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89화 (189/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89화

    칼날과 장미꽃(3)

    “루칸다를 데리고 왔으면 됐잖아. 왜 내가 흡혈귀의 호위 따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데…….”

    “그리 불평하지 말게. 주군이 부재한 상황에서 정식 대리자는 우렌일세. 그의 말을 주군의 명이라 생각하고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나저나 각하는 언제 돌아오시는 거야?”

    열차의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던 로아가 그렇게 물었지만, 스칼렛이라고 따로 소식을 받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타르틸리엇 탈취를 위해 수도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게 전부 아닌가?

    스칼렛은 어깨를 으슥이며 와인잔을 비스듬히 들어 살며시 흔들었다. 마르하바 서도행 열차의 특등석은 확실히 쾌적했다.

    열차의 차량 하나를 통째로 객실로 개조한 덕에 이 넓은 차내에는 스칼렛과 로아, 그리고 바르베라 단 셋뿐이었다.

    부족함 없이 모시겠다는 바르베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흡혈귀들은 팔자도 좋아. 바체트 열도 전체가 곧 전란의 불길에 휩싸인다는 걸 알면서도 태평하게 생일 파티나 할 생각이나 하고.”

    “말해두지만 흡혈귀는 탄생일을 축하하는 관습은 없네. 영겁을 살아가기 때문에 60년에 한 번씩 기일을 기억하고, 기억받기 위해 친족을 부르는 것뿐일세.”

    “그런 걸 평범하게 말하면 생일 파티라고 하는 거야.”

    “게다가 현존하는 상속 신분에게 이 작은 섬의 전쟁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나?”

    나르시안의 첫째 딸 카르메네르.

    상속 신분에 속하는 혈족 중에서도 가장 짙게 나르시안의 피를 이어 받은 흡혈귀였다.

    진조 중의 진조.

    만월의 공주.

    7의 죄악과, 13의 번뇌를 물려받은 존재.

    최초의 원죄를 상속받아, 영원한 밤의 순례를 거듭하는 귀인.

    카르메네르는 홀로 흡혈귀 그 자체이자, 흡혈귀 그 전부이자, 혈족의 근원이었다.

    아마도 스칼렛이 인정할 수 있는 완벽무결한 흡혈귀란 카르메네르 외엔 없을 것이다.

    리쿼렐이라던가, 카베르네라던가, 메를로 같은 다른 딸들도 상속 신분으로써 상당한 위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첫째 딸인 카르메네르의 위계에 미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카르메네르는 그 누구보다 많은 2세대 흡혈귀를 창조해냈고, 그녀의 아이들은 이미 세상의 절반을 지배할 수 있을 만큼 강성해졌다.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공포의 화신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인빅투스’ 역시 카르메네르의 직계 자손들 아닌가?

    그런 강성한 자손들의 보호를 받으며 카르메네르는 본래의 원형을 유지해 온 상속 신분이다.

    처형당하여 산산이 부숴진 카베르네라던가. 초극에 도전했다가 대부분의 힘을 잃은 메를로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런 원형 그 자체인 상속 신분에게 바체트 열도란 짓밟을 가치도 없는 촌구석에 불과했다.

    혈족의 아이들을 모조리 동원하지 않더라도, 인빅투스만으로도 바체트 열도는 일주일 내로 지도에서 지워질 수 있었다.

    스칼렛은 카르메네르와 같은 상속 신분인 만큼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만에 하나라도 카르메네르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번에 바르베라의 초대에 순순히 응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스칼렛은 와인의 향을 음미하며 바르베라의 말을 다시금 떠올려 봤다.

    ‘어머니께서 자매들이 다시 모여서 얼굴을 보길 원하십니다. 대모님께서 참석해 주신다면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자매들이 다시 모인다라.

    꽤나 가슴 훈훈해지는 따뜻한 구실이었다. 스칼렛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채 피식 웃었다.

    ‘그 음흉한 여자가 그딴 이유로 상속 신분을 집합시킬 리 없지.’

    분명히 말해두지만.

    스칼렛은 카르메네르가 싫었다.

    물론 카르메네르의 딸들인 네비올로와 바르베라는 어렸을 적부터 꽤나 귀여워했지만, 자신의 친언니인 카르메네르와는 도저히 사이 좋게 지낼 수 없었다.

    ‘보나마나 또 더러운 꿍꿍이가 있겠지. 속이 시커먼 불여우가…….’

    스칼렛이 미간을 찌푸리자.

    옆에 거리를 둔 채 앉아 와인병을 들고 있던 바르베라가 안색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대모님. 어디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응? 아니, 그냥 시답잖은 생각을 한 것뿐이네.”

    “만약 허락된다면 제가 대모님의 고결함에 닿을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정말 쓸데없는 생각이었을 뿐이네. 네 어머니도 너의 절반 만큼만 귀여웠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이야.”

    “가장 존귀한 분이 그리 말씀하신다면, 세상 역시 그리 될 것입니다.”

    스칼렛이 빙긋 웃으며 바르베라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바르베라는 어린 강아지처럼 스칼렛의 손길에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아마도 바르베라의 이런 표정을 볼 수 있는 존재는 세상 전체를 통틀어도 열손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순한 강아지 같은 모습이긴 해도. 바르베라는 인빅투스의 총정관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위협적인 흡혈귀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말이다.

    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차더니 차창 밖으로 시선을 넘겼다.

    ‘솔직히 말해서 호위는 필요 없다. 하지만 피를 빨아 먹고 사는 거머리 놈들이 생일 파티라는 명목으로 모여서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확인하고 올 녀석은 필요하지.’

    루칸다는 로아를 따로 불러 그렇게 말했다. 로아 역시 그 말에 수긍했기에 호위 명목으로 스칼렛을 따라나선 것이다.

    혹여라도 상속 신분들이 모여 누자베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거나,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짓을 모의하려 한다면.

    둥지에서 사실을 보고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오히려 그런 짓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각하께서도 이런 흡혈귀들이 신용할 가치가 없는 족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실 수 있도록.’

    로아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

    와인병을 들고 있던 바르베라가 로아 쪽을 똑바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시선을 느낀 로아가 짜증 섞인 시선으로 바르베라의 시선에 응하며 말했다.

    “할 말 있어? 아니면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텐데.”

    아무리 바르베라가 인빅투스의 총정관이라고 해도. 로아 역시 헬베르카의 분가인 루스날의 명맥을 잇는 순혈종이다.

    고개를 숙이고 저자세를 취할 리 없었다.

    하지만 바르베라는 언짢아 하는 기색 없이 탁하고 붉은 눈으로 로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루스날. 테르미어의 후계.”

    “잘 알고 있네. 지식 자랑하고 싶은 게 아니면 조용히 해줄 수 있을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바르베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말했다.

    “딱히 지식으로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나 테르미어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 싫어도 알 수밖에 없지.”

    바르베라는 제1신분에 속하는 고혈종.

    반 르낙시아의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흡혈귀다. 그러니 헬베르카의 당주 ‘오르키아나’라든가 ‘테르미어’를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바르베라는 테르미어와 친분을 지니고 있었던 흡혈귀였다.

    그리고 테르미어는 혈족 외의 마족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바르베라가 인정한 검사였다.

    개인의 무력만으로 따지자면 은사자 오르키아나를 압살할 수 있을 정도. 마장 바하무트를 상대로도 호각 그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 사내였다.

    아직 어리고 미숙했다고 해도 네비올로와 바르베라를 동시에 제압했을 만큼의 실력이었다.

    그리고 바르베라는 테르미어와 꽤 긴 시간을 함께 보낸 흡혈귀다. 테르미어가 제필프의 요새에서 산화하기 전까지. 꽤나 긴 시간을 함께했다.

    “테르미어는 순수하고 다정한 사내였다.”

    바르베라는 테르미어에 빼닮은 로아를 부드럽게 훑어보며 그의 최후를 떠올렸다.

    오르키아나는 테르미어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성도의 은사자라 칭송받는 전설적인 당주로 기억되고 있지만, 바르베라의 생각은 달랐다.

    오르키아나는 그저 겁많은 소인배에 불과했다. 스스로의 나약함에 질려 초극으로 가장한 자살로 삶을 마감했을 만큼 말이다.

    테르미어는 그런 오르키아나가 품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다. 오르키아나는 분가 출신의 테르미어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검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윤왕 ‘제필프’의 요새로 내몬 것이다.

    적어도 바르베라만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순수함과 다정함이란. 살아가는데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너무 늦었기에 죽은 것뿐이다.”

    노을빛에 반짝이는 강물처럼 보이는 금발, 눈송이가 내리 앉을 수 있을 만큼 긴 속눈썹. 그리고 짐짓 심각한 척, 아니면 위협하는 척 어울리지 않게도 찡그린 미간.

    모든 것이 기억 속에 존재하던 테르미어의 모습이었다.

    “아, 그리고 곱상한 얼굴과 달리 꽤나 절륜한 사내였지.”

    “뭐,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선조를 모욕할 셈이냐!”

    로아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 듯 소리쳤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스칼렛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르베라 쪽을 바라봤다.

    “바르베라. 그 말이 진짜인 겐가? 외, 외종하고 그런 짓은 불결한 것일세! 언니가 이 사실을 안다면 곱게 넘어가진 않을 터인데, 어찌 그런 경솔한 짓을 한 건가?”

    “농담입니다, 대모님.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마침 루스날의 후계가 있기에 분위기 좀 풀어볼 겸 어울리지도 않은 농을 시험해 봤습니다.”

    “까…… 깜짝 놀랐네. 늙은이는 그런 농을 읽을 수 없으니 앞으로는 그만두게.”

    우아한 손놀림으로 입을 가리며 바르베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열차는 마르하바 서도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백주월이 기억해야 될 것은 셋.

    숲길을 걸으며 누자베스가 끄적여서 건넨 종이조각을 꺼내 읽었다.

    “혈액 한 병은 대략 500cc의 용량이며 일반적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양이다.”

    그리고 백주월이 누자베스에게 받은 유리병은 다섯 병. 단순 계산으로, 평범하게 활동하는 것뿐이라면 5일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하지만 체외로 배출된 혈액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효율이 떨어진다. 첫날은 1할의 효율 감소를 보이지만, 닷새째의 효율은 5할 미만이라.”

    한 병을 모조리 마셔도 12시간 이하의 시간을 생존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백주월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항목을 읽었다.

    “혈액 고갈로 사망에 이를 경우 신체의 조직 및 세포가 빠른 속도로 괴사하기 시작한다. 사망 후 72시간까지 소생 가능하며, 그 이후로는 소생이 불가능할 수 있다.”

    누자베스와 물리적으로 떨어져 활동할 때 반드시 숙지해야 하는 행동 지침이다.

    백주월과 누자베스가 유대 관계로 묶인 결과다. 이 불완전한 유대 상태는 둘의 남은 삶을 강제적으로 묶어 놓고 있었다.

    백주월은 단순히 살아 숨쉬는 것조차 누자베스에게 의지해야 했으며. 누자베스 역시 백주월이 부상을 입거나, 죽음에 이를 경우 동일한 속도로 육체가 붕괴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악몽 같은 운명공동체 생활의 시작이었다.

    “어디까지나 평범하게 움직일 때의 얘기잖아.”

    만약 백주월이 용사로써의 고유 권능인 ‘에임페리얼 콜’을 사용한다면?

    혈액 한 병을 모조리 사용하는 데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전투 모드로 돌입한다면 지금 가진 혈액을 모조리 사용해도 5분 미만의 시간이 허락된다는 말이었다.

    한 마디로 이번엔 싸움질을 지양하고, 얌전히 부품만 구해서 돌아오란 소리였다.

    “그나저나 이 망할 곳에서 부품을 무슨 수로 찾냐.”

    백주월은 어깨에 걸쳐놨던 잿빛의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혼자말을 중얼거렸다. 고양이는 졸린 눈을 뜨며 가르릉거릴 뿐 마땅한 대답을 돌려주진 않았다.

    잿빛의 고양이는 누자베스의 신경을 부분적으로 연결해 놓은 사역마라지만, 어디까지나 CCTV의 역할일 뿐 그 이상은 기대할 수 없었다.

    마르하바 서도에 도착한 백주월은 자리에 멈춰 서서 크게 기지개를 편 후. 주변을 둘러봤다.

    “얌전하고 젠틀하게 말이지.”

    이번엔 다 때려 부수는 임무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럴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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