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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覲親)
1
"내 이른 저녁 해놓을 테니 처남도 만나 보시게. 너도 동생들하고 할 얘기 있으면 하고."
"네, 장모님!"
장모님의 축객 령에 나와 아내는 안방을 나왔다.
내가 대청마루에 서니 처남과 처제들이 마당에 선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거 무슨 동물원의 원숭이도 아니고........'
"와, 형부가 어려서 그렇지 생기기는 되게 잘 생겼다. 그치?"
큰 처제의 말에 막내처제는 얼굴만 붉힐 뿐 말을 못했다. 내심 시집 간 언니가 부러운 모양이었다. 서있는 중에 약관은 넘어 보이는 청년이 주저주저 나에게 말을 붙여왔다.
"서출이라 처남이라 부를 수도 없는 처지지만 약주는 좀 하시는지요?"
"꼬마가 마시면 얼마나 마시겠습니까 만은 몇 잔은 합니다."
"잘 됐네요. 사랑채로 가십시다. 어머니가 약간의 안주와 함께 술을 준비해놨습니다."
자신의 친어머니를 말하는 것이리라. 아무튼 그의 말에 나는 아내를 힐긋 바라보고 대청마루를 내려왔다.
"너무 마시지 마세요. 서방님!"
아내의 잔소리가 내 뒷꼭지를 때렸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하고, 멀찌감치 서 있는 흥정이 형을 불러서 함께 갈 것을 청했다.
"같이 가십시다."
"네, 가주님!"
나와 윤 흥정은 서출의 큰처남을 따라 안과 밖으로 나누어져 있는 바깥사랑채로 향했다.
"간보기 위한 것이니 너무 많이 마시지 마세요."
흥정이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나이 벌써 올해 스물셋으로 결혼한 지 꽤 되어, 딸과 아들 하나씩을 두고 있는 가장이기에 이런 충고도 하는 것이리라.
이윽고 나와 흥정이 사랑방 안으로 들어가니 서출의 삼형제가 모두 모여 있었다. 우리 집안과 어쩌면 이렇게 집안 내력이 비슷한 지, 이 집도 서출들이 오히려 나이가 많았고, 본처에서 난 처남은 나이 상으로 제일 어렸다.
그러니까 이 집도 정실에서 손이 귀했다가 그나마 딸만 연달아 셋을 낳고 밑으로 아들을 낳은 모양이었다.
"한 잔 하세요."
먼저 내 잔에 술을 가득 따른 큰 처남이 차례로 자신과 동생들을 소개했다.
"흡(吸), 보(保), 승(承)입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모두 외자로 김 흡, 김 보, 김 승이라는 이야기였다.
"내 잔도 한 잔 받으세요."
"말씀 낮추세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럴까?"
"네."
이때 문이 살짝 열리며 본처에서 난 즉 아내의 막내 동생이 되는 막내처남이 들어왔다. 얼굴이 상기된 게 아직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듯 했다. 나이는 나랑 동갑인데 하는 짓을 보면 나랑은 천양지차였다.
"거기 앉지."
"네, 매형!"
조신하게 말하고 한쪽에 의젓하게 앉는 김 급(金 汲)이었다.
나는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논은 몇 마지기나 되오?"
"열다섯 마지기 입니다."
"밭은?"
"약 천 평됩니다."
"그것 가지고는 이 대식구가 먹고살기 어렵겠군."
"그래도 굶지는 않고 빠듯합니다."
"흐흠.........!"
침음하던 내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인근에 논이나 밭이 내놓은 것이 있나?"
"네,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알아보면 있을 것입니다."
"매형! 우리 논 사주시게요?"
막내처남이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내게 물었다.
"거, 눈치는 되게 빠르네. 들었겠지만 우리 집안이 굉장히 부자야. 한해 십만 석도 넘게 한다고."
나는 순수한 아이가 되어 자랑을 했다.
"와........! 들은 것보다도 훨씬 부자네요."
나의 말에 처남만 감탄한 것이 아니라 서출의 처남들도 눈이 휘둥그래져 다시 한 번 내 위아래를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내가 달라질 질 것도 없지만 나는 으스대는 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막내처남도 나한테 잘 보이라고. 그러면 누가 알아? 자다가도 떡이라도 하나 생길지?"
"쳇........!"
기대를 했다가 내 말끝이 평범하게 끝나자 실망한 투로
'쳇. 쳇!'
거리는 막내처남이었다.
이후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기 시작을 했는데, 작정을 했는지, 서출의 세 처남이 번갈아가며 내게 술을 권하는 바람에, 나는 한동안 고역을 치러야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아내가 등장했다.
"아이고, 술내야! 그런데 이게 몇 잔이야? 하나, 둘, 세 잔씩이나? 너희들 남의 신랑 잡을 일 있어?"
나는 안경을 쓰다 못해 그들의 잔 세 개가 모두 내게 와 있기 때문에 하는 아내의 잔소리였다. 아무튼 아내의 쓴 소리에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서출의 처남들이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신분제가 불합리한가. 현대를 경험한 나로서는 몇 번이고 놀라는 장면이었다. 아내가 그들을 한 번 더 째리고 말했다.
"얼른 술상 치우고, 식사하러 가세요."
"알았어."
내가 일어나는데 갑자기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했다.
"저 봐, 저 봐! 얼마나 먹였으면........ 누구에게 업히던지 하세요."
"당신이 날 업지?"
"이 이가 정말........!"
나를 흘기며 핀잔하는 아내지만 아무도 없었으면 분명 나를 없어줬으리라 생각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 잠시 발이 저려서 그런 것뿐이니."
그렇게 말하고 내가 당당히 걸어가자, 세 처남의 얼굴이 놀람으로 일그러졌다.
안방에 가니 독상이 세 개 놓여있고, 나머지는 교자상에 한꺼번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상을 보아하니 서출들의 자리는 아예 없었다. 예로부터 양반은 겸상이 없고 독상을 받았다. 해서 척보니 알만했다.
독상 셋 중 하나는 할머니 것일 테고, 하나는 장인 것, 나머지 하나가 내 것일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장모님이 독상 중에서 제일 끝을 지정해주시며 말씀하셨다.
"거기 앉으시게."
"장인어른은 요?"
"언제나 느려 터져서 나 아니면 밥 한 그릇 제대로 못 얻어자실 양반이지."
장모님이 장인 흉을 보고 있는데, 그때서야 나타나는 장인어른이셨다.
말이 없어도 장인어른은 자신의 자리를 잘 찾아가셨다. 하긴 하나 남은 독상이니 당연할 터였다.
"우와.........! 씨암탉이네요!"
"그럼, 누가 왔는데, 예로부터 사위는 백년손님이라고 하지 않던가? 사위에게 잘 해주어야 사위가 내 딸에게 잘 해줄 것 아닌가."
"안 그래도 따님에게는 잘 해줍니다. 그렇지? 여보?"
"호호호.......!"
"헤헤헤.......!
내가 눈까지 찡긋하자, 장모님은 물론 처제들과 처남까지 박장대소를 하는데, 아내만이 나의 말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눈을 흘겼다.
그 와중에 내가 건너편 교자상을 보니, 할머니와 장인어른이 각각 닭 반 마리씩 차지하고, 내게 한 마리. 그러나 저쪽 상에는 닭국물만 가지고 공동으로 떠먹고 있었다. 이 모양을 보니 뭔가 속에서 욱하고 치밀었다.
그래서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 집 하인 삼돌이가 밖에서 내 명을 대기하기 위해 저녁도 못 먹고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흥정이 시킨 모양이었다.
"삼돌아!"
"네, 도련님!"
"가서 흥정이 보고 문방사우 가지고 안방으로 오라고 해라!"
"네, 가주님!"
그가 급히 어느 곳으로 달려갔다.
지시를 마친 나는 방으로 들어와 일어난 김에 자리에 앉지 않고 내 상에 놓인 닭을 그대로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양 다리를 잡고 반을 쭉 찢어, 닭국물만 있는 큰 놋대접에 반 마리를 그대로 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저만 먹으려니 안 넘어가서요. 진짜 저희 부자거들랑요. 닭고기 정도야 원하면 매일 먹을 수 있어요. 필요하면 소도 잡아먹습니다. 그러니 제게 다시 권하지 말고 그냥 드세요."
"아이고, 우리 사위 인정도 많네!"
나의 말에 장모님이 좋아라 하시는데 장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거 한 마리 더 잡던지 하지........."
"닭은 하늘에서 거저 떨어져요. 없는 살림에........"
이때 멋도 모르고 흥정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고 사돈총각도 같이 식사를 할 걸."
급 당황한 흥정이 얼른 장모님의 말을 받았다.
"아, 아닙니다. 가주님이 갑자기 불러서요."
"잘 왔어. 잠시 거기 앉아봐."
"네, 가주님!"
"장인어른! 요새 논 한 마지에 얼마 할까요?"
나의 물음에 장인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잘 모르네."
"저 양반이야 글이나 읽을 줄 알지, 아는 게 있어야지."
"장모님은 아세요?"
"나도 안살림이나 할 줄 알지, 바깥일은 잘 모르네."
"할 수 없군."
낮게 중얼거린 내가 흥정을 보고 명했다.
"백지어음으로 드려."
"네?"
"내 말뜻 못 알아들어?"
"그게 아니고, 백지어음이면 금액을 무한정 써넣을 수 있는 것인데........"
"장인어른, 한 삼십 마지기면 처갓집식구 배 안 곯고 지낼 수 있겠죠?"
나의 말에 장인은 물론 장모마저 벙 쪄서 할 말을 잊은 표정이었다.
"부족한가요?"
"아, 아닐세! 단지 10마지가만 더 있어도 우리식구로서는 충분하네."
"에이, 열 마지기 갖고는 안 되지요. 제 말대로 한 삼십 마지기 장만해서 인동에서는 떵떵거리고 사세요. 그래야 제 안식구도 친정 걱정 않고 제게 잘 할 것 아니에요. 이 일이 따지고 보면 저를 위한 일이니 사양은 마세요."
나의 말에 장내는 숙연해져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때 장인이 헛기침을 몇 번 하시더니 말씀하셨다.
"험, 험........! 사위가 체신은 작아도 배포가 여간 아닐세. 하지만 너무 많네. 한 이십 마지기만 가져도 부근에서는 큰 소리 치고 살 수 있을 정도는 되네."
사양을 할 줄 알았더니 그것은 아니었다. 만약 사양하는 말을 했더라면 오늘 밤에 장모님께 모르긴 몰라도 되게 깨지실 게다.
"제가 몇 번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집안의 한 해 거둬들이는 소출만 연 십만 석이 넘습니다. 그러니 삼십 마지기 정도야 조족지혈이지요. 그러니 너무 사양하지 마세요. 저도 이 기회에 처갓집에 생색 한 번 내게요."
"허허, 그것 참.........!"
입맛을 쩍쩍 다시는 장인이지만 기분은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이셨다.
"아이고, 사위! 내 사위 잘 얻은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배포까지 큰 줄은 몰랐네. 아무튼 사위가 그렇게 말하니, 사위 말대로 농토 좀 장만해서, 주변에 큰소리 떵떵 치면서 한 번 살아보도록 하겠네."
"고맙습니다. 장모님!"
누가 고마워해야 되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장모님에게 감사를 표하고, 급히 흥정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흥정이 한지에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흥정이 채 먹물이 마르지 않은 한지를 후후 불며 내게 가져왔다.
내용을 읽어보니 최종 금액만 적지 않고 어음으로서의 요건은 모두 갖춰져 있었다. 그래서 내가 물정모르는 장인에게 어음을 펼쳐들고 설명을 해주었다.
"장인어른, 이 공란에 금액만 적어 넣으시면 어음으로서의 자격 요건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사용 시 주의할 것은 상대방에게 건넬 때에는 반드시 이를 반을 짜게, 반은 상대에게 주고 반은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마포나루에 있는 저희 '금와상단(金蛙商團)에서 금이든 은이든 요구하는 대로 내주신다고 하시면 됩니다. 아셨죠?"
"잘 알겠네. 아무튼 고맙네!"
"별 말씀을 요. 그리고 제가 한 가지 더 선물을 드린다면 장인어른의 서자들도 제가 먹고 살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해주고 갈 테니까, 그들에 대해서도 앞으로는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정말인가?"
"두고 보시면 압니다. 며칠 내로 그렇게 될 겁니다."
"하하하........! 이거 정말, 딸자식도 잘 낳고 볼 일이고만. 여보! 술 가져와!"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뭐가 한 가지 빠졌는가했더니, 술이 빠졌네그랴."
급히 말씀하시며 황망히 부엌으로 나가시는 장모님이셨다.
이때였다. 아내가 내 귓가에다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여보! 너무 너무 고마워요!"
어느새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그런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 같은 복덩어리 미인을 얻었는데, 내 백마지기라도 사 줄 수 있어. 그러니 어서 눈물 씻고 밥이나 먹어!"
"여보! 흑흑흑..........!"
이 말이 아내를 더 울릴 줄 나는 미처 몰랐다.
갑자기 내 무릎에 엎어져 우는 아내 때문에 분위기가 묘해졌다.
그래서 내가 아내에게 속삭였다.
"고마우면 당신이 밤일을 잘 해주면 되잖아."
"뭐예욧? 참 내........! 호호호.........!"
기어이 웃음을 터트리는 아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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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고맙습니다!
^^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행운과 기쁨이 가득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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