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95화 (195/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95화

    나르시안의 아이들(1)

    바르베라가 이변을 눈치챈 건 아주 약간의 조짐 덕분이었다.

    실내를 타고 흐르는 묘한 기류가 그녀의 촉을 건드리고 있었다. 수천 년을 넘는 시간 동안 축적된 경험에서 비롯되는 직감이란. 때때로 미래예지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바르베라는 제자리에 서서 연회장 전체를 훑어본 후 조용히 구석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바르베라의 움직임에 가장 먼저 기민하게 반응한 건 인빅투스의 일원이자, 히플린의 프리스커스 ‘뫼니에’였다.

    연미복 차림의 중후한 노신사의 모습이었지만, 실제의 항렬은 바르베라의 종손에 해당했다.

    뫼니에는 바르베라가 그랬던 것처럼 연회장을 조용히 둘러본 후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바르베라는 뫼니에가 다가오는 걸 확인한 후 입모양을 가리려는 듯 와인잔을 들며 말했다.

    “이곳에 모인 혈족의 출생 성분은 모두 확인된 것이 맞겠지요?”

    “대고모님께 그런 식으로 무안을 주시는 취미도 있었는지는 몰랐습니다.”

    어중이떠중이 혈족의 파티가 아닌, 첫 번째 상속 신분인 카르메네르의 진혼식이다. 초대받은 혈족은 모두가 확실한 출생 성분을 증명할 수 있는 고혈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뫼니에쯤 되는 흡혈귀가 초대객의 리스트를 헷갈리는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을 리도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랬다.

    바르베라 역시 뫼니에의 일처리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연회장 안을 감도는 묘한 기류가 신경 쓰일 뿐이었다.

    “뫼니에.”

    바르베라가 짧고 절도 있는 어조로 그의 이름을 다시 입에 담은 후에야, 뫼니에 역시 진지한 자세로 다시 대답했다.

    “혈계의 지도자시여. 천하무적단은 당신의 모든 의문과 의혹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 안에 다른 의도를 품은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순한 초대객일지, 아니면 당신이나 나와 같은 인빅투스의 일원일지. 혹은 나 자신일지, 뫼니에 당신일지. 확실한 건 무엇 하나 없습니다만.”

    바르베라는 뫼니에를 자기 자신 이상으로 믿고 있었다. 뫼니에는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충직하게 바르베라의 곁을 지켜온 혈족이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다고 해도, 한 가지만 믿을 수 있다면 바르베라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뫼니에의 충의를 택할 것이다.

    바르베라는 커다란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날숨처럼 얕게 다음 말을 토해냈다.

    “찾아내서.”

    바르베라의 시선이 뫼니에를 향했다.

    그 탁하고도 붉은 동공은 명백한 메시지를 머금고 있었다.

    “영원한 안식을 선물하세요.”

    피의 사냥 신호다.

    이것만이 인빅투스의 존재 의의이기도 했다. 혈족의 위협이 되는 존재를 추적하여, 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시키기 위해 조직된 집단이 ‘천하무적단’이었으니까.

    그리고 피의 사냥을 허가할 권리를 지닌 것은 총정관 바르베라였다.

    그렇다면 뫼니에가 돌려줄 대답은 하나 뿐이다.

    “세상은 마땅히 그리 될 것입니다.”

    이 세계 최강의 무력 집단 인빅투스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 *

    “어떠니, 이 언니가 직접 행차하신 덕분에 이렇게 자매들이 다시 모이니 나쁘지 않지? 도대체 이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네.”

    카르메네르가 어린애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실제로 카르메네르의 외형은 상당히 작아져 있었다. 스칼렛의 마지막 기억 속에선 30대 중반 정도의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몇천 년만에 다시 만나게 된 카르메네르는 6살이라던가, 8살 정도로 보이는 유아의 모습이었다.

    그 조그마한 손으로 와인잔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상당한 괴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모든 자매가 모인 건 아니지만.”

    스칼렛은 자신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카베르네를 향해 시선을 주며 대답했다.

    나르시안의 딸들 중 셋이 모이게 된 것이다.

    이번 진혼식의 주인공인 카르메네르.

    그리고 메를로와 카베르네였다. 카베르네도 얼마 전까진 해체된 상태였지만, 이번 진혼식을 위해 카르메네르가 미리 사전 작업을 마쳐 놓은 것이었다.

    카르메네르의 말 한 마디면 바체트 열도의 지배 세력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카베르네가 다시 원형을 되찾을 수는 없었을테니까.

    아이처럼 신나서 떠들고 있는 카르메네르, 그리고 재구성의 후유증으로 강렬한 공복감에 시달리고 있는 탓에 준비된 요리를 허겁지겁 삼키고 있는 카베르네.

    그리고 그녀들 사이에서 뚱한 표정을 일관하고 있는 스칼렛까지.

    나르시안의 딸들이라 불리는 전설적인 반 르낙시아의 존재들이 모인 자리라고 하기엔 꽤나 산만한 분위기였다.

    카르메네르가 앉은 방향의 뒤쪽에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네비올로는 자매들의 재회를 방해할 생각은 없는지 잠자코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정말 얼굴이나 보자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 아니겠지? 그 콧대 높으신 첫째 딸께서.”

    스칼렛의 목소리에 가시가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서로의 진혼식을 축하해 줄 만큼 살가운 자매들은 아니지 않나?

    게다가 스칼렛이 ‘붉은 달’이라고 불렸을 시기엔 서로의 혈족을 사냥하고 다녔을 만큼 흉흉한 관계였다.

    메를로는 자매들 중에서도 아버지의 위광을 쫓으려는 본능이 가장 강한 아이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첫째 딸인 카르메네르가 곱게 보일 리는 없었다.

    메를로는 결국 아버지의 형태를 닮으려고 발버둥친 끝에 초극을 시도하였고, 스스로 자멸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됐지만 말이다.

    카르메네르는 스칼렛의 와인잔에 테네브레의 눈물을 따라주며 빙긋 웃었다.

    “영겁의 밤을 걷는 상속자라 하지만.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 역시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할 뿐이란다.”

    “아버지께서 들으셨다면 꽤나 기뻐하셨을 말을 하네.”

    “메를로. 우리는 영원하지 않아. 혈족이 아닌 것들과 마찬가지로 필멸의 운명을 부정해서는 안 돼.”

    “노망이 왔나 봐, 언니? 혈족은 불멸이라는 사실까지 잊은 걸 보니까.”

    스칼렛도 카르메네르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지만, 웃음기가 전혀 담기지 않은 눈빛이었다.

    카르메네르는 턱을 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있잖아, 메를로. 나는 더 이상 너와 싸울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 싸우긴커녕 화를 내는 것조차 무서워졌어. 이렇게나 스스로가 쇠약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지. 그리고 왜 조금 더 일찍 둥글게 살지 못했는지에 대해 후회하거나.”

    스칼렛은 내심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카르메네르가 쇠약했다는 얘길 들었지만. 아무리 쇠약했어도 나르시안의 첫째 딸이다. 첫 번째 상속 신분이자, 가장 짙은 원죄를 상속받은 후계자였다.

    수천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세상 전체를 적으로 돌려도 눈썹 한 가닥 까딱하지 않았던 여자다. 오히려 세상을 향해 혈족을 적으로 돌릴 자신이 있냐고, 엄포를 놓았던 여자 아닌가?

    그런 카르메네르가 이렇게나 약한 소리를 할 줄이야. 카베르네도 깜짝 놀라 음식을 집어 입으로 옮기던 손을 멈췄다.

    “……언히 후히마…….”

    “카베르네. 음식은 삼키고 말을 하렴.”

    “죽지마아…… 언니…….”

    “당장 죽는다는 말은 아니란다.”

    “정말?”

    “정말이고말고.”

    카르메네르는 생글생글 웃으며 카베르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시선을 다시 스칼렛에게 향하며 말했다.

    “그래, 메를로 네 말대로 이렇게 진혼식을 축하받기 위한 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럴 줄 알았어.”

    스칼렛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카르메네르는 고개를 돌려 뒤쪽에 서 있던 네비올로를 슬쩍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첫째인 네비올로는 내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지만.”

    네비올로는 나르시안의 피를 계승하는 자리에 선 흡혈귀다. 초대 흡혈귀였던 나르시안. 그리고 그의 첫째 딸인 카르메네르가 2대. 현재에 이르러 네비올로가 3대째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모든 혈족의 정점에 서는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니 카르메네르가 더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카르메네르가 쇠약해지며 자꾸만 더 눈에 밟히는 쪽은 둘째 딸인 바르베라였다.

    “둘째인 바르베라는…… 지금은 경험이라도 쌓게 할 겸 인빅투스를 맡겨 놓았는데.”

    “나중에 정원으로 불러들일 생각이야?”

    스칼렛이 그리 묻자, 카르메네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도 그리 사이가 좋은 자매는 못 됐잖니.”

    카르메네르는 자신의 딸들인 네비올로와 바르베라가 자신들처럼 서로를 적대하며 피를 볼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원의 관리는 오로지 네비올로에게 전적으로 맡기기로 한 것이다.

    자매들이 다시 권력 다툼을 하는 걸 원치 않았기에 말이다.

    “그래서 메를로 네게 부탁이 있단다.”

    “언니는 항상 협박을 부탁이라 표현했지만.”

    스칼렛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쏘아 붙였지만, 카르메네르는 멋쩍은 미소를 머금었을 뿐이다.

    “그랬었나? 하지만 이번엔 진짜 부탁이야.”

    카르메네르는 쿡쿡 웃은 후 말했다.

    “우리 바르베라를 어떻게 생각해? 둘째긴 해도 위계나 혈질의 순도는 우리와 같은 상속 신분에 비견될 정도로 우수한 아이인데.”

    “어떻게 생각하냐니? 그야 물론 바르베라는 혈족의 자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그제야 스칼렛의 눈에 카르메네르의 야릇한 미소가 보였다. 그녀가 무엇을 부탁하려 하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바깥에서 대기하던 흡혈귀가 거대한 두루마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언니 설마?”

    “그래, 그 설마란다. 메를로 네가 우리 바르베라를 받아준다면 이 언니는 안심하고 안식에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니?”

    유대 관계를 맺어주길 바라는 것이다.

    물론 상속 신분과 제1신분이라는 신분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바르베라의 어머니는 나르시안의 첫째 딸 카르메네르. 실제로 상속 신분과 큰 차이는 없었다.

    게다가 바르베라가 혈족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우수한 흡혈귀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뿐만인가?

    바르베라는 스칼렛의 말이라면 개처럼 기어다닐 수도 있을 만큼 순종적인 아이다. 인빅투스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만약 이 제안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스칼렛은 별 고민도 없이 수락했을지도 모른다. 바르베라는 어렸을 적부터 귀여워했던 아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미 유대 관계가 성립된 상황에서 또 다른 유대를 맺을 수는 없었다.

    스칼렛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카르메네르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네 마음에 들기엔 부족하긴 하겠지. 내 딸이라 귀엽게 보고는 있지만, 메를로 너 같은 상속 신분의 눈에 차기나 하겠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맨손으로 부탁하진 않을게.”

    그 말과 동시에 테이블 위에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두루마리는 바체트 열도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가 그려진 세계 지도였다.

    이렇게 세계 지도에서 보자면 바체트 열도란 작은 점처럼 보일 뿐이었다.

    스칼렛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카르메네르가 와인병을 불쑥 내밀었다.

    “원하는 만큼 붉게 적시렴. 네가 바르베라를 받아준다면 이 지도에 붉게 물든 곳은 모두 네 정원이 될 터니까.”

    “아니, 아니…… 정말 그런 게 아니라…….”

    붉게 물든 만큼 주겠다니.

    확실히 혼수치고는 과했다.

    카르메네르가 세상 전부를 집어 삼키지 않는 이유가 그저 귀찮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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