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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209화 (209/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209화

    이야기를 매듭짓는 방법(1)

    스칼렛은 복도를 걸었다.

    적막이 내리 앉은 복도의 위로 청명한 구두 굽 소리가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네비올로가 카르메네르와 카베르네를 처리하기 위해 나선 사이, 스칼렛은 폭풍 직전의 고요를 만끽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포성이 들려오고, 그 포성과 적나라한 파열음은 오케스트라의 서곡처럼 들리기도 했다.

    누자베스가 드디어 이 이시카니 섬에 도착한 것이다. 그런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스칼렛은 창문 앞에 서서 바깥의 풍경을 응시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스칼렛 : 주군, 지금은 내 목소리가 들리나?]

    [누자베스 : 응? 어, 스칼렛? 자, 잠깐! 백주월 이 개자식아……! 머리통 으깨질 뻔했잖아! 으악……!? 스칼렛? 뭐라고 했어?]

    아무래도 누자베스는 제대로 대화할 여유도 없을 만큼 바쁜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최강이라든가, 무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전혀 과장이 아닌 흡혈귀 다섯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스칼렛은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스칼렛 : 주군과 만난지 꽤 긴 시간이 흘렀네. 이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자면 아주 잠깐의 반짝임처럼 보이는 찰나였을 테지만.]

    그 찰나는 영겁과 닮은 무수한 기억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풍경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누자베스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시답잖은 농담으로 눈물을 감춘 채,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누자베스는 어찌 되어도 좋은 사실만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살아간다는 것과 죽어간다는 것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든 삶이 필연적인 최후의 종착역을 향해 나아간다고 해도, 그 발걸음 소리조차 같을 수는 없다고. 그런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스칼렛 : 주군 만큼 못 미더운 남자도 드물었지. 검술도, 혈술에도 재능이 없었고 지략과 모략에 재주를 지닌 것도 아니었네. 그렇다고 용맹하기는 했나? 아니, 주군은 언제나 눈물이 많은 울보였지 않나.]

    누자베스에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스칼렛은 창틀에 걸터앉아 화염이 꽃처럼 피어오르는 야경을 응시했다.

    [스칼렛 : 그런 주제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짐을 짊어지려 하다니.]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누자베스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스칼렛에게도 아주 약간은 보이기 시작했다.

    주저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눈물을 흘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겁쟁이였던 만큼 말이다.

    확정된 것은 잿빛의 미래와 결말이었고, 모든 삶과 과정이 필연적인 파멸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등을 돌리고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뇌리에 새겨진 죄책감을 모르는 척할 수 있을 만큼 뻔뻔했다면 말이다.

    시답잖은 거짓말과 농담을 조악하게 뒤섞은 픽션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이 그에게 메마른 냉소를 건넬 뿐이었다면 말이다.

    화약 향을 머금은 밤바람이 스칼렛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스칼렛 : 주군 알고 있나? 우리에게 용서받을 권리가 필요치 않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로 반드시 차라투스트라의 삶을 추구할 필요도 없는 것일세.]

    루칸다는 누자베스에게 용서받을 권리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쳤고. 갈라우드의 영주 리제와 왕정파의 용사 류시혁이 각주를 덧붙인 것뿐이다.

    그리고 이제야 가까스로 그런 삶의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백주월과 만나게 되며 누자베스는 나란히 걷는 길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딘 것이다.

    보답 따윈 바랄 수도 없고, 손익을 따지자면 도저히 선택하기 어려운 길목으로 나서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란히 걷는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스칼렛 : 주군에겐 다른 선택지도 있었을 것일세. 용서받을 권리도, 초극도 무연한 그런 삶을 추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네. 괜찮다면 이 늙은이에게 가르쳐주겠나? 그 무엇이 주군을 선명한 지옥으로 몰아붙이는지.]

    잠시 정적이 흘렀고, 이내 누자베스의 대답이 돌아왔다.

    [누자베스 :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스칼렛. 밤이 지나면 아침이 찾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이뤄지는 섭리의 일부일 뿐이잖냐.]

    [스칼렛 : 그 대답은 조금 헬베르카답군.]

    스칼렛이 짐짓 비꼬는 어투로 웃으며 얘기하자, 누자베스의 목소리에도 쓴웃음이 묻어났다.

    [누자베스 : 내일 아침이 오면, 네게 그런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 그토록 어두웠던 밤의 기억이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거짓말밖에 재주가 없는 내가 네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란 그렇게나 거짓투성이었을 뿐이라고.]

    동이 트고, 이 밤의 하늘이 붉게 물들쯤엔 나란히 앉아 그런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어울리지 않게도, 낯부끄럽게도 손을 마주 잡고 나란히 앉은 채 담담히 그런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용서받을 권리가 없어도.

    초극을 이뤄 초인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충분히, 아니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말이다.

    그것이 누자베스가 스칼렛에게 돌려줄 수 있는 최후의 답안지였다.

    그 답 안에 채점을 하는 건 오롯이 스칼렛의 몫이었다.

    스칼렛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열었다.

    [스칼렛 : 이제는 이 늙은이의 품에서 졸업해도 되겠네.]

    세간에서는 메를로가 오르키아나에게 초극을 종용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어쩌면 메를로는 오르키아나에게 그러한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말이다.

    초월적인 존재의 구원과 용서가 없더라도, 스스로 초극을 이뤄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지 않더라도.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다고.

    스칼렛은 창틀에서 일어나 품고 있던 단검으로 자신의 손목을 깊게 베어냈다.

    절개구에서 솟구친 혈액이 복도에 웅덩이를 만들기 시작했고, 스칼렛은 그 중앙에 담담히 섰다.

    [스칼렛 : 주군, 나의 진명을 아직도 듣고 싶나?]

    웅덩이가 된 혈액은 선홍색의 빛을 흩뿌리며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스칼렛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스칼렛 : 나는 그 무엇도 아닐세. 주군이 나를 스칼렛이라 불러줬을 때부터, 나는 그저 주군의 곁에서 스칼렛이었을 뿐이네.]

    흡혈귀는 그들의 진명을 철저하게 숨기며, 시대와 지역에서 관측된 현상으로써 그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렇다면 스칼렛은 마지막 순간에 누자베스에게 관측된 현상으로 스스로를 정의했다.

    그것이 스칼렛이 누자베스에게 남겨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 하하…… 여기까지 궁지에 몰린 건 오랜만이라 신선하네…… 아윽!”

    복도의 모퉁이에서 피투성이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왼쪽 팔이 절단되어 있었고,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흔적이 몸의 곳곳에 남아 있었다.

    여자는 스칼렛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피르에나는 숨을 헐떡이며 벽에 몸을 기댔고, 이내 벽에 핏자국을 남기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용사가 위협적이었을 뿐이야. 가까스로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피르에나는 이 세계에서 본 적이 없는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아마도 누자베스라면 피르에나가 입고 있는 옷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피르에나의 목에 걸린 사원증이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원증에는 ‘임수정’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여우는 굴의 출입구를 여러 개 파놓지. 누자베스 경도 여우만큼은 머리를 굴릴 줄 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네…… 하아…… 거친 방법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하나씩 조심스럽게 확인하려면 끝이 없겠어.”

    피르에나는 그런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바로 실책을 검토하고 다음 작전을 떠올리고 있었다.

    “세계선을 지우는 건 이후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 모르니까 되도록 피하고 싶었는데. 하나씩 소거해가며 본체를 찾아내지 않으면…….”

    스칼렛은 제자리에 선 채로 피르에나를 내려다봤다. 피르에나도 그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잠시 입을 멈추고, 스칼렛 쪽을 바라봤다.

    “뭐 하고 있어? 이 육체가 소멸되기 전에 전이시켜야 되니까 준비를…….”

    눈빛이 이질적이었다.

    피르에나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혹시 아직 자각이 안 된 개체인가? 나는 너야. 네가 나인 것처럼.”

    그것이 거짓 없는 진실이었지만.

    스칼렛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직도 자신이 여우굴 속을 헤매고 있다는 자각이 없는 모양이로군.”

    “무슨 헛소리를…… 당장 전이를 준비해! 나는 여기서 끝날 수 없어……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피르에나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거의 다 망가진 몸을 이끌고 바닥을 기어가며 윽박지르듯 목소리를 토해냈다.

    “유감이지만 이 흐름 속에선 다른 이야기가 될 걸세. 나는 너와 분명히 다른 길을 걸어왔고, 다른 풍경을 목격했고, 다른 꿈을 품었으니 말이야.”

    “누자베스? 그 위선자가 어떻게 꼬드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다수의 최대공리만이 정의라는 사실은 변치 않아. 그게 이 세상의 섭리라고! 네가 나라면 이해하고 있겠지?”

    “나는 주군의 안티테제로 존재하는 삶을 바라지 않네.”

    “헛소리…… 헛소리 따윈 집어치워! 당장 육체를 전이…… 아, 안 돼…… 안 돼!!”

    그 직후 스칼렛의 혈술이 발동됐다.

    메를로의 전문 영역은 ‘관념’의 조작이다.

    게다가 동위의 위계를 지닌 상속 신분의 흡혈귀 둘이 네비올로의 아공간에 갇힌 상태라면?

    메를로의 능력은 생과 사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것 이상의 위력을 지닐 수 있었다.

    스칼렛은 피르에나를 응시하며 머릿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상념을 지워나갔다.

    ‘먼저 기다리고 있겠네.’

    그리고는 그녀의 입에서 이 흐름에 속한 세상 전체를 조작할 만큼의 위력적인 ‘상위어’가 토해졌다.

    “나는…….”

    “그만둬, 그만두라고!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알고……!”

    피르에나가 지면을 필사적으로 기어가며 스칼렛을 저지하려 했지만.

    이미 스칼렛은 결의를 끝마친 뒤였다.

    “그래, 내가 누자베스다.”

    시야가 뒤흔들렸고, 새하얗게 번진 시야가 점차 회복되자.

    내 눈앞에 피투성이가 되어 새하얗게 질린 피르에나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셔 천천히 내뱉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왜 그렇게 울상이야? 아직 게임은 시작도 안 했는데.”

    내 성격이 원래 그렇지 않나?

    싸움을 걸어오는 상대에겐 철저하게 대응해 주는 게 내 스타일이다.

    설령 그 상대가 외신에게 불멸과 영원을 약속받은 존재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네 의지가 꺾일 때까지 이 싸움을 계속할 용의가 있다만. 넌 어떨까, 피르에나?”

    피르에나는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그렇게 오열하듯 웃더니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만인을 위한 대의가! 그 더러운 수작질에 꺾일 리…… 큭!”

    푸욱!

    피르에나의 가슴에서 흑요석 검이 솟구치듯 튀어나왔다.

    접근의 기색을 눈치채기도 전이었다.

    피르에나의 뒤에서 나타난 루칸다가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이번엔 안 놓치겠다고 하지 않았나?”

    피르에나는 루칸다 쪽을 돌아보며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봤지만, 입을 몇 번인가 뻥긋거리다 축 늘어졌다.

    루칸다는 검을 뽑은 뒤 내 쪽을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스칼렛인가? 설마 그게 아니라면…….”

    루칸다는 내게 그렇게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이든.”

    누자베스에게는.

    아니, 내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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