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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96화 (196/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196화

나르시안의 아이들(2)

스칼렛은 맥이 풀린 사람처럼 푹신한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침대는 구름만큼이나 부드러워 몸이 그대로 빨려들어 가는 감각이 들 정도였다.

“하아…….”

하지만 이런 안락함을 느낄 여유가 없을 만큼 기진맥진했다. 스칼렛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빙글 돌렸다.

오늘 카르메네르의 진혼식에 참석한 게 화근이었다. 설마하니 바르베라와 유대를 맺어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될 줄이야.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는 예상했지만, 이런 전개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일단 오늘은 어떻게든 둘러대며 대답을 유예했다. 물론 카르메네르도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며 흔쾌히 유예를 허락했고 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문제를 뒤로 미룬 것뿐이다. 언젠가 들킬 것이고, 그때는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할 문제였다.

‘시간의 흐름은 무정할 만큼이나 빠르군. 그렇게나 귀여웠던 아이들이 벌써 혈족의 정점에 서는 지도자가 된 건가.’

적어도 스칼렛의 기억 속에선 그랬다.

네비올로와 바르베라는 어렸을 적부터 귀여워한 조카아이들이었다.

카르메네르와는 서로를 죽이려 할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네비올로와 바르베라는 곁에 두고 많은 것을 가르칠 만큼 아낀 아이들 아닌가?

그런 아이들이 벌써 모든 혈족의 위에 군림하는 실권을 쥐게 된 것이다. 아마도 지금에 이르러선 나르시안의 직계 자매들은 일선에서 물러나 얌전히 있어야 하는 존재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세대가 교체되었고, 상속 신분이란 이름이 지니는 의미도 사뭇 변질되었다.

절대적인 공포의 화신으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고대의 예술 작품으로 인식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안전한 저택의 안쪽에 두고 애지중지 보살피는 것 외에 쓸 구석이 없는 골동품이다.

“……아직 현역이라고 생각했건만.”

스칼렛은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고, 손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주홍빛의 실내등의 불빛을 올려봤다.

아마도 카르메네르는 상속 신분 세대의 끝을 얘기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지루하고도 긴 시간이 지나버렸고, 이제는 상속 신분이 아닌 제1신분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렇기에 바르베라와 유대를 맺고, 안전과 안락이 보장된 삶을 권한 것일지도 모른다.

스칼렛에겐 보장된 노후 대책을 제공하며, 바르베라에겐 더 없이 영광스러운 훈장을 수여하는 것이다.

상속 신분과 유대를 맺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바르베라는 권력 세습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테니까.

‘그 아이들이 어렸을 적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얘기가 현실이 되어 돌아오다니.’

희미하지만 기억하고 있었다.

네비올로와 바르베라는 어렸을 적부터 메를로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나?

성년을 맞이한 뒤에 진조의 일원이 된다면, 그때는 메를로와 유대 관계를 맺을 거라고 말이다. 메를로도 그러자고 가볍게 승낙했고…….

‘아니, 그때는 어렸을 때니까. 별생각 없이 말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크면 다 잊어버릴 거라고…….’

그저 귀엽게만 봤던 조카들은 의외로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단의 원인을 추적하자면 그때부터 뭔가 잘못된 희망을 줬던 걸지도 모른다.

‘잠깐, 그러면……?’

네비올로는?

네비올로는 그저 어렸을 적에 철없이 나눴던 약속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스칼렛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과 자매들이 어떤 관계였는지를 떠올려 보자면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원래 자매란 ‘철천지원수’의 동의어다.

입 안에서 씹고 있는 빵의 부스러기까지 손가락을 넣어 모조리 긁어내 뺏어 먹지 않으면 분해서 잠이 오지 않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불길한 예감이 구현화된 듯 침실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모님, 네비올로입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 그…… 그래. 들어오게.”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자 가벼운 차림새로 환복을 끝마친 네비올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비올로는 카르메네르의 젊었을 적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 듯 빼닮아 있었다.

전체적으로 늘씬한 실루엣과 날카롭게 가다듬어진 턱선과 눈매. 인간의 나이로 치자면 30대 중반 정도로 보일 만큼 성숙한 외견.

그리고 창백할 만큼 투명한 속살이 비쳐 보일 만큼 얇은 란제리 차림. 스칼렛이 마른침을 삼키며 네비올로를 바라보자, 네비올로는 멋쩍은 미소를 머금으며 들고 온 와인잔 두 개를 슬쩍 들어보였다.

“오늘은 여러모로 피곤하셨을 것이라 생각되어 기분이라도 풀어드릴 겸 찾아왔습니다. 혹여나 휴식에 방해가 된다면 곧장 물러나겠습니다.”

말은 꽤나 번지르르했지만.

네비올로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눈빛이었다.

이미 카르메네르에게서 권력 세습을 약속받은 첫째 딸이다. 네비올로는 모든 혈족의 위에 군림하는 흡혈귀의 여왕이란 말이다.

그런 네비올로를 거절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혈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존재해서도 안 될 것이다.

“혈족의 군주께서 이런 늙은이까지 신경 써주려 귀한 발걸음을 하셨는데 어찌 그리하겠나?”

“그렇게 치켜세워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대모님의 앞에서는 언제나 미숙한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네비올로는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인사한 후 스칼렛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침대 위에 나란히 걸터앉은 후 와인병을 기울였다.

스칼렛이 먼저 붉은 액체를 한 모금 머금은 후 네비올로의 눈치를 살폈다. 어깨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리고 네비올로는 예술 작품이라던가, 절경을 목격한 사람처럼 황홀한 시선으로 스칼렛을 지긋이 바라봤다.

“저는 어머니께서 꽤나 짓궂은 부탁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네비올로는 눈을 살짝 내리깔며 스칼렛의 발끝으로 시선을 향했다. 티 하나 없이 매끈하고 앙증맞은 발가락이 보였고, 네비올로는 깊게 날숨을 토해내며 이어 말했다.

“어쩌면 일부러 대모님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아닐까 싶을 만큼.”

“언니라면 그럴 수 있지. 원래 심성이 고약한 여자였으니까.”

스칼렛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나 같은 늙은이가 아니라 좀 더 장래성을 기대할 수 있는 젊은 아이가 바르베라의 반려로 어울리네. 바르베라는 유능하고 우수한 아이일세.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체와 뭐가 좋아서 유대를 맺겠나?”

“예, 저도 바르베라는 대모님의 상대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네비올로는 시선으로 핥듯이 스칼렛의 다리를 천천히 훑었다.

발끝에서부터 매끈하게 뻗은 종아리까지. 탐스러운 과실과 닮은 무릎에서 부드러워 보이는 허벅지까지.

붉은 달의 메를로는 모든 혈족이 동경하고 선망하던 상속 신분이다. 흡혈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야수성을 들끓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을 지닌 존재였다.

“그리고 오늘 대모님께서 어머니의 제안을 바로 승낙하시지 않는 걸 보고 깨달았습니다.”

스칼렛의 등골이 서늘했다.

설마 외종과 유대를 맺은 걸 들킨 것일까?

그것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대상에게 들키고 말았다. 네비올로는 흡혈귀 전체를 통솔하는 여왕이다.

물론 상속 신분인 스칼렛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진 않을 것이다. 그저 어딘가에 가두어 두고 근신 처분을 하는 것이 가장 가혹한 처벌일 것이다.

하지만 누자베스의 경우엔 사정이 달랐다. 상속 신분과 멋대로 유대를 맺은 외종에게 네비올로가 자비를 베풀 수 있을까?

아니다. 결코 그럴 리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을 준 뒤에 완전히 소멸시킬 수도 있었다.

와인잔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해보려 했지만, 네비올로는 더욱 거리를 좁혀오며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역시 대모님께서도 바르베라가 아닌 저 네비올로를 마음에 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네비올로의 손이 스칼렛의 허벅지 위에 살포시 올려졌다. 그리고는 허벅지의 안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흐트러진 숨을 토해냈다.

열기가 느껴질 만큼 상기된 숨소리와 흥분에 젖은 눈동자가 선명히 보였다.

‘이건 또 무슨 오해를…….’

불행인지 다행인지.

네비올로의 착각 덕분에 이미 외종과 유대를 맺었다는 사실은 들키지 않게 되었다.

오늘 바로 카르메네르의 제안을 승낙하지 않은 이유가 네비올로 자신과 유대 관계를 맺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멋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네비올로…… 온전한 여왕이 되기엔 아직 많이 미숙하구나.’

네비올로는 바르베라 만큼이나 귀여워한 조카아이다. 이런 미숙하고 서툰 모습을 보자면 복잡한 심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가르칠 것이 많았고, 마냥 상냥하게 가르쳐줄 시기는 지났으니 말이다.

스칼렛은 네비올로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고, 상체를 살포시 숙여 네비올로의 목덜미 쪽에 얕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는 동시에 네비올로의 손목을 붙잡아 더욱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겼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지 않나…….”

스칼렛의 애절하고 달콤한 목소리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네비올로의 이성이 완전히 소멸되었다.

네비올로가 스칼렛의 어깨를 붙잡아 침대 위로 쓰러뜨렸고, 그녀의 위로 올라타며 거칠어진 숨을 헐떡였다.

“이런 짓은…… 언니의 의지에 반하는 짓일세. 혹여 들키기라도 한다면…….”

연홍빛으로 상기된 뺨을 숨기려는 듯 얼굴을 베개에 파묻으며 스칼렛이 그렇게 말하자. 네비올로는 짐짓 화가 난 어조로 대답했다.

“저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닙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린 아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언제까지나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는 아이일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스칼렛이 말끝을 흐리며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네비올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제는 제가 혈족의 군주입니다. 대모님의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진조가 되었습니다.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침대 위에 붉은 물감이 쏟아진 듯 스칼렛의 적발이 흐트러져 있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 완벽한 미의 관념이 구현화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아름다웠다.

흡혈귀가 아닌 무언가 들어본 적도 없는 아름다운 생물체를 목격한 듯한 감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런 아름다운 존재를 잠자코 동생에게 넘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네. 너와 이렇게 맺어지는 날을 기다렸건만, 언니의 말을 거역하는 것만이 두려울 뿐일세.”

스칼렛의 커다란 눈망울에 맺힌 눈물은 진심처럼 느껴졌다. 네비올로는 허둥대며 스칼렛의 눈물을 훔쳐낸 후 바로 말을 꺼냈다.

“존귀한 분이시여. 이 세상은 더 이상 당신이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변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에 맹세코 그리 될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네비올로 너를 믿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겐가?”

“예, 대모님.”

“내가 확실히 안심할 수 있도록 분명한 형태를 결과로 낼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모든 대답에 주저나 망설임이 없었다.

스칼렛은 눈물 젖은 눈으로 네비올로를 올려다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네비올로의 목에 팔을 감아 꼬옥 끌어 안았다.

네비올로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스칼렛은 웃음을 삼켰다.

‘미안하게 됐구나, 네비올로. 이번 수업은 조금 가혹할지도 모르겠어.’

사랑스러운 조카에게 가르쳐 줘야만 하는 교훈이었다.

흡혈귀의 싸움은 생각 이상으로 치사하고 더러우며, 상상 이상으로 질척거리고 비열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줘야만 했다.

자매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보다 이렇게 조카를 상대하는 게 얼마나 편한 일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스칼렛은 챙길 수 있는 이득을 하나씩 헤아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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