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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인생-18화 (18/141)

<-- 거유를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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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해, 하루는 남명 선생이 전 제자들을 불러들인 가운데 갑자기 나를 호명하셨다.

"흥아!"

"네, 스승님!"

나는 모처럼 다정하게 부르는 선생의 부르심이 갑자기 눈이 시큰해졌다. 나도 왜 이런 감정이 드는 지 알 수 없었다.

"오늘로서 너를 내 곁에서 떠나보내련다."

"아니 됩니다. 스승님의 슬하에서 더 배워야 됩니다."

"흥아!"

"네!"

여전히 다정한 부르심이었다.

"물론 네가 더 배워야 되는 것은 맞다. 학문의 길은 구도의 길과 같아서 끝이 없느니.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 자구에 연연하지 않는 너의 성정을 보건데, 네가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기란 참으로 어려우리라 본다. 하지만........."

여기서 말을 그치고 나는 물론 전 제자들을 휘둘러본 선생의 말씀이 이어졌다.

"내가 볼 때 너는 내 문하 어느 누구보다도 크게 출세할 것으로 본다. 최소한 정승 이상은 될 게야. 역사는 고금을 막론하고 승자의 역사였다. 패한 자는 기록이 지워지는 것은 물론 곡해되거나 첨삭되어 후세에 아주 나쁘게 전해지거나, 아예 그 일문이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해서 내가 너에게 줄 선물이 있다."

선생은 어느 때보다도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애제자를 차근차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살피시더니, 이윽고 그 눈길이 내게 멎었다. 그리고 곁에 두었던 상자를 열어 무엇을 꺼내셨다.

한 자루 고색창연한 검이었다.

그 검을 천천히 들어 보이신 선생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엄숙한 어투로 말씀하셨다.

"이 검은 곧 나를 대표한다. 곧 남명 학통의 계보를 이음은 물론, 전 문도들을 호령할 수 있는 무상의 권위가 있다 할 것이다."

이렇게 운을 떼신 선생의 말씀이 이어지셨다. 와중에 자신의 애제자들을 다시 한 번 살피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나는 오늘 이 귀물을 가장 어리고 학문의 성취는 비록 더딜지 몰라도, 후대에 내 학문을 제대로 전승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윤 흥(尹 興)에게 하사한다. 이유는 종전에 말했다. 내 학문의 맥이 끊어지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동의하느냐?"

"지당하십니다!"

모두 고개를 조아리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스승의 사랑에 감동해,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흥아!"

"네, 스승님!"

스승의 다정한 부름에 나는 나도 모르게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내 말 뜻이 무엇인지 알지?"

"네, 스승님! 스승님의 유지(有志)를 받들어, 면면부절 스승님의 위대한 사상과 학문이 전승되도록,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옳거니! 들었지? 이럴 때는 모두 격려와 축하의 인사말 한마디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축하합니다!"

"축하하오! 종주(宗主)!"

선생의 말에 모두 밝은 얼굴로 내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데 누군가가 실언을 했다. 아무래도 웃고자 한 것 같았다. 이를 놓치지 않고 선생께서 한 말씀하셨다.

"종주는 나다!"

"하하하..........!"

잠시 후, 장내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선생께서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흥아, 그 검명((劍銘)에 새겨진 글자를 읽어보아라."

스승의 명에 따라 내가 큰 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外斷者義)!"

"그대로 행하라!"

"네! 스승님!"

나는 공손히 스승의 명을 받들었다.

훗날 선생이 72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후 선생의 행적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러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선생의 사상은 노장적인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하셨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의(義)'를 강조하셨다.

그가 내가 하사하신 검의 검명(劍銘)에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外斷者義)'라고 새겨놓았듯이, 그의 철학은 바로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외부 사물을 처리해나간다는,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하셨던 것이었다.

'경(敬)'은 내적 수양을 통한 본심(本心)의 함양에 주력하게 되는 반면, '의(義)'는 외적 행위의 단재(斷裁)를 통한 사욕(私欲)의 제거에 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선생은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일체 타협하지 않으셨으며,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셨던 것이다.

내가 잠시 생각에 빠져있자 선생께서 나를 엄숙한 어투로 다시 부르셨다.

"윤 흥!"

"네, 스승님!"

"오늘 내, 내 문하를 떠나는 너를 위해, 마지막으로 네게 선물을 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를 유심히 한 번 더 살피신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내 너에게 이르노니, '삼갈 것을 경모할 지니', 자(字)를 '숙계(叔戒)'로 하라! 내 '북쪽 언덕'을 넘어 온 너를 만나 행복했으니, 호(號)를 '북강(北岡)'이라 하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평생을 간직하고 살겠습니다."

내가 급히 머리를 조아리자 동문들 모두가 이번에는 때를 맞추어 나를 진정한 성인으로 대접하며 축하해 주었다. 당시 정남(丁男)이라고 해서 16세 이상은 징병대상으로 성인 대접을 받았다. 물론 완전한 성인은 혼인을 해 상투를 틀어야만, 온전히 대접을 받긴 했다.

아무튼 이 당시 나는 선생의 문하로 온지 만 삼년이 넘어 정월도 지났으니, 나이로는 이미 16세였다. 아무튼 스승으로부터 자와 호를 받은 나는 곧 떠날 때가 됐음을 알고, 선생은 물론 그동안 정이 든 동문 모두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다음 날 나는 선생이 하사한 검을 비껴 차고, 오랜 세월 나의 둥지였던 산해정(山海亭)을 등졌다. 선생과 동문들의 정감 넘치는 아쉬운 작별을 받으며.

* * *

아직도 겨울의 끝자락이라 가는 내내 추웠다.

내 키가 이제 일곱 자 일곱 치로 이제 다리가 땅에 닿아 나는 조랑말 가운데가 아닌 제일 끝자락 그러니까 조랑말 둔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반 누운 자세가 되어 누가 보면 가관일 것이다. 아무튼 나의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비루먹은 작은 노새를 앞에서 끄는 삼돌이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보고자 함이 아니고 제 각시를 몰래 몰래 보기 위함이었다. 원래 둘은 총각 처녀였으나, 내 뒷바라지를 하느라 아랫마을에 같이 거처하면서 정분이 나, 아예 내가 둘을 혼인시켰던 까닭이었다.

나도 장가를 가서 그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니 두 눈을 질끈 감고 모른 척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김제도 지나 눈에 익은 만경의 드넓은 뜰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새삼 감회에 젖어 길을 재촉했다.

이윽고 우리 가문 소유의 대토지에 들어서니 너도 나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데, 인사 받기도 고개가 아플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어른이 되어 돌아오는 나를 몰라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삼돌이가 어깨에 힘을 주고

'가주님, 나가신다!'

고 외치니, 새삼 눈을 비비고 부랴부랴 엎어지느라고, 논둑에 처박히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마을에 들어서기도 전에 흥정을 필두로 흥분, 흥부가 모두 마중을 나왔다. 개중에는 눈치 빠른 하인 놈들이 있어 잽싸게 달려가 집에 고했던 모양이었다.

"학문의 성취는 있었는지요?"

"그럭저럭."

흥정의 인사에 성의 없이 대답한 내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사업을 잘 되고 있지?"

"더욱 번창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군."

내 대답이 이렇게 성의업고 시큰둥한 이유는 누구보다도 아내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내심 서운해서 그런 것이다. 내 기분을 안 것일까, 멀리서 장옷을 입은 여인네가 출현하는데, 안 봐도 틀림없이 부인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내가 삼돌이로부터 노새의 고삐를 인계받아 엉덩이를 후려지니 놀란 노새가

앞발을 번쩍 치켜들고 지랄을 떠는 바람에 나는 흙바닥에 내동댕이 처졌다.

"가주님!"

"꺆............!'

흥정 삼형제와 하인들은 물론 멀리 있는 아내도 외마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데, 나는 별로 다친 데도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어디 갔어? 조랑말 새끼!"

"저기 잡혀오고 있습니다."

"오늘 잡아버려! 아니 내다 팔아!"

"네, 가주님!"

그러는 동안 아내가 눈물 글썽한 눈으로 가쁜 호흡으로 내 곁에 당도했다.

"여보.........!"

얼마나 그리웠는지 이 많은 남정네 앞에서도 아내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달려들어 와락 내 품에 안겼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내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폭 안긴 아내를 안고도 내 품은 넉넉했다. 나는 그런 아내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잘 지냈지?"

"몰라요!"

"그러면 쓰나."

앵도라져 내 품에서 벗어나려는 아내를 다시 꼭 품에 끌어안고, 나는 열심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많이 보고 싶었어!"

"저도요!"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을 하는 아내를 갑자기 떼어낸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고운 볼에 뽀뽀를 했다.

"여보........!"

아내가 달아오른 얼굴로 부끄러워 나를 부르나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의 양쪽 볼은 물론 입술에도 가볍게 키스를 하고 놓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부지런히 걸음을 놀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종종 걸음을 치던 아내가 기어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번하자, 할 수 없이 나는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래도 비교적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우리 집 웅장한 대문가에 이르니, 기둥에 등을 기댄 어머니가 거기 나와 계셨다.

"어머니!"

나는 아내의 손을 뿌리치고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오........! 사랑하는 내 아들!"

"쳇........!"

갑자기 손을 뿌리치고 어머니에게 달려가는 내가 얄미워 아내가 푸념을 했지만 내 귀에는 전혀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양팔을 벌리고 어머니를 마중했다. 어머니 또한 같이 나를 안아 오셨다.

그러나 턱도 없었다. 나를 안으려하나 이미 장성한 나를 안기에는 어머니의 품이 너무나 작았다. 엉성하게 허리를 구부리고 오히려 내가 어머니를 얼싸안고 어머니의 등을 토닥였다.

"별고 없으셨죠. 어머니!"

"별고 없기는 네가 그리워 이 어미 눈이 짓무른 것 안 보이냐?"

"어디 좀 봐요."

나는 어머니를 내 품에서 떼어내 바라보았다.

"전혀 안 짓물렀는데요."

"데끼 놈! 호호호........!"

"하하하.........!"

나는 모처럼 어머니의 작은 손을 잡고 걸었다.

"이 아들이 남명 선생 문하에서도 너무 뛰어나게 잘 하자, 선생께서 자신의 유지를 이어 달라며, 이 검을 제게 내리셨어요. 보실래요? 어머니!"

내가 좀 뻥을 치고 검 집을 툭툭 치며 말하자, 어머니는 질겁하며 말씀하셨다.

"아, 아니다. 봐야 칼이지. 나는 괜히 시퍼런 칼만 보면 몸서리가 처진다. 네 애비가 그런 칼에 당했으리라고 생각하니........."

어머니의 눈에 또 눈물이 맺히셨다. 나는 다정하게 어머니의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드리며 말했다.

"아버지 대신 이 아들이 백배 천배로 잘 할 테니까, 어서 눈물 거두세요. 어머니!"

"나도 참 주책이다. 모처럼 아들을 만나 기쁜 날, 이 무슨 추태란 말이냐."

그렇게 말씀하신 어머니가 손수 눈물을 훔치시고 씨익 미소를 지으셨다. 그 모습이 마치 긴 장마 끝에 보는 햇살처럼 아름답고 보기 좋았다.

방안으로 어머니를 모신 우리 내외는 새삼 어머니께 공경스럽게 절을 하고 간단한 다과상을 받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그것이 자꾸 길어지려하자 나는 안달이 났다. 그래서 내가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모처럼 원행을 했더니 피곤하네요, 어머니. 돌아가 쉬겠습니다."

"색시 끌어안고 싶어서 그러지?"

어머니의 말씀에 아내의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나는 괜히 투정을 부렸다.

"에이........! 잘 아시면서 괜히 그러신다."

"호호호........!"

아내와 어머니가 입을 가리고 웃고 나는 거기서 한술 더 떴다.

"얼른 손자 생산해야지요."

"그래, 그래. 어서 가서 일찍 쉬거라."

"네, 어머니! 소자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호호호.........!"

내가 일부러 장난스레 말하며 허리까지 깊이 굽히자 어머니 또한 매우 즐거워 하셨다. 내가 아내의 손을 잡고 아내의 방으로 가는데, 삼돌이가 아까 말썽을 일으킨 조랑말 고삐를 잡고 내 방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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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

즐거운 명절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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