이십여 마리가 넘어 보이는 조랑말들을 바라보며 충주 광산들을 떠올렸다.
이 조랑말도 근간에는 모두 충주목장에서 공급한 말이라 했다. 아직 시기상조라 철점과 금점을 운영하고 있지는 않지만, 목장으로서 기능은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기특한 서출 처남들이었다.
이후 나는 대충 당내(堂內)를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내내 위기의식을 느낀 내 머리에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하면 내 야심을 실행할까 하는 계획으로 분주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틈틈이 과거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외적인 일도 곧 계획이 세워졌다. 그래서 나는 곧 한낮임에도 아내의 규방으로 찾아들었다.
"어쩐 일이세요, 서방님? 대낮부터........"
묻는 아내의 볼은 엷게 홍조가 돌고 눈은 무언가의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아내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미사여구를 동원했다.
"당신이 보고 싶어서."
"핏, 기분은 나쁘지 않네요. 그런데 무슨 청이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곧 한양으로 올라가려하는데 당신도 따라 갈 테야?"
"어머, 아낙이 어떻게 외부로 자꾸........"
"돌아다니느냐 그 말이야?"
"네."
"그래? 싫으면 말고."
삐진 형용으로 돌아선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할 수 없지. 첩 질이라도 하는 수밖에."
"뭐예요? 당신........!"
화를 내는 듯하던 아내가 금방 눈물을 글썽이자, 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내 할 말을 했다.
"싫다며?"
"제가 언제요?"
"그럼, 따라간다는 이야기야?"
"이 세상 끝까지라도 요."
"당신의 사랑이 그렇게 깊은 줄은 내 몰랐는데?"
"쳇, 당신 바람피우는 것 꼴 보기 싫어서라도 어느 곳이라도 쫓아다녀야겠어요."
"오~! 그래? 혼자 가려했더니........"
퉁퉁거리던 내가 갑자기 아내를 끌어안고 입에 입술을 맞추었다.
"음, 음........ 대낮부터 이러시면 싫어요."
"언제는 좋다더니?"
"제가 언제요?"
"시침은. 아무튼 그렇게 마음먹고 있어."
"네, 서방님~!"
아양 떨듯 말꼬리를 길게 끌던 아내가 갑자기 달려들어 내 얼굴에 뽀뽀를 했다.
"왜, 왜 이래?"
"당신은 해도 되고 나는 안 되남 요?"
"어허, 이런.........!"
아내도 이젠 점점 날 닮아가서 조선시대의 여성으로서는 부적격이었다. 하긴 나밖에 모르는 아내는 다른 집안들도 다 그렇게 생활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길로 어머니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려고 갔다.
내가 내원의 내당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기쁜 얼굴로 맞으셨다. 조석의 문안 외에는 아들 볼일이 거의 없는 어머니로서는 대낮에 아들을 본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우신 모양이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또 모진 말을 하려 하니 차마 입이 안 떨어졌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어서 오너라. 우리 아들! 오늘은 대낮부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요."
"왜? 젖이라도 한 통 먹고 싶어서?"
"네, 어머니!"
"호호호.......! 이 어미는 이미 빈 젖이 다 되었는데, 어쩌지?"
"그게 아니고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어서 해보란 듯 다만 미소를 짓고 고개만 끄덕이시는 어머니였다.
"한양에 올라 가야겠어서요."
"왜?"
금방이 표정이 굳어지며 날이 서시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과거 준비하러 요."
"여기서는 못하니?"
"아무래도 정보도 늦고, 서울에 벌여놓은 사업체도 둘러봐야 되잖아요."
"나는 네가 여기서 천년이고 백년이고 나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고만."
"이참에 아내도 데리고 가려고요."
"며늘아기만은 안 된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손자 생산하죠."
"그것참........."
쓰게 입맛을 다시며 고민이 깊어지는 어머니셨다.
"이참에 어머니도 한양 나들이 한 번 하실래요?"
"이 집은 누가 관리하고."
"흥정 삼형제가 있잖아요."
"그것 참........! 그래도 될까?"
"안 될 건, 또 뭐 있어요. 모든 준비는 제가 다 할게요."
"그것 참......."
생각은 있으면서도 여전히 망설이시는 어머니를 위해 내가 못을 박았다.
"내일 출발입니다."
"그래. 그럼 준비하마."
"네, 어머니!"
기쁘게 말하고 나는 내원을 물러나왔다. 외아들 하나만 바라보시고 외롭게 늙어 가시는 어머니를 외면하기에는 내 천성이 그렇게 모질지를 못했다.
어머니와 아내를 데리고 한양에 올라온 나는 일단 어머니와 아내를 여각에 모셨으나, 너무 시끄럽고 번잡하다는 어머니 말씀에, 나는 흥선을 시켜 긴급으로 정동에 나온 양반가 한 채를 사들였다.
어머니와 아내를 정동의 집에 안치한 나는 다음날 아침부터 마포나루의 상점가를 둘러보며 삼년간의 공백을 점검했다. 여각에 들르니 그전에 있던 금와상점과 금와은행이 보이지를 않고 온통 주청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내가 흥선을 보고 물었다.
"이곳에 있던 점포와 은행은 어디로 갔지?"
"요 옆에 새로 건물을 사들여 전부 허물고 새롭게 크게 꾸몄습니다."
"그래? 여각이 잘 되는 모양이군."
"여각도 잘 되지만 그보다는 상점이 너무 번창했다는 말이 옳겠지요."
"상점으로 가볼까?"
"모시겠습니다. 가주님!"
상점이라는 곳이 멀지 않았다. 바로 길 건너에 있었다.
금와상점이라고 쓴 편액에 현대의 입간판 대신에 깃발로도 금와상점이라고 쓰여 휘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야말로 아침나절인데도 상점은 문전성지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매장 안으로 들어가 가만히 살펴보니, 주로 소금과 소금에 절인 생선 그리고 젓갈류와 국수가 그렇게 많이 팔리고 있었다.
흥선에게 묻지 않아도 그 이유를 알만했다.
우리가 생산하는 소금 값을 당시의 시세로 계랑하면 가마로 생산하는 자염보다는 거의 십분의 일에 가까운 가격차가 있었다. 그러니 소금이 시중의 다른 곳보다 터무니없이 쌀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미끼 상품이 되어 다른 것 까지 잘 팔리게 한 모양이었다.
소금을 종친부에서 관리한다고 하나 중종 이래로 기강이 무너져 요즈음은 전혀 단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판매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래도 훗날 이야기를 들으니 방귀깨나 뀌는 놈들이 알게 모르게 이를 두고 시비를 걸면 몇 푼의 돈에 무마되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또 이렇게 싼 소금을 이용하여 포구로 들여오는 생선을 어선 째로 통째로 도매금에 매입하여, 염장생선을 생산하고, 또 그 부산물로는 젓갈을 담아 파니, 너도 나도 사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들이 소매로 사가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주로 대량의 물건은, 중간 도매업자나 유명한 송방, 유상, 경상상인 등 큰 상단에서 소비한다고 흥선은 부언했다. 이 외에도 작두펌프나 탈곡기도 종종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은 고가라, 양반가나 지주들 층에서 주로 소비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 외에도 칫솔이나 죽염도 쏠쏠하게 나가고 있으나 큰 이문은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게에 이어 나는 그 옆에 있는 은행으로 가보았다. 내 설계에 의해 현대식 은행 점포와 비슷하게 꾸며진 은행은 비교적 한산했다.
십여 명의 직원들 앞에 상담을 하고 있는데 주로 대출을 요망하는 사람들인지 직원들이 부정적인 말만 쏟아내고 있었다. 글공부를 떠나기 전 예금도 취급하라고 했으나, 돈을 맡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작은 장사치들로 푼돈이 대부분이라는 흥선의 부언 설명이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지금은 주로 대출을 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저녁나절은 장사를 끝낸 시장상인들이 예금을 하러 대거 몰리는 바람에 바쁘다고 했다. 나는 잘 하고 있다고 격려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과거시험에 대해 알아보았다.
알고 보니 내년이 3년에 한 번씩 치르는 을유(乙酉) 식년시 때문에 올 9월 초에 초시(初試)가 있을 예정이었다. 초시는 식년시 한 해 전에 치러졌다. 여기서 식년시(式年試)라는 것은 12간지 중에서 끝에 자(子), 묘(卯), 오(午), 유(酉) 자가 들어가는 해에 치르는 정기 과거시험을 이르는 말이었다.
나는 우선 다른 것은 제쳐두고 채 여섯 달이 남지 않은 과거시험에 매달리기로 했다. 만경에 있는 학당의 일이 조금은 걸리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잘 해왔듯 당분간은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두문불출 과거시험에 매달리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내가 세월을 잊고 과거시험 공부에 열중하길 어언 육 개 월.
어느덧 시험일이 다가와 한양 시(漢陽 試)의 소과에 응시한 결과, 당당히 나는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치러진 정시 식년시인 복시(覆試)에서 나는 그만 낙방을 하고 만 것이었다. 면목이 없었지만 조선의 전 사대부들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이 시험에 목을 매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게 실망할 일도 아니었다.
평균 6만3천여 명의 응시 자중, 전국적으로 240명을 뽑는 것이 초시다. 240명 중에서 한양에서 치러지는 한성시에서는 40명을 뽑았다. 결론은 내가 이 40명 안에 들었다는 얘기다. 게다가 평균 30년 이상을 과거공부에 투자해서, 평균 나이 35세에 급제를 하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볼 수 있었다.
아니 이 나이에 초시에 합격만한 것으로도 가문의 영광이요, 천재소리를 들을 만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다. 천생 음서(蔭敍)를 통해서라도 관직에 진출하고 싶은 게, 요즈음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무래도 자꾸 학당의 일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없애치우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지 몰라도 나의 원대한 꿈을 위해서는, 나에게는 그들이 꼭 필요했다. 지금도 은행원이나 상점의 대부분이 학당 출신들이니 내게 기여하는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이렇게 고민을 하다가 금방 해결 될 일이 아니라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점포에 가보니, 마침 여각에 목포에서 올라온 큰외삼촌이 있다는 흥선의 보고를 받고, 인사 겸 해서 그를 만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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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
풍성하고 즐거운 한기위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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