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206화 (206/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206화

    이타노 서커스(2)

    제8신분.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간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종은 죽었거나, 멸종했을 테니 말이다.

    한 자릿수의 신분을 지닌 엘더 뱀파이어.

    원죄의 아버지 나르시안의 혈액 그 원형을 물려받은 고혈종에 속한다는 의미다.

    반 르낙시아의 존재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강대한 능력까지 폄하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스카디는 제8신분의 엘더 뱀파이어이자, 리덴베르크의 수석 정무관의 자리를 맡고 있는 고위급 혈족이다.

    ‘어머니의 뜻이 아니었다면…… 이런 촌구석까지 올 이유도 없었다.’

    스카디에게 바체트 열도란?

    솔직히 짜증이 치솟을 만큼 시답잖은 촌동네였다.

    대륙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바체트 열도는 극동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전략적 가치도 없었으며, 구태여 가치를 따지자면 먼 과거 윤왕 ‘루아 카날다’의 영토였다는 것 정도뿐이다.

    그리고 이런 촌동네에 서식하는 마물이나 인간들의 수준은 뻔했다.

    제8신분인 스카디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그의 종복들 선에서 충분히 정리될 정도 아닌가?

    고블린 한 마리.

    모험가처럼 보이는 인간 한 마리.

    그리고 아일라드의 피조물인 하이브 마인드 한 마리다.

    이런 잔챙이들을 스카디가 직접 상대하게 됐다는 상황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뜻만 아니었다면 이 스카디의 손을 직접 더럽힐 일도 없었을 터. 마지막 자비를 베풀 때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길 바라지. 하지만.”

    스카디의 시선이 누자베스를 향했다.

    저 하이브 마인드만큼은 곱게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대모님의 이름을 경솔히 입에 담은 죄는 확실히 묻겠다.”

    메를로가 상속 신분의 진명이 아닌 현상명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분이 지칭될 수 있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불경한 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을 맛보여준 후 천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일 것이다.

    누자베스는 뚱한 표정으로 스카디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저 새끼 저거 아까부터 계속 엄마엄마거리면서 엄마만 찾는데, 마마보이야? 그렇게 엄마 찌찌가 그리우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집에 돌아가서 빨아 이 자식아. 효도하는 법 모르냐, 어?”

    그 저질스러운 농담이 웃겼는지 백주월이 킬킬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미친 새끼. 너 이거 원고로 써서 소설 만든다면서. 도대체 어디서 연재하려고 그런 말을 하냐.”

    “코코아페이퍼?”

    “돌았냐. 그딴 저질스러운 대사나 치는데 코코아페이퍼가 대가리에 총 맞았다고 연재 허락해 주겠냐고.”

    “나도 몰라, 정신병자야. 그럼 대가리에 총 갈기고 연재하면 되겠네.”

    “누자베스 넌 진짜 병신이다…… 네 담당자가 불쌍하잖아. 여자 편집자면 너 그냥 성희롱으로 직통 신고당할 텐데.”

    “내 담당자 가랑이에 털 숭숭난 아저씨야 이 새꺄. 아니, 여자일 수도 있네.”

    “슈뢰딩거의 편집자야 뭐야.”

    “비슷한 거겠지, 알게 뭐야.”

    누자베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마도 여자 편집자라면, 지금쯤 꽤나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며 말이다.

    ‘이번엔 시간 끌기에 불과하겠지만, 앞으로 더 재밌게 해주지.’

    일단은 눈앞에 대치하고 있는 흡혈귀부터 처리하고, 피르에나의 부활을 저지해야만 했다.

    만에 하나 피르에나가 이쪽 세계에서 다시금 육체를 얻어 현화한다면? 지금까지 설계해 놓은 모든 장치와 무대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루칸다, 칼베라를 쫓아라.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이쪽의 패를 하나나 둘쯤은 보여줘도 상관없겠지.”

    “꽤나 파격적인 결단입니다만.”

    “실존의 영역에서 초인을 상대하게 되는 것만큼은 피해야지.”

    지금까지 피르에나를 방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피르에나가 불완전한 초극 시험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피르에나가 시험을 끝마치고, 초인의 자격을 갖춰 강림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는 이미 누자베스가 손을 쓸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났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렌의 병력과 합류하여 칼베라의 포위망을 좁히겠습니다.”

    “일이 꼬이려니까 빌어먹을 일만 연달아 일어나는구만.”

    루칸다가 자리에서 이탈하려는 순간.

    “놓치지 않겠다!”

    스카디가 혈술을 발동시켰다.

    지면에서 수십 줄기의 기둥이 솟구쳤고, 혈액의 기둥은 자아를 지닌 생물체처럼 루칸다를 덮쳤지만.

    “나르시안의 직계 자손 정도는 데려와야 이 루아 카날다의 발을 묶을 수 있지 않겠나?”

    혈액의 기둥이 감옥의 철창처럼 지면에 꽂혔고, 루칸다의 사방을 완전히 차폐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밤하늘을 가로찢는 듯한 은빛의 궤적이 붉은 기둥을 일격에 토막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고블린이었던 루칸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유, 윤왕…… 그림자 시해자……!”

    모습을 드러낸 건 윤왕 루아 카날다였다.

    반 르낙시아의 전설에서나 그 이름을 들을 수 있었던 초월적 존재.

    흩날리는 긴 흑발 사이로 섬뜩한 눈빛이 번뜩였다. 저 예리한 안광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생물은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극소수의 생물을 제외하고 모두다. 윤왕을 눈앞에 두고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나르시안이나 그의 직계 자손들뿐이다.

    “루칸다! 지체하지 말고 당장 쫓아! 놓치면 해고야, 해고!”

    “해고당하면 전에 일하던 직장으로 복직해야겠군요.”

    “전에 일하던 곳에선 사장한테 칼침 놔서 해고당했다며? 복직한다면 받아준다냐?”

    “원래 능력 있으면 칼침 정도는 용서받을 수 있는 법입니다.”

    “……내가 말을 잘못했네. 놓치면 종신 계약이야, 종신!”

    스카디가 발악하듯 루아 카날다를 붙잡아 보려 했지만.

    콰앙!

    거대한 폭발이 스카디의 앞을 가로막았다. 뒤를 돌아보자, 누자베스와 백주월이 투덜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주월아, 형이 빈혈로 쓰러지기 전에 좀 제대로 쏘자.”

    “시끄러워! 시야가 자꾸 겹쳐서 조준하기가 힘들다고.”

    “빌어먹을 이거 블러드 링크는 어떻게 다루는 건지 아직도 헷갈려. 감각신경 공유까지 되는 건 좀 어떻게 하고 싶은데.”

    불완전한 링크 상태의 부작용이었다.

    연결 고리를 통해 혈액을 공급하는 것까진 좋았지만, 누자베스의 혈술 제어가 미숙한 탓에 감각 신경까지 겹치고 있는 것이다.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미각까지 전부 공유되고 있었고. 그 덕분에 시야가 각각 다른 레이어를 겹쳐 놓은 것처럼 어지러웠다.

    그러니 통각은 물론이고 쾌감까지 완전히 공유되고 있는 상황. 게다가 계약의 후유증으로 육체까지 완전히 동일한 ‘하나’로 취급당하고 있지 않나?

    누자베스가 부상을 입으면, 백주월도 똑같은 고통을 느끼며 같은 부위에 부상이 생기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런 패널티를 짊어진 상황에서 제8신분의 흡혈귀 스카디에게 대적할 수 있을까?

    “주월아, 진짜 부탁한다. 형은 여기서 엘프 마누라 얻어서 임신 엔딩 보기 전까진 못 죽는다. 형이 우리 주월이 믿는 거 알지? 이세계 삼촌에 나오는 그런 엘프로 부탁할게 진짜로…….”

    “알았으니까 쫑알거리지 말고 닥치고 있어. 집중해야 되니까.”

    링크의 유지 조건은 물리적 거리가 2미터 이내. 라우터 역할을 맡고 있는 고양이 누자베스를 상처입혀서도 안 되고, 2미터 이상 떨어져서도 안 된다.

    고양이 누자베스의 전투력은 솔직히 기대하기도 힘들다. 물론 누자베스 본체가 와도 제8신분의 흡혈귀를 상대할 때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힘들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시야와 청각까지 뒤죽박죽인 상황이다. 확실히 백주월에겐 핸디캡뿐인 전장이었지만.

    ‘나란히, 나란히 말이지.’

    나란히 걷자.

    그런 약속을 다시금 떠올렸다.

    백주월이 죽음에 이르렀던 날의 밤. 누자베스와 나눴던 약속이다.

    서툴지만, 낯부끄럽지만 말이다.

    익숙치 않게도 서로의 발걸음을 맞춰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누자베스는 선택할 필요도 없었고, 선택해서도 안 되는 선택지를 취했다. 자신이 감수해야 하는 모든 불이익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백주월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야 말로 백주월도 그의 대답에 응해줘야 할 차례였다.

    “누군가 네 선택이 틀렸다고 부정한다면.”

    백주월은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의식을 전환시켰다. 스카디와의 거리는 20여 미터. 이런 괴물들의 싸움에서 0에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네가 최강의 병기를 손에 쥔 것뿐이라는 사실을 결과로 증명할 뿐이겠지.”

    균열이 열린 건 그 직후였다.

    완벽에 가깝게 계산된 각도와 거리가 교차하듯 설계되어 가고 있었다. 누자베스는 고개를 들어 청색의 균열들을 올려다 보며 대답했다.

    “네 그런 점이 좋다니까.”

    누자베스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씨익 웃어 보인 직후.

    콰과광!

    붉은 혈창이 누자베스가 서있던 곳에 꽂혔다. 물론 백주월이 먼저 손을 쓴 상태였다. 이미 스카디가 누자베스를 먼저 노릴 것이라는 사실까지 간파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약한 녀석부터 노리는 건 정석적인 판단이다. 게다가 라우터 역할을 하는 누자베스를 먼저 처리한다면, 백주월은 더 이상의 권능 사용이 불가능해진다.

    누자베스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기며 측면으로 도약했고.

    “흡혈귀는 불멸이라는데. 그게 사실인지 확인해 봐야하지 않겠냐.”

    척!

    순식간에 멈춰섰고, 백주월이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손목을 붙잡혀 있던 누자베스를 어깨에 걸치며 균열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네이팜탄의 방향을 조율했다.

    “알량한 잔재주 따위로 혈계의 일원을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인가!”

    스카디가 백주월을 향해 달려들며 소리쳤다. 음속의 몇 배에 달하는 도약 속도였지만.

    쿠웅!

    화르르륵!

    거의 점이동의 속도로 네이팜탄 수백 발이 지면에 내리꽂혔다. 흡혈귀의 동체 시력으로도 점과 점을 이동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스카디의 육체가 맹렬한 불길에 휩싸였고, 순식간에 대량의 혈액이 증발하는 것이 느껴졌다.

    “감히, 감히 어머니가 하사하신 이 육신을 상처입히다니……!”

    불길에 휩싸인 채 스카디가 거리를 좁혀왔다. 그리고는 누자베스를 향해 손톱을 휘둘렀지만.

    쩌엉!

    스카디의 머리가 크게 흔들렸고.

    아주 짧은 찰나 의식이 날아갈 정도였다. 백주월을 축으로 삼아 회전한 누자베스의 올려차기가 정확하게 턱의 핀포인트를 후려갈긴 것이다.

    “이 모기 새끼가 우리랑 육탄전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러면 받아줘야지. 주먹질은 일단 받아주는 게 도리잖아.”

    터억.

    백주월은 공중에 떠있던 누자베스를 양팔로 받은 후 지면에 내려놓았다. 거의 휘두르는 둔기처럼 사용한 발차기였다.

    의식과 감각이 완전한 동조를 이룬 상태.

    누자베스와 백주월은 서로의 시각과 청각의 사각을 완전히 커버하고 있었다. 게다가 눈빛 교환조차 없이 서로의 생각을 완전히 읽을 수도 있었다.

    “육탄전이든 능력전이든 우리가 어디가서 꿀릴 놈들은 아니라서.”

    “링크만 제대로 유지해 보자고.”

    둘이 다가오는 걸 노려보던 스카디는 조용히 코에서 흐르는 피를 훔쳐냈다.

    아무래도 이런 촌구석에서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야 할지도 모른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일을 그르쳐서 네비올로의 실망을 사는 것만큼은 피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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