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90화 (190/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90화

    칼날과 장미꽃(4)

    “상황이 안 좋았던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요즘은 더 심해요. 군대가 철수하기 시작한 이후부터요.”

    마르하바 서도의 중앙에 위치한 ‘요나르 섬’은 서도 내에서 가장 큰 섬이자, 중심 행정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다른 자잘한 섬은 그렇다 치더라도, 해상 선로를 설치해 본도와 연결된 섬은 마왕군이 꽤나 신경을 기울이며 관리하고 있었던 지역이다.

    그런 섬 중에서도 요나르 섬은 중심지에 속해 있었지만, 최근 몇 달 새에 빠른 속도로 주둔군의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마르하바 서도에 거주하고 있던 마족들은 마왕의 통치를 썩 반기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달가운 것도 아니었다.

    결국 무리를 이룬 집단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치 기관이 필요한 법이다.

    지금처럼 마왕군이 무책임하게 지역의 관리를 포기하게 된다면 어찌 될까?

    지적 생명체가 자랑하는 문화와 문명이란 그다지 견고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이다.

    강력한 무력과 무자비한 집행자가 없다면, 모든 생물은 짐승처럼 폭력과 힘의 논리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곳은 초행이라 사정을 잘 모르겠군.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나?”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고블린.

    루칸다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주머니에서 금화 한 닢을 긁어내 다크 엘프 창부의 앞으로 밀어냈다.

    다크 엘프는 루칸다가 내밀은 금화를 냉큼 집어 챙긴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하루만 지내보면 알게 되겠지만요. 이미 요나르 섬은 범죄 박람회가 되어버린 지 오래에요. 통치 기관이 사라지거나 약화 된 지역은 다들 그렇지 않아요?”

    “군주가 없는 땅은 악당 놈들이 활개를 치며 살아 숨쉬기에 적합한 땅이 되는 법이지. 양치기가 없는 목장이 늑대 놈들의 만찬회장이 되는 것처럼 말이야.”

    그렇기에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란.

    주권 같이 어디에다 써먹어야 될지 알 수도 없는 애매모호한 개념이 아니다.

    철의 의지를 지닌 강력한 군주가 필요할 뿐이다.

    ‘낙원이란 그리 어려운 얘기가 아닐 거예요. 백성 모두가 스스로 국가의 주인이 되는 것부터 시작하죠.’

    루칸다는 피르에나 왕녀의 이상론을 잠시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한때는 진지하게 믿었던 신념이었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자면 어린아이의 허황된 망상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피르에나 왕녀는 백성들을 너무나 과대평가한 것뿐이다.

    백성 모두가 자신처럼 강인한 인간이라고 맹신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실상은 크게 달랐다.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권이 아니라 따뜻한 빵과 푹신한 침대다.

    그리고 빵을 배부르게 먹고, 아늑한 침대에서 푹 자고 일어난 백성들이 자신의 비루한 삶의 이유를 전가할 왕이 필요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왕의 탓이라고, 왕이 잘못되었기에 자신의 삶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대다수의 백성들은 그런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며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왕이 사라지고, 스스로 국가의 주인이 되라는 소리를 들어도 백성들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불행의 이유를 스스로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인간은 드물다. 모두가 피르에나 왕녀처럼 강한 인간은 아니었고, 모두가 그녀만큼 강할 필요도 없었다.

    다크 엘프는 루칸다의 얼굴을 살피며, 살짝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요?”

    “아니 얘기를 계속하지. 그래서 요나르 섬에 터를 잡은 양아치 놈들이 누군지 말이다.”

    “그걸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수두룩 해요. 하지만…….”

    다크 엘프는 사뭇 주변을 경계하듯 사방을 슬쩍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한 단계 낮춰 조용히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나흐 만테아가 어느 정도 정리를 끝냈다는 소문이에요. 외지에서 왔어도 그 이름 정도는 들어 봤겠죠.”

    “나흐 만테아.”

    루칸다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론트라 섬의 남서쪽을 차지한 신예 무력 조직이었다. 그 녀석들이 마르하바 서도에 진출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루칸다는 ‘나흐 만테아’의 두령과 일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결코 우호적인 사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루칸다는 나흐 만테아의 두령 ‘칼베라’를 알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피르에나 왕녀의 휘하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 아닌가?

    피르에나 왕녀의 오른쪽 손에 쥐어진 검이 루칸다였다면, 그녀의 왼손에 쥐어진 검은 칼베라였다.

    칼베라 역시 루칸다와 마찬가지로 피르에나 왕녀의 꿈에 매료된 사내였다.

    만민이 평등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 낙원.

    인간도 마족도 구분 없이 서로를 보듬어 살필 수 있는 그 거짓된 낙원에 홀린 가엾은 희생양이었다.

    지금에 이르러 루칸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칼베라는 아직도 피르에나 왕녀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여자에게 반하는 것보다, 여자가 품은 꿈에 반하는 것이 더 답이 없는 법이니까.’

    루칸다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금화 한 닢을 더 꺼내 밀었다.

    “어쨌거나 손님도 조심하시는 편이 좋을 걸요. 나흐 만테아가 얼마나 위험한 녀석들인지 알고 있잖아요?”

    “그 녀석들이 이 섬에 와서 무슨 재밌는 놀이를 하는지는 모르나?”

    “그런 걸 제가 알 리가…….”

    텅.

    루칸다가 금화 주머니를 들어 다크 엘프의 앞으로 던지자. 촤르륵, 하고 수많은 금화가 테이블 위로 쏟아져 나왔다.

    “아는 걸 모조리 떠들어 봐라. 하나라도 그럴싸하면 그 금화는 모두 네 것이다.”

    반짝이는 황금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이 정도의 금화라면 흥청망청 써도 1년을 거뜬히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다크 엘프는 마른침을 삼킨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손님으로 받았던 남자가…… 나흐 만테아의 조직원이었어요. 왼쪽 가슴에 붉은 종달새 문신이요. 그거 나흐 만테아의 표식이잖아요.”

    “그리고?”

    “저기, 이건 확실치 않은 건데…….”

    “팁을 하나 주자면 말이다. 머리를 굴리지 말고, 그 긴 귓구멍으로 들어온 소리를 그대로 다시 입으로 토해내라. 쥐새끼도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부활 준비가 거의 끝났다고 했어요. 그분께서 초극에 성공하여 초인으로써 돌아오신다고…… 그게 누군지는 진짜 몰라요! 대륙에서 온 흡혈귀가 협력할 거라는 얘기도 했던 것 같고…….”

    “계속해.”

    “그리고는 진짜 별 얘기 없었어요. 출세라던가, 간부 승진 같은 얘기도 했었고…… 아! 화물 열차의 배차 시간을 알아두라는 얘기도…… 음, 그리고…….”

    덜컹.

    다크 엘프 창부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건장한 수컷 트롤 다섯 마리가 술집의 문을 거칠게 열었다.

    가죽제의 경장갑 차림이지만, 제대로 검과 창을 소지하고 있었다. 검이야 그렇다 치지만, 장창까지 꼬나쥐고 다닌다니. 이 섬의 치안 수준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크 엘프는 트롤들을 보더니 새파랗게 질려서 화들짝 놀랐다.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붉은 종달새 문양. 나흐 만테아의 조직원들이란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루칸다는 태연히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토해내며 트롤 놈들을 올려다 봤다.

    “변기 청소를 부탁한 적은 없는데.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건가?”

    트롤 노예들이 궂은 일을 도맡아 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구태여 트롤 전사들 앞에서 그런 종족차별적 발언을 할 필요는 없었다.

    루칸다는 킬킬 웃으며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걸쳤다. 완전히 무방비한 자세를 구태여 취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다크 엘프가 금화 주머니를 잽싸게 챙겨 술집 밖으로 도망쳤다. 이제 술집에 남은 손님은 루칸다뿐이었다.

    “외지인. 소속과 이름을 밝혀라.”

    트롤 전사는 침착하고 담담하게 용무를 밝혔다.

    ‘훈련 수준이 높군.’

    루칸다는 바로 트롤 전사들의 수준을 파악했다. 저급한 도발에 흥분하지 않으며, 일부러 무방비한 자세를 취하여 틈을 보여도 조급해 하지 않는다.

    나흐 만테아가 폭력 조직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실제로 목격한 나흐 만테아는 잘 훈련된 군대에 가까웠다.

    ‘하긴 칼베라 그 녀석이 대장 자리에 앉아 있으니 어중간한 양아치 집단일 리가 없지.’

    루칸다의 개인적인 평가와 별개로, 칼베라 역시 나름대로 유능한 군인이었다. 그의 불같은 성격 탓에 필요 이상으로 과소평가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보다시피 보잘 것 없는 고블린 나부랭이에 불과하다만. 싸구려 창부나 하나 꼬셔서 고블린쇼로 한탕 벌어볼 생각이었는데, 네놈들 덕분에 창부가 도망가 버렸군.”

    “이름과 소속, 그리고 출신지를 밝혀라.”

    “젠장할. 이 섬에 돌아다니는 고블린만 수천 마리인데 죄다 조사하고 다니나?”

    “그렇다. 특히 한쪽 눈이 없는 고블린은 더욱 각별히 조사 중이다.”

    칼베라는 루칸다의 방해 공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말이다. 루칸다가 어떤 식으로든 피르에나 왕녀의 부활 의식을 저지하려 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루칸다는 한숨을 크게 내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트롤 전사들을 향해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칸다. 페이드레트의 루칸다다. 르 만타나 유격대의 유격 대장이라고 소개하는 편이 알아듣기 쉽겠나?”

    카앙!

    지체없이 트롤 전사 중 넷이 자세를 취했고, 나머지 한 마리는 증원을 부르려는 셈인지 바로 술집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까지 가정하여 훈련을 받은 것처럼 재빠른 대처다.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퍼엉!

    뭔가가 발포되는 소리가 울렸고, 뒤이어.

    쿠웅!

    루칸다가 검을 뽑아들며 전투태세를 취한 것과 거의 동시였다. 술집의 벽이 흔들리며 굉음이 울렸다.

    무언가가 날아와 벽에 부딪친 듯 말이다.

    “으아…… 내 신발에 트롤 피가 묻었잖아. 앞으로는 살살 차야겠어.”

    “냐아아! 냐앙!”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재촉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나비탕 끓여 먹는다!”

    “냐…….”

    끼이익.

    술집의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건 인간 청년이었다. 어깨에 잿빛털의 고양이까지 걸친 채 느긋하게 터덜터덜 걸어 들어왔다.

    양손을 외투 주머니에 푹 찔러넣은 게 꽤나 껄렁한 인상이었지만, 그런 인상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을 만큼 유려한 외모였다.

    솔직히 옷차림이나 분위기만 빼놓고 보자면 성별을 분간하기 힘들 만큼의 미형이다.

    그리고 루칸다는 저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메모리얼 전투에서 목격한 적이 있었으니까.

    ‘용사가 이곳에?’

    일이 꼬였다고 생각한 순간.

    백주월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고양이가 폴짝 뛰어내려 루칸다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는 바지의 끝자락을 입으로 물고 막무가내로 흔들기 시작했다.

    루칸다는 고양이의 황금빛 눈동자를 잠시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각하? 설마 각하십니까? 아니, 어쩌다 그런 미물이 되셨습니까? 설마……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암컷 고양이를 보고 한번 해보려고…….”

    “냐아앙!! 냐앙! 냐앙냐앙!!”

    “농담입니다, 젠장! 물면 아픕니다!”

    고양이는 누자베스가 확실했다.

    어쩌다가 고양이가 되었는지, 어째서 용사와 함께 다니고 있는지는 수수께끼였지만 말이다.

    “선객이 좀 있어서 정리부터 하지.”

    루칸다가 그리 말하자, 백주월도 이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별 기대도 안 했지만 고작 고블린 한 마리? 혼자 다니는 거랑 별 차이도 없겠어.’

    어쨌거나 여기서는 요나르 섬에서 함께 움직여줄 파트너의 실력을 확인해 볼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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