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205화
이타노 서커스(1)
나는.
아니, 누자베스는 생각한다.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가 얼마나 정교할 수 있을지, 그 짧막하고도 막연한 불안에 관한 생각이었다.
준비해 온 모든 속임수와 서술 트릭이 전지적 관점에 위치한 존재의 눈을 가릴 수 있을까?
‘너는 자신이 무대를 준비해 왔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기본적으로 누자베스의 전문 분야는 ‘거짓말’이다. 소설가란 원래 그런 인종이다. 가장 그럴싸해 보이는 거짓말을 끄적이며 삶을 연명하는 것들 아닌가?
그리고 이번의 분기점은 누자베스의 거짓말이 얼마나 정교했는지에 달려 있었다.
물론 반박의 여지를 넓게 허락하지 않는 타당한 거짓말이 아니라면, 바깥의 존재에게 협력하고 있는 누군가가 게임의 부정을 제기할 수 있지 않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흡혈귀 스카디를 응시하며 누자베스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비열한 조력자로 위치하는 캐릭터.
그 누군가의 의식이 점점 스스로가 진실이라 믿는 거짓말에 도달할 때까지 얼마나 더 남았을까?
“진짜 이 직업에 염증이 난다니까.”
누자베스는 킬킬 웃으며 검을 뽑았다.
그의 양옆에 나란히 선 루칸다와 백주월은 무슨 말이냐는 듯 누자베스 쪽을 쳐다봤다.
“아니, 너희들은 몰라도 돼. 저 흡혈귀 놈이나 어떻게 요리할지 생각해 봐. 거짓말쟁이는 거짓말쟁이가 상대해야 하는 법이니까.”
스카디는 어중이떠중이 같은 흡혈귀가 아닌, 엘더급의 흡혈귀다. 아무리 3:1이라고 해도 적당히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피르에나 왕녀의 파편을 지닌 칼베라는 이시카니 섬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피르에나가 한주호와 만나게 된 건 처음 통화를 나눈 후 일주일이 지난 월요일 오후였다.
짧막한 통화에서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사실과 앞으로의 작업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다.
한주호는 피르에나와 통화를 나눈 후 ‘던전 부수는 플레이어’의 원고를 폐기하고 새로운 글을 써보겠다고 말을 꺼냈다.
그리고 바로 어제 피르에나는 새로운 원고를 메일로 받아 읽은 참이었다.
‘여기까진 예정된 상황이지. 용사 류시혁과 백주월의 이야기가 아닌, 하이브 마인드 누자베스의 이야기로 전환되는 시점이 이쯤이었다는 건가?’
피르에나는 인쇄해 온 원고를 한 장씩 넘기며 내용을 확인했다. 소설가 한주호가 자신이 쓰던 소설로 전이되어, 하이브 마인드로써 살아 남는다는 이야기였다.
대충 눈대중으로 확인하자면 분량은 50편 내외. 책으로 만들면 2권 남짓한 양이었다.
피르에나는 종이가 새까맣게 보일 만큼 빽빽하게 인쇄된 활자 한 장을 읽는데 1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모든 흐름과 시간선이 순조롭게 흐른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어.’
여기까지가 수순대로 진행된 시간선이라고 할지라도, 피르에나는 먼지만한 걸림돌이 없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카페의 목재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들기며 피르에나는 한주호의 원고를 몇 번이고 거듭 읽는 사이.
딸랑.
카페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종업원의 인사 소리가 섞였다.
피르에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출입구 쪽에 서서 서성이는 남자를 바라봤다.
전체적으로 선이 가느다란 남자였다.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고, 햇빛과 인연이 없는지 얼굴이 흡혈귀처럼 보일 만큼 창백했다.
“한 작가님?”
“아, 예!”
피르에나는 저것이 ‘한주호’라고 인식했다. 당연히 피르에나는 한주호와 누자베스를 동일인이라 믿는 쪽이었다.
손을 뻗어 가볍게 악수를 나눈 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자, 한주호는 피르에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며 멋쩍은 웃음을 머금었다.
“아, 그게 초면에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이상하지만. 진짜 미인이시네요. 저는 무슨 모델이신 줄 알았어요.”
“아하하, 감사합니다. 작가님도 잘생기셨는걸요.”
“정말요? 혹시 이거 그린라이트인가요? 노, 농담입니다……! 하하…….”
한주호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물론 피르에나는 그런 시답잖은 호감에 관심은 없었다.
이쪽 세계선에서 해야 할 일은 명확했고, 아무리 초극의 기회가 무한하게 마련되어 있다고 해도 매번 신중을 기울여야 했으니까.
“아니 글쎄 박태준 팀장이 매니지먼트에 여자 직원은 없다고 그랬는데요. 완전 남탕이라고…… 그런데 이런 미인 기획자 분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오히려 왜 이런 일을 하시는지 궁금해질 정도입니다. 모델이나 배우를 해도 될 정도인데.”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요. 이런 일을 해보고 싶었을 뿐이랍니다.”
피르에나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장 검증 작업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조바심을 내다가 의심을 사거나 경계를 당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A4용지 더미를 가방에서 꺼냈다. 한주호에게 보여주기 위해 평범한 크기의 폰트로 인쇄해 온 원고였다.
“작가님이 메일로 보내주신 원고는 잘 읽어봤습니다. 여기 피드백에 관한 코멘트는 따로 표시를 해놨으니…….”
“남자 친구는 있어요? 그, 당연히 있겠죠? 없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인데.”
피르에나는 한숨을 삼키며 미소를 머금었다. 도대체 이 녀석은 무슨 목적으로 이 자리에 나온 걸까? 그런 의문이 절로 들 만큼 짜증이 치솟았다.
“아직 없네요. 일이 많아서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
“진짜요!? 그럼 전에 사귀던 남친하고는 헤어진지 얼마나 됐는데요?”
“집이 엄한 탓에 아직 남자친구를 사귄 적은 없어요. 이걸로 대답이 됐을까요, 작가님?”
“헐, 대박이다. 이렇게 예쁘신데 남자를 사귄 적이 없어요? 진짜? 한 번도?”
“예.”
“와…… 진짜 대박이다. 와, 진짜 저는 여자친구 생기면 진짜 잘해 줄 자신이 있거든요. 어떤 타입이 이상형이에요?”
“작가님, 죄송하지만 이번에 보내주신 작품 얘기를 먼저…….”
“그러면…… 아, 이게 좀 초면에 물어보기 좀 그런데. 아직 누구랑 사귄 적도 없으면 그, 그런 경험도 없어요?”
피르에나는 초인에 가장 근접한 인간.
이미 정신력과 의지의 극한을 시험받고 있는 존재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 감정적이 될 리 없었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당장 뺨따귀를 후려갈겨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이 정도로 발끈할 만큼 피르에나의 정신력은 얄팍하지 않았다.
‘재밌네, 이번엔 그런 종류의 블러프인가.’
지금까지 수만 번 이상.
누자베스의 더러운 수작질을 상대해 온 경험은 적지 않았다. 만약 이번에도 그런 게임이라면 응해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피르에나는 의자의 등받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의 위로 걸치듯 다리를 꼬았다.
타이트한 스커트 안쪽으로 커피색 스타킹의 밴드 부분이 엿보였고, 한주호의 시선 처리가 일순간 불안정해진 것이 뻔히 보였다.
“작가님, 일단은 작품 얘기를 먼저 할까요?”
“아, 작품…… 작품이요.”
“먼저 피드백 해드린 부분을 확인한 뒤에 자리를 옮기죠.”
피르에나의 미소가 이유없이 요염해 보였다. 고혹적인 몸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듯 타이트한 슈트 차림이 뇌의 이성을 마비시킬 것만 같았다.
그녀에겐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인간이 리비도의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 생물인 이상. 무의식의 저변을 주무르며 순종적으로 만드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표정과 눈빛, 사소한 몸짓 하나, 목소리와 어투. 모든 것이 계산되고 있었으니까.
“자리를요? 아직 식사를 안 하셨나?”
한주호는 핸드폰의 화면을 잠깐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오후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런 어줍잖게 시치미를 떼는 모습에 피르에나는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 더 조용한 곳이 괜찮겠네요.”
“어…… 조용한 곳이라면.”
“조금 더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라던가.”
피르에나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머금은 후 이어 말했다.
“특별 재활 프로그램도, 방금 전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자리를 옮긴 뒤가 좋겠어요.”
그렇게 눈을 가늘게 뜨며 요염한 웃음을 흘렸다. 한주호는 피르에나가 건낸 원고를 허겁지겁 들었다.
‘블러프든, 시간 끌기를 할 생각이든. 어차피 이번 시련에서 사각은 없을 터.’
피르에나는 한주호를 순한 양으로 만들어 놓고 바로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4화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는데요. 주인공이 하이브 마인드가 되어 이세계로 소환된 직후의 부분이요.”
“아, 예! 어떤 부분이…… 아! 여기구나!”
“만약 자신이 죽게 되면 부모님이 슬퍼하실 거라고 예상할 수 있는데, 어째서 주인공은 슬픔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요?”
한주호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대충 떠오른 대답을 입밖으로 토해냈다.
“그러게요…… 이상하네요. 제가 이번에 워낙 급하게 쓰느라 정신이 없었나 봐요. 이 부분은 수정해 놓겠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마물이 되면서 인간의 감정을 잃게 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아!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네요. 그러면 대충 그런 거라고 넘어갈까요?”
“그리고 처음 마을의 자경단을 상대로 싸우게 됐을 때의 씬도…….”
피르에나가 상체를 숙이며, 한주호의 앞에 펼쳐진 원고 부분을 펜끝으로 가리켰다. 살짝 벌어진 셔츠의 틈새로 부드러워 보이는 가슴골이 보였다.
“어째서 이 죄책감을 느끼며 갈등하는 부분만 갑자기 3인칭으로 시점이 변경되는지 코멘트를 달아놨어요. 작가님이 무슨 의도로 이렇게 썼는지 궁금해서요.”
“그, 그러게요? 왜 이 부분만 3인칭이지? 그냥 1인칭으로 수정해 놓겠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피르에나는 빠르게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한주호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이럴 리가 없는데. 정말 생각없이 쓴 부분이라도 수정 요청이 들어오면 그럴싸한 이유를 급조해서 덧붙이는 게 아니었나?’
마치 한주호는 더 이상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작품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다기보다는, 효용성이 완전히 만료되었다는 듯한 태도다.
“작가님?”
“예, 예? 이제 피드백 검토 작업은 끝났나요?”
“보이저 3호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갑자기요? 그, 가장 나중에 발사된 탐사선인데 어째선지 가장 먼저 성간 우주에 돌입했다는 그거 아니에요? 몇 년 전인가 조만간 성간 우주에 돌입한다고 뉴스에서 봐서…… 그보다 특별 재활 프로그램이라는 거 말이에요. 제가 아까 여기 오면서 보니까 저기 괜찮은 러브……”
“달 탐사선 카구야1호는?”
“들어본 적 없는데요. 그보다 저기 피드백 끝난 것 같은데 슬슬…….”
“하…… 누자베스 경 제법이네요.”
피르에나는 지체없이 허벅지에 걸어놨던 홀스터에서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것과 거의 동시였다.
콰앙!
카페의 벽면이 통째로 뜯겨나갈 정도의 폭발이었다. 화약이나 인화성 물질이 아닌, 순수한 물리 에너지의 충돌이었다.
쿠웅, 쾅!
피르에나는 바로 테이블을 걷어차 방벽으로 만들고, 그 뒤로 숨어 파편으로부터 몸을 지켰다.
“하, 하핫! 싸구려 시간 끌기라! 하지만 미안해서 어쩌죠, 누자베스 경. 이번 흐름에선 개입할 수 있는 처단자가 없을텐데요!”
방금 전까지 눈앞에 앉아 있던 한주호와 누자베스는 동일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함정이라고 해봤자, 처단자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잠시 발을 묶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피르에나가 다음 도약에서 진짜 한주호를 찾아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드디어 찾아냈군. 외신의 강림에 협조하고 있던 진짜 원흉을 말이야.”
낮고 묵직한, 쉰 목소리였다.
뜯겨나간 출입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건.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는 남자였다.
끔찍한 몰골이었다. 팔도 한쪽 밖에 없었고, 눈 역시 마찬가지다. 얼굴의 절반 이상이 끔찍한 화상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피르에나는 그 목소리만으로 누군지 유추해낼 수 있었다.
“류시혁…… 어째서 살아 있는 거야……!”
이번 흐름에선 존재하면 안 되는 인물이다. 류시혁은 누자베스와 백주월의 협공에 의해 죽음에 이른 캐릭터 아닌가?
“설마, 설마…….”
류시혁이 확실히 죽었다는 언급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가?
피르에나는 바로 정답에 도달했다.
메모리얼 전투. 류시혁이 나타났던 건 메모리얼 전투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메모리얼 전투는 목표를 달성할 시 본래의 세계선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니 누자베스가 흡혈귀의 혈술로 공간을 박리시켰다 하더라도 복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메모리얼 전투의 목표는.
백주월의 죽음이었다.
류시혁은 분명히 ‘백주월을 죽인다’라는 결말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걸로 메모리얼 전투의 목표가 달성된 것이라 인정된 것이다.
그렇기에 핵폭발에 휘말리기 직전 본래의 세계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누자베스는 무엇 하나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피르에나 역시 이번엔 그 어떤 부정을 제기할 수 없었다.
“이런 시답잖은 함정에 두 번은 안 걸려요. 이번 빚은 기억해 두죠, 누자베스 경.”
피르에나는 어금니를 꽉 물며 몸을 일으켰다. 휘릭, 척! 나이프를 역수로 쥐었고, 피르에나는 류시혁을 향해 쓴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용사들이 초월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는 걸까요? 다음 도약 때는 박태준 팀장부터 붙잡아 심문해 봐야겠어요. 숨은 조력자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도 류시혁에게 꼬리를 밟힌 사실은 변치 않았다. 피르에나는 계속해서 추격해 오는 류시혁을 상대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자유롭게 제한 없이 움직이던 피르에나에게 확실한 족쇄가 하나 걸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