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97화 (197/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97화

    나르시안의 아이들(3)

    지상에 도달한 수천 발의 헬파이어 미사일은 순식간에 세상을 지옥으로 변모시켰다.

    솟구치는 불길과 폭음.

    폭발의 순간 흩뿌려지는 섬광과 함께 짧막한 단말마가 뒤섞였다.

    시계의 전체가 붉은 빛으로 물드는 경험은 흔치 않을 것이다. 마치 이 세상 전체에 붉은 꽃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절경이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폭력 그 자체다.

    인류의 문명이 낳은 것이란 이렇게나 정교하고도 참혹한 폭력의 결정체였다.

    그리고 인식과 가치관의 경계를 넘어선 압도적인 폭력이란, 수십 년 넘게 축적된 관념을 뒤흔드는 법이다.

    일정 농도 이상의 폭력과 관용이란 결국 ‘아름다움’이라는 동일한 영역에서 수렴하게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자면, 백주월은 인간을 미치게 만들 만큼 아름다운 폭력의 화신이었다.

    문명과 문화가 빚어낸 폭력의 정수를 그대로 투영한 듯한 괴물이다. 일말의 위선과, 어줍잖은 가식이 도저히 다가갈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괴물 말이다.

    “이렇게나 끔찍한 괴물이 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해야겠네.”

    누자베스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우산을 기울였고, 우산의 위로 폭발의 파편이 우박처럼 후두둑 떨어져 튕겨나갔다.

    백주월은 뻗어져 있던 손을 거둬 균열을 닫았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수십 평방 킬로미터의 공간을 불지옥으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다시 자각하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딱히 같은 편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랬어? 그럼 내 피 그만 빨아라 염치없는 거머리 자식아.”

    물론 이런 기적에 가까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 누자베스의 혈액을 빠르게 연소시키며 외신에 필적하는 위계를 일시적으로 얻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수혈이 없다면 이런 능력을 발휘하긴커녕 목숨을 연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도 누자베스의 혈액도 무한한 것이 아닌지라, 수혈 링크가 걸려 있는 상황이라도 ‘에임페리얼 콜’의 지속 시간은 20분 정도가 최대였다.

    호쾌한 폭격에 베놈 편대가 일망타진된 덕분에 누자베스가 기분이 좋아진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는 백주월 쪽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뭐…… 그래, 엄밀히 따지면 우린 적도 아군도 아니지.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피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관계로 엮여서 꼴사납게 살아남기 위해 서로가 필요할 뿐이잖아.”

    “꼴사납게라. 적어도 그렇지 않았던 적은 지금까진 없었는데.”

    “공교롭네. 나도 마찬가지야.”

    누자베스가 키득키득 웃으며 백주월에게 우산을 내밀었고, 백주월이 우산을 받아들어 누자베스 쪽으로 기울였다.

    “그래서.”

    누자베스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며 담배갑을 꺼냈다.

    “나는 네가 좋아. 네 스타일을 좋아하거든.”

    “그게 무슨 고백이야? 마을 버스 같은 여자하고 사귀고 있다는 쪽인가, 아니면 폐병에 걸려서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의미냐?”

    “아니, 조금 닮았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전직 치과 의사였던 총잡이와 전직 작가였던 전쟁 군주란. 의외로 비슷하다고 생각했어.”

    누자베스가 담배에 불을 붙여 깊게 빨아들이며, 눈을 가늘게 뜨며 베시시 웃었다.

    “링고는 내가 맡는다.”

    손으로 총모양을 만들며 누자베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고, 그런 누자베스를 바라보던 백주월이 실소를 터뜨리며 어깨를 으슥였다.

    “전혀 안 닮았어, 얼간아.”

    그렇게 말하며 백주월이 누자베스의 입술 사이에 끼워져 있던 담배를 낚아채 입에 물었고, 천천히 담배 연기를 토해냈다.

    어쨌거나 남은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나란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지하 수로 및 지상을 이용하여 고성을 벗어나려 했던 녀석들은 총 16마리.

    한 마리도 빠짐없이 루칸다의 소름 돋는 추적 기술을 통해 처리되었다.

    다시 한 번 누자베스와 루칸다, 그리고 백주월 셋이 모이게 되었고. 바로 다음 절차를 확인했다.

    “마젤라나 곡면경을 지니고 있던 놈은 없었네. 그렇다면 아직도 고성의 어딘가에 보관 중인 걸까.”

    “이 섬에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반드시 나흐 만테아 놈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란 확증도 없습니다.”

    “루칸다, 남은 잔존 병력의 처리를 맡기지. 이 녀석은 워낙 난폭해서 정교한 작업을 맡기기엔 무리야. 고성을 통째로 박살내는 거라면 적임자겠지만.”

    누자베스가 그렇게 말하자, 백주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권능의 사용 방법만 옳다면 나도 대인전은 가능해.”

    “우라늄의 핵분열로 발생하는 열도 사용 방법만 옳다면 라면 끓여먹는데 사용할 수 있을 텐데, 그치?”

    “진짜 더럽게 깐죽거리네.”

    “어쨌거나 만에 하나 대응이 불가능한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으니 혈액의 사용량은 최소한으로…… 흐악!?”

    백주월이 슬쩍 뒤로 손을 뻗어 누자베스의 꼬리를 붙잡았다. 그대로 꼬리를 잡아 당기자, 누자베스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루칸다의 등뒤로 호다닥 도망쳤다.

    “야, 야…… 이 미친 새끼야! 꼬리를 왜 잡고 지랄이야! 가뜩이나 민감한 곳인데!”

    “아니 눈앞에서 거슬리게 자꾸 살랑거리길래.”

    “사형! 사형이야 이 또라이야! 루칸다 이 새끼 참수해 버려! 참수형이라고!”

    “전하, 놀고 있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누자베스가 백주월을 죽일 듯이 표독스럽게 노려봤지만, 이내 다음 작전의 개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성 내부를 제압한다. 백주월이 메인, 루칸다가 서브로. 루칸다는 탈출 인원의 추적을 우선하여 움직인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알았어, 남은 놈들을 적당히 처리하면 되는 거지?”

    누자베스가 한숨을 내쉬며 쓰고 있던 각모를 슬쩍 들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다듬었다.

    그 순간 각모에 눌려 보이지 않았던 고양이 귀가 얼핏 보였다.

    “외형 변이가 완벽하지 않군요. 마치 흡혈귀가 되다 만 권속처럼 보입니다.”

    “이 정도도 나름 노력한 거야. 더 정교하게 하자면 코스트가 안 맞아.”

    누자베스와 루칸다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백주월이 뒤늦은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면 누자베스 너하고 맺어진 흡혈귀도 있다는 얘기잖아?”

    그렇게 묻자, 누자베스가 능글맞은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나중에 보고 놀라지나 마라. 이 형님의 걸프렌드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성깔 더러운 광견이지.”

    “아니, 아니아니… 루칸다, 너…… 우리 스칼렛한테 왜 그러냐 진짜. 스칼렛은 나한테 천사야, 천사라고!”

    “솔직히 모르는 일 아닙니까? 한 번 뒤통수 때려본 놈입니다. 이번에도 또 무슨 뒤통수를 치려고 수작질을 꾸미고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미리 로아를 붙여놓긴 했지만, 역시나 그 흡혈귀 놈들이 무슨 꿍꿍이로 모여서 어떤 흉계를 꾸밀지 신경이 쓰이는군요.”

    “그럴 리 없어! 스칼렛은 이미 나한테 일편단심이라고…….”

    누자베스는 스칼렛을 믿는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지만, 루칸다는 아직도 모르겠냐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빅투스 한 마리만 보내도 둥지 아릿카사는 전멸입니다. 그 만큼 위협적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고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알고 있지만…….”

    인빅투스가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이 시점에서 누자베스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9할 이상이 제한당한다.

    한 발만 삐끗해도 전멸로 이어지는 루트가 열릴 수 있는 것이다.

    인빅투스가 바체트 열도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혈족 외의 모든 종족은 흡혈귀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 * *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꿈에도 그리던 피르에나 왕녀의 부활이 코앞이었다.

    그녀의 다정한 미소.

    그녀가 꿈을 꾸듯 읊조렸던 낙원의 이야기.

    핏물과 진흙을 뒤집어 쓴 채, 피르에나 왕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전우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모두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신분에 관계없이 만민이 스스로 국가의 주인이 되는 그 낙원은 눈이 멀어버릴 만큼 찬란하게 느껴졌다.

    종족에 상관없이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그 낙원을 위해 싸워왔던 것이다.

    칼베라는 유리관에 보관된 피르에나 왕녀의 파편을 품에 넣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가까스로 배양에 성공한 이 시작품을 어떻게든 지켜야만 했다.

    아직 그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모두가 전쟁은 끝났다고 입을 모아 얘기했지만. 칼베라의 싸움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었다.

    모두가 낙원이란 어린아이의 망상에 불과했다고 단언했지만. 칼베라가 품은 믿음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칼베라가 낙원을 갈망하기 시작한 시점 말이다. 아마도 그가 아직 용병으로 돈벌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시기가 아닐까?

    10살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인간 아이가 노예병으로 징집되어 칼베라의 앞에 나타난 순간.

    칼베라는 지독한 부조리를 느꼈다.

    그래, 그런 부조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신분과 종족의 갈등이 어떤 비극을 낳는지 두 눈으로 또렷이 목격한 순간.

    칼베라는 이 세상이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도대체 뭐였을까?

    1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전장으로 몰아넣는 세상이란. 어린애를 고기 방패로 사용하는 걸 허용하는 이데올로기란.

    범인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대의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됐다.

    어린애에게 칼을 쥐어주고, 죽음이 확정된 사지로 몰아넣어서는 안 되었다.

    설령 그것이 태양의 어머니 스텔라의 뜻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요, 칼베라. 당신과 우리는 닮았네요. 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부조리 속에서 남들처럼 태연하게 살아 숨쉴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닮았어요.’

    그런 칼베라의 앞에 나타난 인물이 피르에나 왕녀였다. 왕위 계승권에서 한참 떨어진 글로레나 왕조의 공주.

    어렸을 적부터 소름 돋을 만큼 영특한 아이라는 소문이 잠시 떠돌았지만, 어차피 왕족의 여식이란 이웃 국가에 보내는 사치품의 개념에 불과했다.

    하지만 피르에나 왕녀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믿고 있는 더 가치 있는 일에 쓰려고 했다.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지 못하고.

    정해놓은 역할에 순종하지 못하였으며.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일어나, 정해지지 않은 행동으로 낙원을 증명하려 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고 수긍하긴 쉽고. 남들은 다 잠자코 있는데 왜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핀잔을 주기도 쉬우며. 이 세상은 그리 잘못된 게 없다고 근거 없는 소리를 입에 담는 것 역시 용이하다지만. 그래도 당신과 우리처럼 가슴에 품은 답답함을 토해내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별종도 있는 법 아니겠어요?’

    피르에나 왕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소리는 칼베라에게 복음이 되었다.

    그녀는 신이었고, 그녀의 말은 성경이었고, 칼베라는 신의 뜻을 대행하는 광신도가 될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었다.

    아직도 붉은 깃발이 망막에 새겨진 듯 선명했다. 고지를 향해 내달리는 전우들의 옆모습과 거친 숨소리. 비명과 포성, 화약의 내음과 피비린내.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서 펄럭이던 붉은 종달새의 깃발. 붉은 혁명이, 인민들을 위한 모든 노력과 희생이.

    칼베라의 머릿속에서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날숨으로 거칠게 토해졌다. 칼베라는 필사적으로 내달린 끝에 가까스로 멈춰섰다.

    저벅.

    어둠에 뒤덮여 희석된 지평선의 중앙을 가로막듯 짙은 그림자가 발소리를 울렸다.

    “아아…….”

    칼베라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스릉!

    검을 뽑았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 촌구석에서 깡패 놀이는 즐거웠나?”

    기잉!

    검집에서 뽑힌 칼날이 미세하게 떨리며 주변의 공기를 울렸다.

    “루칸다…….”

    칼베라가 그 증오스럽고도 그리웠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루칸다는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만, 안부를 묻는 것보다 먼저 처리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군.”

    루칸다는 칼베라가 소중히 품고 있는 유리관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피르에나를 넘겨.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주지.”

    “루칸다아아아……!!”

    칼베라가 각혈하듯 분노를 토해내며 검을 치켜들었다. 똑같은 비극을 되풀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오늘 밤에야말로 당신을 지켜내겠습니다. 설령 그 상대가 그림자의 왕일지라도.

    그렇게 되뇌며 칼베라가 루칸다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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