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200화 (200/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200화

    붉은 종달새(3)

    “누자베스 경은 이해하지 못하겠죠.”

    피르에나는 파이프에 담배잎을 채워 넣으며 입을 열었다. 위스키에 적신 후 오랫동안 음지에서 말린 담뱃잎에서는 달콤한 꿀의 향이 감돌았다.

    “하늘에 계신 전지하며 전능하신 어머니께서 만인에게 용서받을 권리와 함께 그들을 이끌 지도자에게 절대적인 왕권을 허락하신 것이 섭리에 가까운 사실이라면, 최소한의 인간조차도 최소한의 권리를 하사받았으며 그 권리를 위임하거나 반환을 요구할 자격을 갖췄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피르에나가 그리 말하자, 누자베스는 빙긋 웃어 보이며 불을 건냈다. 피르에나가 파이프를 물고 여러번 짧게 숨을 들이키자, 이내 담배잎의 위에 불씨가 붙었다.

    피르에나가 첫 담배 연기를 내뱉은 것과 동시에 누자베스가 입을 열었다.

    “이해한다고 생각했었지.”

    누자베스는 오래되어 빛바랜 농담을 뒤늦게 떠올린 사람처럼 말했다.

    “인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이상과 낙원을 맹신한 적도 있었고.”

    모든 실패와 과실이 과도적 시기의 부산물이라 애써 자위했던 적도 있었다.

    “자유가 지고의 가치라고 진지하게 교육받은 적도 있었고, 독재라는 것이 하늘의 존엄한 규율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세뇌에 가까운 커리큘럼을 거친 적도 있었으며 최소한의 인간들에게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를 기대한 적도 있었다.”

    누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피르에나를 향해 똑바로 시선을 향했다.

    질긴 악연이었다.

    10년도 넘게 칼과 총탄을 주고받았던 숙적이었다.

    피르에나는.

    마왕 누자베스의 ‘바체트 제3제국’이 여지껏 열도의 남서쪽 지역을 집어 삼키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마르하바 인민 민주 공화국의 총서기장. 그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올라선 피르에나는 누자베스가 넘어야 할 마지막 장애물이었으니까.

    “인민에게 주권이란 양들이 목장의 주인이 되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바꿔 말하자면 뻔뻔한 기득권이 실패한 정책의 책임을 힘없고 멍청한 백성들에게 전가하겠다고 선포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지.”

    모두가 몰락할 때 백성들은 그 비극의 책임을 의연하게 짊어질 수 있을까?

    국가의 자주적인 주인으로써 모든 비극과 참극을 자신들의 탓이라 인정하고, 수긍하고, 그렇게 납득할 수 있을까?

    누자베스는 그 정답을 알고 있었다.

    백성들이란 그리 강하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않았으며, 생각만큼 선량하지도 않은 존재들이다.

    백성들은 원래 그런 존재다.

    잠을 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몸이 부숴지도록 일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구석에 걸터 앉아 지친 숨을 몰아쉬고 있자면,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이 집안의 ‘재앙’이라 비난하는 자식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식으로 아버지를 비난하지 않으면 자신의 비루한 삶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만큼 어리고, 무지하며, 뻔뻔한 것들이 백성들이었다.

    “아니면 자신과 같은 높이에 나란히 선 다른 주인들을 증오하고 탓하기가 더 쉽지. 피르에나 서기장, 민주주의란 그런 꼴사나운 촌극이야. 늙은이가 젊은이를 탓하고, 여자가 남자를 탓하고, 블루 칼라가 화이트 칼라를 탓하며. 밑바닥의 보잘 것 없는 삶들이 서로가 서로를 탓하는 걸 높은 곳에서 구경하며 불길에 부채질을 하는 게 민주주의다! 몰락의 책임을 짊어질 각오도, 용기도 없는 한심한 기득권이 무대에 오를테고! 자신들이 마치 진짜 국가의 주인이 되었다고 착각하는 가엾고 멍청한 백성들이 어울리면 도저히 눈 뜨고 구경할 수 없을 만큼 꼴사나운 코메디가 연출될 뿐이다! 집단의 바깥에 존재하는 사나운 짐승의 존재가 허상일 뿐이라 울부짖어 봤자, 몇이나 그 사실을 수긍하겠나? 만에 하나 수긍한다 하더라도 다른 짐승을 찾아내 숭배하고 증오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

    그렇기에 백성들에게 필요한 건 철혈의 군주였다. 그들의 공포와 증오를 오롯이 짊어 질 강철과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몰락의 책임을 가엾은 백성들에게 돌리지 않고, 스스로 모든 비난과 책망을 삼킬 수 있는 책임감을 갖춘 지도자가 필요했다.

    “백성과 여자와 개는 다루는 방법이 같다는 사실을 서기장도 이해하고 있지 않나?”

    결국 다루는 법은 같다.

    백성도, 여자도, 개도 모두 같았다.

    그들은 같은 높이에 나란히 서서 선택과 책임을 함께 나눌 주인을 바라지 않는다.

    백성들이 원하는 군주란 여자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부군과 닮았고. 여자들이 바라는 부군은 개들이 바라는 주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목줄을 쥐고 앞에서 이끌어 줄 주인이 필요한 것뿐이다.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문제에 대해 고뇌하는 삶을 원치 않을테니까.

    그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주인이 필요할 뿐이다. 따뜻한 빵과 포근한 이불을 마련해 줄 주인이 필요할 뿐이다.

    피르에나는 누자베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천천히 담배 연기를 토해냈다.

    “자유 의지를 지닌 인민은 애완견과 다릅니다.”

    피르에나는 만인의 의지가 선험적인 선함으로 귀결된다고 믿는 쪽의 인간이었다. 집단과 대중은 그 누구의 가르침 없이도 시행착오를 거쳐 관념적 정의에 가장 근접한 형태에 도달할 것이라 믿었다.

    누자베스가 누구에게 실망하였고, 무엇에 염증을 느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누자베스 경, 자식들의 철없는 모습에 실망하여 등을 돌리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인민의 지도자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존재해야 하며, 그들이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할 것이라 믿고 격려를 거듭하는 것만이 지도자의 책무입니다.”

    “오, 이제는 짐을 가르치려는 것인가? 그렇게 믿고 격려한 결과가 이것인가? 골계로군, 피르에나 서기장.”

    누자베스는 사뭇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피르에나가 마지막 순간까지 내몰려 누자베스와 대면하게 된 상황이다.

    처음부터 시간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누자베스는 이미 제국의 황제이자, 살아 있는 신이었다. 제국의 국민들은 누자베스가 육신을 얻어 현화한 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말이 곧 정의였고, 그의 의지가 선의 표상이었다. 제국의 국민들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그릇된 일인지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전국민이 전쟁에 동원되는 총력전 따위는 누자베스의 말 한 마디에 곧장 실시될 수도 있었다.

    그에 비해 피르에나의 군대는 모병제를 통해 충당되고 있었고, 그 군대의 운용 예산마저 의회의 허락을 구해야만 하지 않나?

    철혈의 의지로 움직이는 국가와 대적하게 됐을 때, 민주주의 국가란 지독하게 비효율적인 관료주의 집단처럼 보이는 법이다.

    게다가 자유로운 목소리를 허용한 결과가 무엇인가?

    전국 각지에서 반전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나 전쟁과 군대 예산의 확대 편성을 반대했다.

    황제 누자베스와 외교적 해결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울부짖던 얼간이도 있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군대를 살인자 집단이라 매도했고, 피르에나는 전쟁에 미친 살인마라 비난당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피르에나의 군대는 패배하였고, 이 자리에서 누자베스의 손에 의해 그 책임을 추궁당하는 절차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런 사실을 곱씹으며, 피르에나는 파이프를 내려놓고 견장을 풀었다.

    이곳에서 죽는 건 ‘총서기장 피르에나’가 아닌, ‘인간 피르에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자베스에게 고하듯 말이다.

    “자유에 대한 의지는 계승될 것입니다. 그것만이 한 사람에게 의존하며 기생하듯 존재하는 국가와 차별화될 수 있는 긍지일 테니.”

    “부디 심심하지 않도록 그랬으면 좋겠군.”

    누자베스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불을 끈 후, 품속에서 회전식 탄창이 달린 권총을 꺼내 피르에나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지옥에 가면 루소 양반에게 안부 인사나 전해주게.”

    그 짧막한 마지막에 농담에 피르에나가 토해내던 담배 연기에 실소가 섞였다.

    타앙!

    총성과 함께 피르에나의 상반신이 의자 뒤로 넘어갔다. 미간을 정확히 꿰뚫은 총탄은 그녀의 뇌를 완전히 부쉈고, 그대로 죽음에 도달했지만.

    “이게 몇 번째 패배인지…….”

    피르에나의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얼어붙었고, 그 정지된 시간 속에서 피르에나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3만8천391번째. 이번 세계선도 오답을 고른 모양이군요.”

    피르에나는 혼자말을 중얼거리며 뒤로 넘어진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면식이 있는 여성이 어느샌가 나타나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했네, 피르에나. 뭐 나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 네가 원한다면 몇 번이고 기회를 줄 수 있어. 말했잖아, 나는 바깥 고리의 초월자라고. 이런 일은 간단하지.”

    피르에나는 눈앞에 나타난 여성을 알고 있었다. 이미 수만, 아니 수십만 번 이상을 이렇게 마주해 봤으니까.

    “영겁이란 편리하네요.”

    “편리한 만큼 지루해. 솔직히 나는 네가 어서 유일한 장애물을 치워줬으면 하는데. 반대편의 간섭권을 지닌 존재가 있다면, 혹시 내가 물릴지도 모르잖아?”

    피르에나의 앞에 나타난 여성은 ‘외신’이라 불리는 신적 존재였다.

    그것도 위대한 의지를 섬기는 초월적 존재 중 한 사람. 복수의 여신 아셰트라의 이복 여동생인 ‘영겁의 여신 크리스델’이었다.

    세피로스라던가, 아리만에 비해 그 격이 한 단계 정도 떨어지긴 하지만 그녀가 초월체에 속하는 외신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현재 이 ‘큰 흐름’에 관여하던 외신은 세피로스와 크리스델 뿐이다. 하지만 세피로스가 얼마 전 어처구니 없게도 인간의 아이에게 당해 모든 간섭권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그 인간의 아이는 편법을 사용하여 일시적으로 자기 증명을 통한 초월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세피로스의 소멸이었다.

    나머지 외신들도 적지 않게 경악했던 사건이었다. 날벌레에게 물려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원시인들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크리스델에겐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세피로스가 자리를 부재하게 되었고, 그가 속해 있던 이 ‘큰 흐름’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는 크리스델이 유일하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간섭력을 행사하여 세상을 정리하고 위대한 의지의 평가를 받았겠지만.

    얼마 전 세피로스가 인간의 아이에게 당한 사건을 계기로 외신들도 아주 약간의 경각심을 지니게 되었다.

    크리스델은 조바심을 내지 않고, 천천히 위협이 될 수 있는 걸림돌들을 하나씩 걷어낼 작정이었다.

    “어때? 다시 같은 시작 지점을 마련해 줄 수도 있어.”

    크리스델이 다시 리셋을 제안하자, 피르에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음 계획을 입에 담았다.

    “조금 더 이전으로 돌아가 볼까요?”

    “약점은 넓게 많이 파악해 둘 수록 좋겠지.”

    크리스델도 그 의견에 동조한 듯 키득키득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 경쾌한 소리에 피르에나의 의식이 셧다운되었고, 이내 다시 정신이 돌아오며 시야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

    목재 합판으로 만들어진 책상에는 모니터와 각종 서류가 올려져 있었고, 앞과 양옆이 파티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피르에나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사원증을 슬쩍 들어 이름을 확인했다.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한국어로 옮겨 쓰면 딱 이런 느낌이 되지 않을까? 그만큼 적나라한 이름이었다.

    그리고는 파일철이 꽂혀 있는 책장으로 다가가 수백 장이 넘는 계약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손이 멈췄고, 바로 핸드폰을 꺼내 계약서에 적혀 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이내 통화가 연결되었고, 피르에나는 한껏 경쾌한 목소리로 첫 마디를 내뱉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CK북스의 기획자 임수정입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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