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98화
붉은 종달새(1)
왕족의 이름에 광물을 의미하는 어원을 사용하면 안 된다. 글로레나 왕조의 오랜 관습이자, 미신이었다.
광물의 어원이 되는 단어를 사용하면 젊은 나이에 요절할 운명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미신에도 불구하고.
피르에나는 살랍의 고어로 크리스탈. 즉 ‘수정’을 의미했다.
광물의 어원이 되는 단어가 아닌, 광물 그 자체를 공주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게르나어로 풀이하자면 ‘글로레나’는 숲의 주인들이란 뜻이었고, 본래 숲에 터를 두고 번영한 씨족에게 채광 행위는 숲의 초목을 죽이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광물의 어원을 왕의 직계 자손에게 사용하는 일은 없었지만, 어쩐 일인지 피르에나만이 왕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광물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가설이 있었다.
피르에나가 스스로 왕에게 받은 이름을 버리고, 전장에 나서기 전 결사의 각오를 표하기 위하여 광물의 이름을 가명으로 썼다거나.
아니면 정실의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구태여 광물의 이름을 붙여줬다거나.
여러 가지 소문이 무성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은 하나뿐이었다.
피르에나는 어려서부터 기괴할 만큼 총명한 아이였다. 그녀의 유모들도 소름이 돋아서 도저히 귀여워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아 말할 만큼 영특했던 것이다.
고작 4살이 되던 해에 중증의 우울증에 걸려 한참 동안 방에 틀어박힌 채 궁중의 장서를 읽기에 몰두했던 적도 있었고.
자신의 아버지이자 왕에게 입헌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던 것도 그녀가 6살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피르에나의 손윗 형제인 왕자들이 콧물을 흘리며 사냥 놀이에 푹 빠져 있었던 시기에 말이다.
그런 왕위 계승권에서 한참 떨어진 왕녀가 왕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답은 간단하다.
괴물이었을 뿐이다.
왕의 눈에는 자신의 딸이 괴물로 보였다.
언젠가 형제를 모두 잡아먹고, 왕권을 집어삼킬 괴물이었다.
피르에나에 비교하자면 왕자들이 모두가 저능아로 보일 만큼 덜떨어져 있었으니까.
물론 피르에나는 선천적으로 지진아로 태어난 제13왕자를 살갑게 보살피거나, 다른 왕자들이 괴롭히지 못하게 감싸줄 만큼 형제들을 소중히 여겼지만. 왕의 눈에는 그런 피르에나의 행동까지 가증스러운 연기로 보일 뿐이었다.
언젠가 그 추악한 욕망이 깃든 송곳니를 드러낼 때가 올 것이라 믿었다.
게다가 유능한 왕녀는 순조로운 왕위 계승에 장애물이 될 뿐이지 않나? 자고로 여자란 너무 똑똑하고 유능해도 문제가 된다. 적당한 수준의 교양만 가르쳐서 부군에게 순종적이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런 믿음이 당연한 시대였고, 피르에나는 그 낡은 논리에 순응하듯 숨을 죽이고 고개를 숙인 채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가 15살이 되던 해.
불행 중 다행인지. 피르에나는 모든 남성이 돌아볼 만큼의 미녀로 성장해 있었다. 미형의 왕녀가 생겼다는 건 외교에 쓸 수 있는 훌륭한 화살 한 발을 지닌 것과 같다.
피르에나는 외교 교섭의 재료로써 매우 훌륭한 상품이 되었고, 글로레나 왕조의 왕은 서둘러 이 골칫덩이를 이웃 국가로 보내고 이득을 챙기려 했다.
뭐, 그런 계획이 있었다.
물론 피르에나가 잠자코 앉아 왕의 결정을 따를 만큼 순종적인 인물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명분이 주어진다고 해도, 아무리 깔끔하게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단두대에는 부스러기와 핏자국이 남습니다.”
피르에나는 손가락 하나 더 접으며 이어 말했다.
“그렇다고 이웃 국가에 보내자니, 무엇으로 돌아올지 불안하여 잠을 청하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불안과 불신으로 가득 찬 왕의 얼굴을 태연히 응시하며 피르에나는 그렇게 말했다.
“계집으로 살기엔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았고, 현자로 살기엔 식견이 부족한 야만적인 짐승이었을 뿐입니다. 보이는 것으로부터 눈을 감고 살 만큼 뻔뻔하지 못했을 뿐이고, 짐승처럼 살기엔 타고난 굴레가 무거웠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사나이처럼 전장에서 장렬하게 산화할 수 있을 만큼 용감하지도 못했다.
피르에나는 그렇게 자신을 정의하지 못했고, 어쩌면 그녀는 ‘정의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하고자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낙타만큼의 인내를 지니지 못했으며.
사자처럼 종래의 가치에 대항할 만큼 용맹한 의지를 지니지도 못했으며.
그녀가 자신의 본질을 긍정할 수 있을 만큼, 타고난 굴레는 헐겁지 않았다.
“그렇기에 소녀는 괴물이 되고자 합니다.”
낙타의 다리와 혹을 지녔고, 사자의 갈기와 꼬리를 지녔지만, 어린 아이의 얼굴과 심장을 지닌 괴물에 대한 설화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 끔찍한 외견 때문에 인간의 마을에서 쫓겨나, 마물들의 소굴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괴물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르 만타나의 괴물 설화는 피르에나의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이야기 중 하나였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피르에나에게 르 만타나의 괴물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그녀가 르 만타나의 괴물과 동일한 출발선에 도달했다는 것이 전부 아니겠나?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역할은 괴물의 본분이 아니었고. 피르에나는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다시금 정립하며 홀로 수도를 떠났다.
붉은 종달새의 군대.
르 만타나 유격대의 시작점이었다.
* * *
머리가 멍했다.
구역질이 치솟을 만큼 어지러운 감각이 두개골 안쪽을 울렸다. 칠판을 긁는 듯한 이명에 세상의 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지면이 크게 울리는 것이 등으로 느껴졌고, 지면이 흔들릴 때마다 흙먼지가 치솟았다.
어렸을 적 궁중에서 봤던 불꽃놀이처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어째선지 그날의 기억이 상기되는 광경이다.
“발리스타 진지 위치 파악해! 개 같은 발리스타!!”
“여기서 십자 포화에 걸릴 줄이야…….”
“아직 은폐된 진지가 남아 있을 겁니다!”
“매복조! 매복조는 뭐하고 있어, 등신 같은 새끼들아!”
피르에나는 병사들의 고함 소리에 천천히 의식이 돌아왔다. 목이 찢어질 듯 극심한 갈증이 덮쳐왔고, 뒤이어 묵직한 통증이 허벅지에서 번지기 시작했다.
“왕녀 님……! 정신이 드십니까?”
“전진 기지로 후송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섣불리 일어나지 마! 벌집이 되고 싶냐!”
칼베라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피르에나는 칼베라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손을 뻗었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고는 통증이 전해지고 있는 자신의 허벅지를 내려다보자, 화살이 깊숙히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진격 도중 화살에 맞고, 그 충격에 잠시 의식을 잃은 채 실신했던 것이다.
“왕녀 전하! 당장 의무병을……!”
포복하여 피르에나의 곁으로 다가온 칼베라가 창백하게 질려서는 그렇게 말했지만.
“잠깐 다리를 붙잡고 있어요.”
거기까지 말한 후 두건을 풀어 입에 물었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예리한 단검을 뽑아들었다.
칼베라를 비롯한 병사 몇몇이 피르에나의 오른쪽 다리를 위에서 짓누르듯 꽉 붙잡았다. 피르에나는 숨을 크게 들이킨 후, 일말의 주저도 없이 화살이 박힌 곳을 나이프로 후벼냈다.
끔찍한 고통에 붙잡힌 다리가 파르르 떨렸지만, 상처를 벌려 화살 촉을 뽑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뚱이가 아닌, 기계를 조작하듯 일련의 과정을 태연하게 끝마쳤다. 오염되지 않은 얇은 천을 상처에 쑤셔 넣은 후, 입에 물고 있던 두건으로 환부를 묶었다.
마지막으로 싸구려 힐링 포션을 대충 뿌린 후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젠장, 왕녀 전하. 그런 끔찍한 짓거리는 제 눈에 안 보이는 곳에서 하면 안 됩니까?”
피르에나가 고통을 되삼키느라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고 있자, 다시 반대편에서 루칸다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르에나 역시 루칸다 쪽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전쟁이란 그리 고상한 게 아니라, 흉한 꼴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랍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피르에나의 행동은 야전 지휘자로써 경외받아 마땅할 정도였다.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전진 기지까지 그녀를 후송하려 했다면, 많든 적든 병력의 손실이 있었을 것이다.
야전 지휘자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는가? 그렇게 묻는다면 최선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었다는 대답을 돌려줄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피르에나가 유격대의 병사들을 단순한 장기말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칼베라가 루칸다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루칸다는 개의치 않고 조약돌 몇 개를 흙바닥에 던지기 시작했다.
내던져진 조약돌은 마왕군의 발리스타 진지 위치를 대략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피르에나가 잠시 의식을 잃었던 사이에 루칸다가 재빠르게 할 일을 끝마쳐 놓은 것이다.
피르에나는 재빠르게 발리스타 진지의 위치를 기억한 후 판단을 내렸다.
“우리는 언제나 결사의 기로에 세워지는군요. 언젠가 필연적인 죽음에 도달한다고 맹신하게 될 만큼.”
지면에 놓인 조약들을 시선을 옮겨가며 훑어보자, 칼베라가 피르에나의 의중을 읽고 바로 분대장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모두가 결국은 죽기 마련입니다.”
루칸다가 당연한 사실을 덧붙였고.
피르에나 역시 그의 말에 당연한 사설을 덧붙였다.
“언제나 오늘이 아닐 뿐이죠.”
“왕녀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리 믿겠습니다.”
거의 동시에 피르에나와 루칸다가 몸을 일으켜 가장 먼저 참호 밖으로 뛰쳐나갔다.
둘은 좌측과 우측으로 나뉘어 갈라졌고.
투다다다다!
리로드 애드온이 장착된 고정형 발리스타에서 화살 세례가 쏟아졌다. 분당 130발을 쏟아내는 발리스타가 설치된 진지는 총 여덟 곳.
그중에서 두 곳은 바로 직전에 루칸다에게 위치를 특정당한 상황이었다.
유격대의 병사들은 주저 없이 피르에나와 루칸다의 뒤를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 사지를 뛰어넘으면.
이 지옥 같은 언덕의 정상에 오른다면 말이다. 그들이 믿고 있는 낙원이 조금 더 가까워 보일지도 모른다는 ‘신앙’이 붉은 깃발처럼 흩날렸다.
생존이 보장되긴커녕, 거의 죽음이 확정된 전장에서도 르 만타나 유격대가 주춤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 * *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르에나는 잠기운에 푹 절여진 의식을 가까스로 깨우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날붙이과 날붙이가 충돌하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에 루칸다와 칼베라의 목소리가 뒤섞이고 있었다.
‘유격대는…….’
르 만타나 유격대는 어찌되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째선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해파리가 된 것처럼 몸이 물속에 붕 떠있는 감각 뿐이다.
‘나는…….’
피르에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가장 최근의 기억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려 했다.
‘쿠아가 황야. 패주. 나르시안의 성배. 나는…… 초극을…….’
그리고 루칸다의 검에 의해 난도질당하며 몸에 새겨진 끔찍한 고통과 감정이 상기되었다.
‘초극은…….’
뒤이어 그녀의 의식이 집중된 것은 초극의 결과였다. 초극에 도전한 끝에 무엇을 목격했던 것일까?
위대한 의지라고 불리는 초월적 존재의 단면을 목격하는 데 성공했을까?
피르에나는 뒤죽박죽으로 섞인 기억을 필사적으로 정리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피르에나가 가까스로 초극의 편린에 도달하려던 찰나.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칼베라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왕녀 전하, 오랜만입니다. 이번엔 실패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관을 향해 루칸다가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