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94화 (194/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94화

    용의자들(4)

    [누자베스 :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값비싼 물건이 도대체 뭘까? 마젤라나 곡면경 아닐까 싶은데.]

    [루칸다 : 붙잡아서 확인해 보면 될 일입니다.]

    대답과 동시에.

    루칸다가 빠르게 어둠 속에서 질주하기 시작했다. 밤의 어둠 속에서 도망치는 사냥감을 추격하는 일은 루칸다의 전문 분야였다.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오늘처럼 달빛 조차 희미한 짙은 밤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루칸다가 지하 통로 쪽으로 향한 직후. 홀로 남겨진 백주월의 앞에 트롤 전사 한 무리가 우르르 나타났다.

    [백주월 : 왠지 내가 더 귀찮은 일을 맡은 기분이 드는데.]

    [누자베스 : 기분 탓이겠지. 원래 남의 여친 가슴이 더 커보이는 법이야.]

    [백주월 : 번거롭게 만드네. 에임페리얼 콜만 쓸 수 있었어도 순식간에 모조리 날려버릴 수 있을 텐데.]

    백주월은 스텔라에게 받은 고유 권능이 대부분 봉인당한 상황이다. 무리해서 권능을 발동시키려 했다간 수십 초도 채 버티지 못하고 사망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니 현재는 군용 나이프와 비교적 구조가 단순한 회전식 탄창 형태의 권총을 운용하는 게 고작이었다.

    [누자베스 : 자, 그럼 용사님은 적당히 녀석들을 요격하며 천천히 물러나자고. 둘러싸여서 포위당하는 것만 조심하면 어려울 것도 없지?]

    [백주월 : 망할 새끼, 말은 쉽지.]

    [누자베스 : 하핫! 꼬우신가요? 꼬우면…… 아시죠?]

    트롤 전사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총성이 뒤섞였다.

    총구에서 발포된 탄환은 정확하게 갑옷의 틈새를 꿰뚫었고, 선두에 나섰던 트롤 전사 두 마리가 맥없이 고꾸라졌다.

    아무리 스텔라에게 받은 용사의 권능을 잃었다고 해도. 백주월이 지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백주월은 사칙연산보다 먼저 살인을 배운 인간이다. 더러운 밤의 거리에서 십수 년을 살아남았고, 수많은 인간 말종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만큼의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생존을 장담할 수도 없고, 목숨을 보장할 수도 없는 밤은 백주월에게 일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처럼 말이다.

    이렇게나 불합리한 진흙탕에서 악취를 풍기며 싸우는 것이 백주월의 유일한 전공 분야였다.

    카앙!

    도끼날이 백주월의 옷깃을 스치며 지면에 처박혔다.

    참격을 피해낸 백주월은 리볼버의 탄창을 비틀었고, 열기에 달아 오른 탄피가 새하얀 발포연과 함께 허공에 튀어올랐다.

    쉬익! 콰득!

    허공에 치솟은 탄피가 추락하기도 전에 그사이로 나이프가 휘둘러졌다.

    묵빛의 군용 나이프가 트롤 전사의 목덜미를 정확하게 찍었다.

    “세 마리.”

    우득, 우드득!

    트롤에 목에 박힌 나이프를 비틀어 뽑아내며 백주월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숫자를 헤아렸다.

    촤아악!

    트롤 전사의 목에서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고.

    투두둑.

    그제야 치솟았던 탄피가 석재 바닥에 떨궈졌다.

    순식간.

    체감상으로는 백주월의 시간만이 느릿하게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백여 마리에 달하는 트롤 전사들을 눈앞에 두고, 단신으로 이렇게나 태연하게 응전할 수 있는 전사가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이미 발치에 트롤 전사의 피가 흥건했지만, 백주월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나이프와 권총 사격이라면 구역질이 나올 만큼 질리도록 해본 솜씨다.

    움직임은 과장되지도 않았고, 필요없는 동작도 전혀 섞이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정갈하게 보일 만큼 효율적인 살인 기술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번에 상대하는 건 적대 조직의 행동 요원들이 아닌, 트롤 전사들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백주월이 곤란할 이유는 없었다. 나이프로 찌르고, 탄환을 박아 넣으면 죽는다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경쾌한 풋워크를 계속하며 거리를 벌리는 동시에 면 범위의 제압 사격. 그리고 가까스로 거리를 좁혀온 트롤 전사를 간단하게 나이프로 제압하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누자베스 : 하여간 파워 밸런스 설정을 어떤 저능아가 했는지는 몰라도 끔찍하네. 저런 괴물한테 뭐한다고 고유 권능까지 준 건지 모르겠어.]

    스텔라에게 받은 고유 권능 ‘에임페리얼 콜’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해도 백주월이 일기당천의 먼치킨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누자베스의 눈으로 봐도 그 사실은 명확했다.

    에임페리얼 콜을 봉인당한 백주월의 전투력은 둥지의 챔피언인 로아와 비견될 정도였다.

    본래 지니고 있던 재능과 소질과 능력.

    그리고 용사로 선별되며 얻게 된 초인적인 육체 능력.

    이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리한 싸움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짙은 투쟁 본능까지.

    물론 다른 챔피언들과 비교하자면 반항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게 유일한 문제이긴 했지만, 대응책이 있는 이상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여간내기가 아니군.”

    그리고 백주월이 트롤 전사들을 상대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건 누자베스뿐만이 아니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백주월의 전투를 주시하던 칼베라는 낮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병기의 사용을 허가한다. 무슨 꿍꿍이로 이곳을 방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피잉!

    도탄되어 탄도가 꺾인 탄환이 칼베라의 바로 옆 벽면에 박혔다. 하지만 칼베라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죽여라.”

    칼베라의 허가가 떨어진 것과 동시였다.

    [누자베스 : 어, 어어? 용사님 혹시 싫어하는 벌레 있어요?]

    [백주월 : 뭐? 벌레? 무슨 개소리야!]

    [누자베스 : 아니…… 혹시 거미 같은 거 싫어하나 해서 확인해 본 거야. 좀 징그럽잖아.]

    [백주월 : 헛소리 그만하고 퇴각 경로 검토나…….]

    [누자베스 : 전방 10미터. 우측. 온다.]

    쿠웅!

    와르르르!

    굉음과 함께 벽면이 무너지며 석회 가루가 뿌옇게 사방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실체를 확인하기도 이전이었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이 지면을 내리찍는 소리가 들려왔고.

    끼기기긱.

    유압 실린더의 기동음이 연기 안쪽에서 울렸다. 백주월이 육안으로 파악하기도 전에 누자베스가 정보를 보충했다.

    [누자베스 : 베놈 여덟 마리. 이 새끼들 동네 깡패들인 줄 알았더니 저런 흉흉한 물건도 취급하고 있었네.]

    백주월이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난간을 짚어 도약한 후 아래층으로 뛰어내렸고.

    투다다다다!

    동축 기관총의 소사음과 함께 방금 전까지 백주월이 서있던 자리가 초토화되었다.

    판단이 조금만 느렸더라면 벌집이 될 뻔한 찰나였다.

    [백주월 : 야이 개새…… 일찍 말해! 저런 게 있으면 빨리 말하라고!]

    [누자베스 : 말해줬잖아! 말해줬다고! 내가 이 갑갑한 떼껄룩 몸뚱이까지 써서 기껏 도와주고 있더니 불평하지 마! 아주 그냥 내가 엄마인 줄 아냐!!]

    [백주월 : 구경이 어느 정도 되어야 뚫리는지나 말해!]

    [누자베스 : 이젠 몰라. 기껏 살려줬더니 아주 혼자 잘났지! 어? 나도 어디 가서 이런 취급당하는 줄 알아? 어? 그냥 혼자 잘났다고 바득바득 대들기나 하고, 됐어! 그렇게 맘에 안 들면 각하 챔피언 하지 마! 각하도 시혁이네 각하나 텅비드 엄마 할 거니까.]

    [백주월 : 이런 병…… 아니, 미안해. 미안하니까 제원 좀 알려줄래?]

    [누자베스 : 두개골 안에 파스타 들어 있는 게 아니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저 갑판이 권총으로 뚫리겠냐?]

    [백주월 : 내 인생 최대의 오점은 너하고 엮인 거야, 누자베스…….]

    [누자베스 : 뭐, 뭐!? 오점? 이 배은망덕한 자식이 진짜…… 누구는 좋아서 이런 줄 알아? 나도 가능하면 류시혁 그 자식의 따뜻한 젖꼭지나 빠는 게 편했다고!]

    [백주월 : 아니, 근데 왜 너 아까부터 그 자식 계속 들먹이냐?]

    둘의 지리멸렬한 대화를 흘려듣던 루칸다가 참다 못 해 입을 열었다.

    [루칸다 : 소화기로 베놈을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다. 적당히 응전하며 퇴각을 우선하도록.]

    [백주월 : 거리 확보됐으면 이쪽도 퇴각하지. 그런데 왜 고블린 형씨가 대장이 아닌 거야? 누자베스 저 새끼보다 더 유능해 보이는데. 둥지에서 제비뽑기로 대장 뽑았어?]

    [루칸다 : 하핫, 전하는 은근히 속이 좁고 뒤끝이 있으니 그만하는 게 좋겠군.]

    [누자베스 : 무능? 제비뽑기?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말이라고 이 새끼들이 진짜…….]

    피잉!

    백주월의 시야에 붉은 점이 표시되었다.

    고성의 바깥쪽. 외벽의 안쪽 뜰이 위치한 넓은 평지였다.

    [누자베스 : 퇴각 위치다. 주월아, 형이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줄게. 이 형님이 같이 있는 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말이다.]

    [백주월 : 너 지금 고양이잖아.]

    [누자베스 : 잔말 말고 지정 위치로 퇴각해라. 지금 야마 돌아서 더 건드리면 죽빵 박을지도 모르니까.]

    백주월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슥인 후 바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놓칠 생각이 없다는 듯 여덟 기의 베놈이 추격 기동을 개시했다.

    * * *

    백주월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한 걸 목격한 후.

    베놈 편대의 조종수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고 해도 인간의 몸으로 고대 병기에 대항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것도 베놈 여덟 기다!

    소드마스터든, 대마법사든, 혹은 용사든 뭐든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병기가 아니었다.

    베놈의 갑판을 뚫고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공격 수단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고작해야 권총과 나이프를 휘두르는 게 전부라면, 베놈이 탄약을 낭비할 필요도 없이 근접전으로 끝장을 낼 수도 있었다.

    베놈 편대의 조종수들은 침입자를 놓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대로 백주월을 쫓아 안뜰까지 나섰다.

    어차피 인간의 다리로 도망치는 것이라면 베놈의 기동력이 쫓아갈 수 없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해한 것처럼 백주월은 안뜰에 도착한 후 곧바로 멈춰섰다. 뒤쫓아온 베놈들을 향해 돌아섰고, 자신을 향해 기관총의 총구가 겨눠지는 걸 응시할 뿐이었다.

    포기한 것인가?

    도망치거나 대항할 생각도 없는지 양손에는 그 어떤 무기도 들려 있지 않았다.

    끼리릭.

    동축 기관총이 회전하는 소리가 고요한 밤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아주 작은 이변에 눈치를 챈 것은 6호기의 조종수였다. 열화상 감지 관측경을 통해 무언가가 백주월의 뒤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고양이?”

    대단할 것 없는 들고양이였다. 기껏해야 팔뚝만한 크기였고, 잿빛털과 황금색의 눈동자를 지닌 고양이다.

    그리고 기관총이 발포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백주월을 생포할지 묻기 위해 통신을 하던 중이었다.

    시야를 가릴 만큼 짙은 피안개와 피어 오른 것과 동시에 고양이가 순식간에 소녀의 형상으로 변했다.

    잿빛의 털이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되었고, 황금빛의 눈동자는 그 깊이가 더해졌다.

    짙은 칠흑을 투영한 듯 새까만 제복에 각모를 푹 눌러 썼지만, 외견의 크기만 보자면 1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작은 체구였다.

    “왜 하필 그런 꼴이야?”

    백주월이 혀를 차며 물었고.

    “나도 몰랐는데 이게 암컷 고양이였어. 그리고 질량체 수용 한계량이 의외로 적어서 이 크기가 최대라고.”

    소녀의 형상으로 변했다지만, 그 변이가 완전하지는 못했는지 다리 사이로 긴 꼬리가 살랑이는 게 보였다.

    “3분이다. 3분만 링크 걸어줄테니까 후딱 정리하자.”

    누자베스는 각모를 살짝 들어 앞머리를 쓸어 올린 후, 다시 각모를 푹 눌러썼다.

    “이 주변에 흡혈귀들이 있어서 되도록이면 혈술은 안 쓰고 넘어가고 싶었는데.”

    자신의 아래 입술을 짓씹어 선혈을 입에 머금었고. 입술이 포개진 것과 동시에 백주월의 혀를 깨물어 상처를 냈다.

    상처를 통해 빠르게 혈액 교환이 이뤄진 직후. 포개졌던 입술이 떨어졌고. 그 사이로 진홍빛의 타액이 곡선을 그리며 길게 늘어졌다.

    누자베스가 진형을 잡고 늘어선 베놈 편대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3분도 안 걸릴 거 같지?”

    그렇게 묻자 백주월이 유쾌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3초면 충분해.”

    푸른 균열이 포착되지도 않았지만, 이미 밤하늘에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방울이 아닌, 대전차 미사일이 소나기의 빗줄기처럼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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