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210화
이야기를 매듭짓는 방법(2)
“인간의 몸으로 인빅투스에 대적할 수 있다니. 너무 오래 살아서 진귀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네요.”
바르베라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백주월의 앞에 섰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지만, 그 눈빛에 깃든 투기는 줄어들긴커녕 더욱 짙어 보인다.
이미 승패는 결정되었다.
아무리 백주월이라고 해도 인빅투스 다섯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여 당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마저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인빅투스의 총정관인 바르베라의 관심을 끌어냈으니 말이다.
뫼니에를 비롯한 인빅투스의 흡혈귀들이 백주월의 숨통을 끊기 직전. 바르베라는 그들에게 대기를 명했다.
“인간이여, 제가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바르베라가 그리 묻자, 백주월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얼굴을 잠시 훑어보다 농담처럼 말을 내뱉었다.
“좀 비싸 보이는데……. 공교롭게도 고급 창녀를 살 돈은 가지고 오지 않았어.”
“저는 인간들의 그런 저급한 농을 좋아하지 않죠.”
바르베라의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빅투스의 흡혈귀가 발끈하여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바르베라가 손을 뻗어 저지하며 말했다.
“저는 인빅투스의 총정관이자, 첫 번째 딸 카르메네르의 차녀이기도 한 바르베라입니다. 귀공의 이름을 묻고 싶습니다.”
“백주월이다.”
“귀공의 이름은 분명히 기억했습니다. 인간의 연약한 몸으로 인빅투스에 대적했던 그 경이로운 업적과 마찬가지로.”
비록 적이었지만, 어째서 이 섬을 침공해 온 것인지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상황.
게다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바르베라의 머릿속에서 백주월을 죽인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흡혈귀인 바르베라의 시점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 진귀한 경험은 없었으니까.
예를 들자면 개미 한 마리가 인간 남성 다섯을 상대로 수십 분 이상 싸우며 버틴 것이다. 그런 개미를 그냥 짓밟아 죽이는 인간이 없듯, 바르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처를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더욱 정진하길 바랍니다. 지금보다 더 자극적인 유희를 기대할 만할 것 같으니까요.”
“그 망할 녀석이 중간에 어디로 튀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겼어.”
“아, 함께 있던 그 전쟁 군주?”
바르베라는 짐짓 흥미롭다는 듯 되물었다. 백주월은 혀를 차며 말을 아꼈다.
‘젠장, 빌어먹을 놈이 갑자기 어디로 간 거야?’
어쩌면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블러드 링크만 이어져 있었어도, 인빅투스의 회복 한계치를 뛰어넘는 화력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누자베스가 사라지며 링크가 끊어졌고, 이렇게 허무하게도 백주월이 패배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 말은 흘려들을 수 없군요.”
바르베라가 처음으로 백주월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 다정하거나, 상냥해 보이는 미소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금 그 전쟁 군주만 붙잡아 온다면 저의 천하무적단에 비견될 수 있다는…….”
“당연하지, 얼간아. 그 녀석은 충전만 제대로 해주면 은하계를 상대로도 무쌍을 찍을 수 있는 인간 병기라고.”
바르베라의 말에 대답한 건 백주월이 아니었다. 분명 귀에 익은 목소리, 하지만 어째선지 그 어투가 낯설었다.
바르베라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고귀한 존재가 어울리지 않게도 짓궂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저런 악동 같은 웃음을 지은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 이전에 지을 수 있었던가? 그런 의문이 들 만큼 어울리지 않았다.
“대모…… 님?”
“아, 스칼렛? 미안한데 그 녀석은 먼저 쉬고 있어. 나중에 기회 봐서 다시 데려와야지, 아직 은퇴할 만큼 노쇠하진 않았잖아.”
“예? 대모님, 그게 도대체 무슨……? 예? 예?”
“뭐, 설명하자면 기니까 대충 그렇게 이해하고 있고.”
외형은 분명 스칼렛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말투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마치 내용물이 뒤바뀐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스칼렛과 누자베스가 서로의 자리를 바꿔치기하며, 정작 의자에 앉아야 할 사람을 바닥에 주저앉힌 것 같은 상황이다.
누자베스는 주저앉아 있던 백주월의 손목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혈액을 통해 다시 링크를 걸었다.
그러자 마치 시간을 되감는 듯 빠르게 백주월의 부상이 회복되어 갔다.
백주월은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야, 설마 비올리네가…….”
“대충 모티브만 따온 거야! 모티브만! 표절이 아니니까 대충 넘겨.”
백주월은 이제야 뒤늦게 비올리네의 원형이 스칼렛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스칼렛을 만난 적이 없었기에 모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 그럼 마지막 정리에 나선 루칸다가 돌아오면 상황을 매듭지어 보자고.”
누자베스는 백주월의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멋대로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고 입술 사이에 끼워 넣고 불을 붙이려던 찰나.
“…….”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담배를 뱉으며 손끝으로 꺾었다.
“왜 안 피우는데?”
“이 자식은 형님이 담배 피우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어? 애 낳으려고 끊는다 왜! 여자 돼서 애 낳으려고 끊는다고! 불만 있냐?”
누자베스는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리며 쏘아붙인 뒤 크게 한숨을 토해냈다.
‘빌린 몸이니까 당분간은 소중하게 써줘야지.’
그래야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잔소리를 덜 듣지 않겠나? 그런 먼 훗날의 상상을 떠올리며 누자베스가 전 병력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 * *
“어째서, 어떻게…… 어떻게……!! 완전히 동일하게 복제된 위상에…… 개입할 수 있는…… 쿨럭!”
네비올로의 아공간을 찢고 난입해 온 건 루칸다였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난입과 동시에 네비올로의 심장을 꿰뚫었다.
속도와 정교함.
그 모든 요소가 흠잡을 곳이 완벽했다.
만약 이런 존재와 조우하게 된다면, 대다수는 같은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그림자 시해자…… 윤왕……!!”
“오, 잘 알고 있군.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지 않았나? 윤왕의 영역에서 어슬렁거리다 크게 혼쭐이 날 수도 있다고 말이야.”
루칸다는 킬킬 웃으며 네비올로의 가슴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냈다.
네비올로는 검붉은 피를 뿜어내며 지면에서 바둥거렸다.
“이런 조잡한 아공간의 격벽을 찢는 건 일도 아니지. 이딴 것이 혈족의 여왕을 자처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르시안의 핏줄도 슬슬 끝물이 다 빠진 게 아닌가?”
“아, 아아아……!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어째서어째서……!!”
행복에 닿을 수 있었다.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행복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수천, 수만 년 이상을 가슴속에 품고 있던 존귀함을 손에 넣기 직전이었다.
네비올로는 이 세상 전부를 포기하더라도, 자신의 대모인 메를로를 품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그 염원을 거의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예상도 못 한 윤왕 루아 카날다의 난입에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린 것이다.
“나는…… 나는,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대모님…… 아아, 대모님…….”
“네비올로……!!”
심장이 꿰뚫린 딸을 목격한 카르메네르가 다급한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아무리 욕망에 미쳐 자신에게 검을 겨눈 자식이라고 해도, 네비올로가 소중한 딸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다가오지 마! 네가 모든 걸 망쳤어…… 네가…… 네가, 처음부터 내게 대모님을 허락했다면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다고……!!”
네비올로가 혈액을 토해내며 카르메네르의 손을 뿌리쳤다. 붉게 충혈된 두 눈에는 이미 연민도 뭣도 없었다.
카르메네르가 루칸다에게 자비를 구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섰다. 나르시안의 첫째 딸이라는 신분으로서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인 적도 없었지만.
이대로 딸을 잃는 것보다는 모든 자존심과 긍지를 버리는 게 나았다. 그렇게 카르메네르가 입을 열기 직전.
“그래, 그렇게 추락했군. 그렇게나 나락까지 곤두박질쳤다, 이 말이군.”
루칸다가 네비올로를 응시하며 그렇게 말했다. 윤왕 루아 카날다의 천칭 저울이 확실히 기울은 순간이었다.
“삶의 밑바닥에 온 걸 환영한다, 네비올로. 더러운 짐승의 삶이 어떤 식으로 끝나는지 알려주는 게 나의 유일한 의무이자 즐거움이지.”
용서받을 권리를 박탈당한 짐승이 추락하는 나락이란. 윤왕 루아 카날다의 칼날이 기다리는 아비지옥뿐이었다.
그렇게 루칸다의 흑요석 검이 섬뜩한 푸른빛을 머금었고, 단말마와 오열하는 울음 소리가 하모니를 이뤘다.
* * *
처음에는 대부분이 생소했다.
처음 보는 방의 풍경과 난생처음 보는 침구류.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모습이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생소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늘 사용했던 것 같은 이불과 침대에서 낯설지 않은 체취가 남아 있다는 것뿐이다.
한주호는 그런 감상을 떠올리며 며칠 동안 이쪽 세계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홀로 스마트폰이란 것의 작동 구조를 깨달았을 때는 저도 모르게 쾌재를 내질렀을 정도다.
쾅쾅쾅!
“시끄러워! 혼자 사냐! 혼자 살아!! 잠 좀 잡시다, 잠 좀!”
“미, 미안하게 됐네…….”
물론 그 덕분에 옆방에 사는 이웃에게 한 소리를 들어먹긴 했지만 말이다.
이 거주 공간은 성냥갑만큼 작은 주제에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한주호가 느낀 첫인상은 ‘닭장’이었다.
어째서 이쪽 세계선의 인간들은 이런 닭장 같은 것을 지어 놓고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한주호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누자베스에게 해야 할 일이 남은 것처럼 말이다.
한주호는 집에 남아 있는 식료를 적당히 섭취하며 며칠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작동 방법을 터득했다.
느리지만, 천천히 꾸준히 노력하고 싶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박태준 팀장이란 사람에게서 드물지 않게 연락이 계속됐다.
‘한 작가님 요즘 말투가 왜 그래요? 뭐 잘못 먹었나?’
‘아, 아니…… 그런 게 아닐세. 요즘 원고 작업에 너무 열중해서 분위기가 옮은 게 아닐까 싶네.’
‘드디어 돌아버리셨나?’
이런 느낌으로 어찌저찌 새로운 원고를 타이핑하는 작업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한주호는 한참 동안 모니터 앞에 앉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런 건 써본 적이 없어서 도대체 어찌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구만…….”
생각 이상으로 골치 아픈 작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아픈 것과 별개로 어쩐지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가장 소중했던 사람이 지냈던 일상을 이렇게나 추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한주호는 책상에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는 재떨이와 담배를 모조리 쓰레기통에 버린 후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크게 숨을 내쉰 후 요령을 떠올려 봤다.
먼저 기억을 토대로 큰 줄기를 정했고.
그다음은 누자베스답게 나아가면 될 것 같았다.
일단, 그래 일단은 누자베스였다면 이 이야기의 첫 문장을 어떻게 썼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의외로 쉽게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 미소녀 편집자요? 하핫, 작가님, 저희 매니지먼트는 완전 남탕인데 미소녀 편집자가 어딨습니까? 개소리…… 아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시고 다음 원고나 빨리 주세요.
한주호는 거기까지 미끄러지듯 타이핑한 후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