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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99화 (199/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99화

    붉은 종달새(2)

    끝맺어야 할 일이었다.

    누군가는 그 비난을 짊어져야 했고, 몰락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써야만 했다.

    낙원은 거짓이었으며, 잿더미가 전부인 폐허만이 남겨진 모든 것이라 설명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낙월을 향한 열망이 방향성을 잃었을 때, 분노로 치환된 감정을 오롯이 받아낼 그릇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피르에나, 이 세상은 초인을 바라지 않는다.’

    우매한 백성들은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며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에게 초극을 설파하려 해봤자 혼란스러워할 뿐이지 않겠나?

    루칸다, 아니 루아 카날다는 그런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진흙탕 속에서 마음 편히 살던 물고기들을 구태여 맑은 물로 끌고 와 고통스럽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깨끗함’과 ‘옳음’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보다 ‘더러운 누군가’였다. 그들에게 진정 필요했던 건 자신보다 ‘비도덕한 누군가’였을 뿐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깨끗하고 옳은 인간이라 믿으며, 그 생각에 취해 그럭저럭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인간은 가까스로 살아갈 수 있는 생물이다.

    진정한 최대다수의 공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해하기 힘든 정의’보다 ‘가시적인 불의’와 ‘인스턴트한 응징’이 선행되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피르에나는 이 세상에 필요치 않은 존재였다.

    가장 초인에 근접했던 그녀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절대다수의 인간들은 자신의 추악함을 깨닫고 스스로의 삶에서 고통받으며 몸부림 칠 뿐이니까.

    그녀는 인간의 강함과 선함을 믿었지만. 대다수의 인간은 그녀만큼 강하지도 않았고, 선할 수도 없었다.

    루아 카날다의 관점에선 오히려 누자베스가 이 세상의 진실에 닿는 정답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누자베스는 인간이 얼마나 추악하고 하찮은 존재인지 똑바로 직시할 수 있는 지도자였다. 그렇기에 가시적인 비난의 표상을 자처하고 나선 것 아니겠나?

    그렇다면.

    피르에나와 누자베스는 완전한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는 숙적이 될 것이다.

    그들이 믿는 이상의 형태란 완전히 상반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피르에나의 부활을 저지해야만 했다.

    루칸다의 검이 피르에나가 담겨 있는 유리관에 닿기 직전이었다. 루아 카날다의 검에 닿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소멸될 것이다.

    이번에야 말로 질긴 악연이 끝맺어지리라 예상한 순간.

    투쾅!

    루칸다의 몸이 크게 튕겨져 나간 뒤에야 충격파가 소리로 치환되어 밤의 공기를 울렸다.

    음속의 몇 배로 기동하는 무언가.

    그런 존재는 확실히 흔치 않았고, 루칸다가 가까스로 멈춰서며 고개를 들자.

    “곤란하군, 곤란해.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어.”

    연미복 차림의 남성이 유리관을 집어 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밤하늘만큼이나 짙은 흑발과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

    그리고 탁한 붉은 눈동자.

    루칸다가 그 남성의 정체를 파악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흡혈귀…….”

    의심할 여지없이 흡혈귀였다.

    어째서 이 섬에 나타나 루칸다를 방해하고, 피르에나의 파편이 담긴 유리관을 챙기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어중이떠중이 같은 수준의 흡혈귀도 아니었다.

    물론 스칼렛 같은 상속 신분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며, 불사의 왕 브람스 같은 프리스커스에 비해서도 한없이 위계가 낮았지만.

    한 자릿수의 신분이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실제로 루칸다의 눈앞에 나타난 흡혈귀는 제8신분에 속하는 엘더에 속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제8신분이라면 반 르낙시아 이후의 존재. 하지만 경험과 능력을 갖춘 엘더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저 흡혈귀 한 마리가 이 섬 전체를 뒤집어엎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스카디, 늦었잖아. 일을 그르치고 싶었던 것이냐.”

    “딱 맞게 왔잖아? 너무 그렇게 툴툴거리지 마, 단명종.”

    흡혈귀가 무사히 유리관을 챙기자, 쓰러져 있던 칼베라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흡혈귀를 휘하에 두고 있는 건 아닐 테고, 무엇을 두고 협력하고 있는 것이지?’

    분위기를 보자면 칼베라와 저 흡혈귀는 이미 면식이 있는 관계다. 그리고 피르에나 왕녀의 부활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확실했다.

    그러는 사이에 흡혈귀 스카디가 유리관을 칼베라를 향해 휙 던졌다.

    “밑준비는 끝났어. 바로 이시카니 섬으로 향해.”

    “알겠다.”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후, 바로 칼베라가 유리관을 들고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다.

    그걸 가만히 두고 지켜볼 루칸다가 아니었다. 바로 그림자 도약으로 거리를 좁히려 했지만.

    “고블린 주제에 분수에 맞지 않는 재주를 지녔군. 혈계의 일족 앞에서 그림자를 다루다니……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아?”

    “비켜라, 피걸레도 못 되는 잔챙이.”

    “크하핫! 피걸레? 너무 짧은 삶을 사는 종이라 그 주둥이를 예의 있게 다루는 법을 못 배웠나 보군.”

    루칸다의 앞을 스카디가 가로막았다. 수십 자루의 블러드 스피어가 지면에서 치솟았고, 감옥의 철창처럼 루칸다의 사방을 차단했다.

    “이 몸은 제1신분 네비올로 님의 직계 혈족인 프리스커스 라일리안 님의 여섯 번째 아들인 보르게니아 님의 종손이 남기신…… 캬악!!”

    말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스카디의 몸이 찌그러졌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여 비틀어 버린 것처럼 끔찍한 형태로 말이다.

    피분수가 치솟았고, 멀찍이서 누자베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염병, 존나게 복잡하네. 네비올로의 아들의 딸의 아들의 딸의 내연남의 장모의 아들의 애완견의 조카의 딸의 손자의…… 개족보 같은 새끼들이 하여간 자기소개는 염병할 토 나올 만큼 길어요.”

    “아직 자기소개가 다 안 끝난 것 같은데 더 들어보지 그랬어?”

    백주월이 킬킬 웃으며 안고 있던 누자베스를 지면에 내려놓았다. 누자베스는 폴짝 뛰며 자세를 잡은 후 스카디와 루칸다를 동시에 내려다 봤다.

    “어 그래? 자기소개 마저 할래?”

    누자베스가 미안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스카디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러자 스카디는 누자베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노성 어린 어조로 소리쳤다.

    “감히…… 감히 이 스카디 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고 살아남길 바란다면…… 큰 오…… 케엑!!”

    무슨 요술인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지면에서 갑자기 거대한 철덩어리가 치솟아 스카디의 몸뚱이를 들이 박았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이 시대의 흡혈귀가 알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스카디를 들이박은 미사일은 그대로 하늘을 향해 솟구쳤고, 한참 뒤에야 800미터 상공에서 폭발했다.

    마치 태양이 뜬 듯 지상이 환하게 밝아졌다. 누자베스는 그 광경을 올려다보며 감탄을 토해냈다.

    “오우야… 오우야…… 내 생각엔 미사일 앞에선 흡혈귀고 뭐고 없다니까. 9서클이고 나발이고 미사일이 짜세야.”

    실제로 이 정도의 화력을 낼 수 있는 마법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대륙에 존재한다는 펜드럼하임 학회의 ‘8대 현자’ 중에선 핵폭탄에 필적하는 기적을 흉내 낼 수 있는 현자도 있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했다.

    아무리 뛰어난 마도술사라도 핵미사일의 화력을 구현해 낸다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나?

    차라리 시간선을 마음대로 도약하며 놀러 다니는 현자의 소문이 더욱 사실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언데드의 군단을 이끈다는 강령술의 현자라던가 말이다.

    어쨌거나 순식간에 스카디를 처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누자베스는 바로 칼베라를 추격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저 녀석이 진짜 엘더급의 흡혈귀라면 이런 기습 한 방에 정리될 리 없겠지?”

    엘더급 중에서도 제8신분에 속하는 흡혈귀다. 객관적으로 전력을 비교해도 이곳에 모인 누자베스라든가, 루칸다, 백주월에 비해 강대하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후두둑.

    핏물과 살점이 빗방울처럼 지면에 떨어져 흩뿌려졌고, 파편들은 의식을 지닌 채 살아 있는 생물체들처럼 꿈틀거리며 다시 원형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감히…… 어줍잖은 혈술로 혈계의 일원을 희롱할 작정이었나…….”

    “어줍잖은 혈술 아니야. 너네 혈족의 메를로가 가르쳐준 건데.”

    누자베스가 농담조로 대답하자, 몸이 복구된 스카디가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분노에 몸을 떨었다.

    “네놈 따위의 가축이 입에 담아도 되는 분이 아니다!”

    “어, 어쩌라는 거야…… 사실이 그런데.”

    나름대로 억울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누자베스와 유대를 맺고, 직접 혈술을 지도한 건 과거 ‘붉은 달’의 메를로라고 불렸던 스칼렛이 확실했다.

    스카디의 시점에서 보자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메를로는 관념의 영역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한 혈술로 유명한 상속 신분의 흡혈귀다.

    그런 메를로가 가르친 결과가 고작 이런 수준일 리가 없었다! 그 만큼 누자베스의 혈술은 조잡하고 난잡했다.

    누자베스에게 직접 혈술을 가르쳤던 스칼렛도 ‘주군은 진짜 혈술에 재능이 전혀 없으니 적당히 호신용으로 쓸 수 있을 만큼만 익히게……’라고 포기했을 정도였다.

    “상속 신분을 모욕한 대가가 값쌀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몸의 복구가 완전히 끝난 스카디가 자신의 앞에 대치하듯 선 셋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저 새끼 야마에 스팀 돌게 만들었어?”

    “주월아, 형이 원래 그런 성격이다. 입이 비뚤어져도 옳은 말을 해야 하지 않겠냐? 일제시대에 태어났으면 독립 운동을 했을 인품이라서.”

    “전하, 시간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칼베라가 이시카니 섬으로 향했습니다. 피르에나 왕녀의 부활과 관련된 꿍꿍이가 있는 모양입니다.”

    “피르에나 그 소름 돋는 여자 말이지?”

    “그게 누군데?”

    “그런 게 있어. 루칸다의 전여친이야.”

    “그런데 왜 부활을 저지하려고 하냐.”

    백주월이 그렇게 묻자, 누자베스가 빙긋 웃으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치만…… 루칸다쨩 배신자잖아…….”

    “그거 고혐이야?”

    누자베스와 백주월이 장난스럽게 키득키득거리고 있자, 루칸다가 혀를 차며 대답했다.

    “딱히 여친도 뭣도 아니고, 고혐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피르에나가 부활하는데 성공하면 가장 곤란해지는 사람은 전하입니다.”

    피르에나는 누자베스의 대척점에서 구심점이 될 유일무이한 인물이라고 평해도 될 정도였다.

    게다가 현재 이시카니 섬에는 스칼렛과 로아가 있는 상황. 피르에나의 부활로 인해 그 둘이 위험에 처하지 않을 것이란 보장도 없었다.

    지금 당장은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흡혈귀 스카디를 처리하고, 칼베라가 이시카니 섬에 도착하기 전에 붙잡아 피르에나 왕녀의 파편을 회수해야만 했다.

    “루칸다. 후딱 해치우고 녀석의 뒤를 쫓는다.”

    누자베스가 가장 먼저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입을 열었다. 제8신분에 해당하는 엘더급 흡혈귀 앞에서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전하가 좀…… 얀데레 기질이 있나 봐. 루칸다의 전여친 얘기가 나오니까 질투 때문인지 살짝 짜증나네.”

    “그것 참 황송한 농담이군요.’

    “농담 아니야, 루칸다.”

    누자베스가 킬킬 웃으며 입술 사이에 담배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스카디에게 고정하며 말했다.

    “우렌에게 신호보내. 아릿카사의 전병력은 이시카니 섬으로 상륙한다.”

    피르에나의 부활은 누자베스도 경시할 수 없을 만큼의 중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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