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88화 (188/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88화

    칼날과 장미꽃(2)

    세상은 부조리하다.

    살아 숨쉬는 모든 만물의 삶이란.

    필연적으로 이 부조리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숙명처럼 세상의 이치란 도저히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지금 이 순간 내린 결론이었다.

    “빨리 좀 읽어라. 도대체 몇 분째 같은 페이지만 읽고 있냐? 문맹이냐, 어? 까막눈이냐고.”

    퍽, 퍽퍽.

    백주월이 내 등을 발로 걷어차며 재촉하고 있었지만, 그런 무례한 행동 따위는 도저히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만큼.

    나는 이 세상의 부조리에 몸서리를 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째서 니노가 아니냐! 어째서, 어째서 니노가 아니란 말이냐! 으아아아아-! 이런 엿 같은 픽션을 멋대로 그리다니…… 요, 용서할 수 없다! 직업 윤리도 없는 것이냐!”

    “알게 뭐야! 빨리 13권 내놔.”

    “주월아…… 잘 들어라. 이 형이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이런 엿 같은 만화를 도저히 보여줄 수 없겠구나…….”

    “무슨 헛소리야. 빨랑 읽고 다른거 또 소환해야 되니까 내놓으라고! 내가 소환했잖아, 빨리 내놔.”

    “어차피 내 혈액으로 소환하는 거잖아! 소유권을 엄밀히 따지자면 나한테 있어!”

    또르륵.

    이 참담한 현실에 그만 눈물이 흘러나왔다. 백주월도 내가 눈물을 보이자, 사뭇 진지한 어조로 되물었다.

    “누, 누군데?”

    “하…… 네가 이 잔혹한 현실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미쿠지? 미쿠밖에 없잖아?”

    절레절레.

    씁쓸한 심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어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백주월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애초에 미쿠는 초반에 스토리의 추진제로 사용하고 버리는 단역에 불과하지 않나? 처음부터 히로인 리스트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내가 이래보여도 업계의 전문가란 말이다. 척 보면 척이다. 솔직히 메인 히로인은 니노 외엔 고려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요츠바다…… 믿기 힘들지만, 세상은 언제나 이렇게나 잔혹하고 잔인하군.”

    “거짓말! 구라 치지 마, 개자식아! 그런, 그런 엑스트라가 어떻게……! 애초에 요츠바는 초반에 스토리의 추진제로 사용하고 버리는 단역에 불과하잖아?”

    백주월은 빼앗듯이 내 손에 들려 있던 책을 낚아채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그리고는 잔인한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으며 책을 내던졌다.

    “젠장…… 미쿠의 순정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요츠바는 니노하고 동급인 엑스트라잖아.”

    “미친 새낀가? 니노가 어떻게 엑스트라냐! 메인 히로인이다, 메인!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와꾸 등수를 따져도 1위잖아.”

    “다섯 쌍둥이라 얼굴은 다 똑같다 얼간아.”

    “일란성이 아닌가 보지.”

    방 안에 침울한 공기가 내리 앉았다.

    백주월의 고유 권능이 강화되며 여러 가지 물건을 소환해 낼 수 있게 된 덕분에 만화책이라도 보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지만.

    이번에 소환한 만화책이 문제가 되었다.

    이런 직업윤리가 결여된 픽션을 그리는 놈은 형법상의 책임을 물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꽤나 진심이다.

    “애초에 비처녀하고 맺어진다는 게 납득이 안 돼.”

    “그건 또 무슨 정신 나간 개소리야?”

    “아니, 그렇잖아. 안 그래? 주월아 넌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현실과는 별개로 원래 이런 만화의 히로인은 처녀여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는 거야. 그게 작가와 독자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매너거든. 러브코미디의 메인 히로인은 순결해야 한다는 것이 국룰이다.”

    너 착한 아이구나…… 같은 것도 안 된다!

    논외다, 논외!

    이게 이해가 안 되는 창작자는 심기체 처녀론 논문이라도 정독하고 왔으면 좋겠다.

    “그래, 말이 나온 김에 더 해보자. 류시혁 그 녀석한테 붙여준 밀리아라든가 주월이 너한테 붙여준 히로인은 모니카잖아.”

    “누자베스 네 입으로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진짜 이상한 느낌인데.”

    “둘 다 처녀다. 심기체 처녀론에 입각한 처녀다. 나는 독자들을 불쾌하게 만들 만한 캐릭터 설정을 결코 하지 않으니까. 거짓말 같으면 불러서 물어봐라.”

    “거기까진 납득한다고 치고. 요츠바가 처녀가 아니라는 근거는 뭔데? 전남친이 있었다거나 그런 묘사는 전혀 없었잖냐.”

    “통계학에 입각한 한없이 타당한 근거가 있다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경험을 해본 일본 여성의 비율은 38%다. 즉 거의 2/5에 달하는 비율이었다.

    “다섯 중 둘은 경험이 있다. 이건 통계학적으로 참인 명제라고 설정하여 생각하자면, 다섯 쌍둥이 중 둘은 비처녀란 말이 된다.”

    “그래서?”

    “소거법적으로 생각해 보지. 가장 남자와 연이 없을 것 같은 셋을 추려보자고.”

    “그…… 돼지 같은 애 이름이 뭐였더라?”

    “이츠키다.”

    “그래, 이츠키는 절대 아니지.”

    “그리고 미쿠다. 성격이 그래서는 무리잖아.”

    “확실히 동의할 수밖에 없네.”

    “마지막 한 사람은?”

    “그 성질머리 더러운 애 누구였더라? 니노 걔도 논외지.”

    “자, 정답이 도출되었군. 한없이 논리정연하며 절대다수의 동조를 얻을 수 있는 타당한 정답이다.”

    연예계와 부활동?

    이딴 배경과 설정은 네토라레 망가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야생마 같은 허벅지 근육을 지닌 육상부 선배가 등장할 수 있는 여지조차 용납할 수 없단 말이다.

    부탁받으면 거절할 수 없는 성격!?

    이따구의 성격 설정부터 네토라레 망가에서나 쓸 법한 설정 아닌가? 장난하나, 진짜?

    “백퍼다. 무조건 백퍼다. 무적권이다. 무조건이라고도 한다. 요츠바는 비처녀다. 이게 내 결론이다.”

    “아니, 그래도 아직 완결이 아니잖아? 여기 보니까 14권도 나온다는 거 같은데. 14권이 완결이래.”

    “……진짜?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요츠바는 아니지. 진짜 아니지. 여기선 딱 요츠바 선택하는 것처럼 절단신공을 쓰고, 완결권에서 니노를 택한다는 전개가 안 봐도 블루레이입니다, 하핫! 나도 작가 나부랭이라 이런 급커브 전개 테크닉에 조예가 좀 있지.”

    침대 위를 뒤적여봤지만 14권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주월아. 14권 소환 안 했어.”

    “아직 발매를 안 한 모양인데?”

    “염병 사람 번거롭게 만드네. 시간선 확장해서 다시 소환해보자.”

    시간선까지 확장시켜 질량을 지닌 물질을 소환한다는 건 상당한 양의 혈액을 소모하는 일이다. 하지만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라고 묻는다면 가능했다.

    바로 단추를 풀고 셔츠를 가슴까지 끌어 내려 목덜미를 드러냈다.

    “육체 재생 따위에 쓸 혈액은 없다. 오늘 완결까지 읽고 후련하게 푹 자면 알아서 낫겠지.”

    “아무리 그래도 미래의 시간선까지 건너뛰려면 소모량이 엄청날 텐데.”

    “상관없다고! 오늘 니노가 웨딩드레스를 입는 걸 보지 못하면 신경 쓰여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신체 재생이 무슨 소용이야!”

    “너는 진짜 미친새끼다…….”

    “투덜거리지 말고 후딱 빨아버려! 이 형은 오늘 니노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짓는 걸 보기 전까진 못 잔다!”

    만약 정말 요츠바 엔딩이라면.

    그래, 그런 말도 안 되며 잔인한 비극이 현실이라면. 나는 모든 세계선을 뒤져서라도 니노가 행복해지는 세계선을 찾아낼 것이다.

    목덜미에 백주월의 입술이 닿았고, 날카로운 둔통이 잠시 신경을 스친 직후.

    “…….”

    “뭐, 뭐야? 빨았으면 얼른 소환하라고.”

    백주월은 그대로 내 목덜미에 입을 댄 채로 멈칫했다. 그러고는 시선을 들어 내 얼굴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입을 떼며 소매로 슥 훔쳐낸 후 고개를 돌렸다.

    “왜, 왜 그래? 무슨 일인데?”

    “표지가 보였어. 14권의 표지가 보였어…….”

    “니노지? 니노잖아…… 메인 히로인이 최종권의 표지를 장식하는 건 업계의 국룰…….”

    절레절레.

    백주월은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요츠바다.”

    “으, 으으…… 으아아아! 멸망해버려! 이딴 세상은 멸망해야 마땅해! 니노가 행복해지지 못하는 세상 따윈 존속할 가치도 없다!!”

    어른이란, 배신당한 청년의 뒷모습이라고 한다지만. 그럼에도 다시 기대를 품었던 어른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것이 ‘현실’이란 이름의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믿었단 말이다.

    니노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서투르고 순수한 마음이 보답받는 세상을 믿었다. 서투르지만 솔직한 그 아이만이 행복해질 권리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거라도 볼래? 비슷한 만화도 있는 거 같은데.”

    “뭐야 이건? 너네는 공부를 못해? 뭐 이딴 병신 같고 도발적인 타이틀이…… 표지는 귀엽네. 나는 이 안경 쓴 애가 마음에 들어.”

    “멍청이냐. 당연히 가장 크게 그려진 쪽이 메인 히로인이겠지. 여기 가장 앞에 머리 긴 애가 청순하고 좋은데. 이번엔 여기에 건다.”

    “1권 표지에 가장 크게 그려진 쪽이 히로인이면 어? 그러면 새끼야 왜 이츠키가 아니라 요츠바인데. 뇌에 든 우동사리를 활용해서 소리를 내라 짜식아. 하핫! 이 만화는 흑인 히로인도 있네? 파타야에서 원정 온 워킹걸인가? 절대 얘는 아니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흑인 히로인이 존재한 적은 없었으니까.”

    “미친 레이시스트 새끼. 스킨헤드가 형제하자고 찾아오겠네. 그리고 태국인이 왜 흑인이냐. 무식하긴…….”

    “흑인 아니면 흙인이겠지, 알게 뭐야.”

    다시 침대 위에 자리를 잡으며 누웠다.

    백주월의 배를 베개 삼아 누워서 만화책을 펼치려던 찰나였다.

    덜컹, 하고 방문이 열렸고. 얼굴에 기름 얼룩을 잔뜩 묻힌 바루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바루크. 기다리다가 목이 빠져서 듀라한이 되는 줄 알았어. 괴조 복구는 얼마나 됐냐?”

    “거의 완성 단계긴 한데…… 코어 부품 하나를 손에 넣을 수가 없어.”

    “이곳의 항만에 대륙제 부품 잔뜩 들어오잖아? 그 녀석들한테 구해봐.”

    바루크는 당연한 소리를 뭐하러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이미 확인했다. 녀석들 말로는 마젤라나의 곡면경은 생산 자체가 안 되는 유물이라 유통되는 물량 자체가 없다더라.”

    “염병. 날아다니는 고철덩어리 주제에 아주 비싼 부품은 다 쳐먹는구만.”

    책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랍장 위에 올려놨던 담배갑에서 한 개비를 빼서 입술에 끼워 넣으며 되물었다.

    “코어 부품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거래 내역을 통해 유추하자면 마지막으로 유통된 건 3년 전 마왕군의 제21예비사단이 구매한 게 있던데.”

    “제21예비사단이라면…….”

    머릿속에서 지도를 펼치고 마왕군의 분포도를 덧씌워 봤다.

    “마르하바 서도?”

    “그래, 그쪽인 모양이야.”

    “젠장 땅끝이잖아. 완전 끝자락에서 끝자락이잖아!”

    동쪽의 최선단에 가까운 쿠르헨 섬.

    그리고 서쪽의 최선단에 위치한 마르하바 서도. 빈말로라도 멀지 않은 거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침대에 누워 팔자 좋게 만화책이나 읽고 있는 백주월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백주월은 만화 보는데 건드리지 말라는 듯 신경질적으로 내 발을 쳐냈지만.

    “주월아. 마르하바 서도까지만 후딱 다녀오면 안 될까?”

    “직접 다녀와라. 지금 바쁜 거 안 보이냐?”

    “침대에 누워서 만화책 보는 걸 바쁘다고 표현하는 병신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육성으로 듣게 되니 새삼스럽게 감회가 신선하네.”

    백주월은 더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 휙 등을 돌려 눕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떤 가정교육을 받았길래 형이 정중하게 부탁하는데 저런 상놈 같은 태도를 취한단 말인가.

    이것이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렸던 한국의 작태란 말인가.

    “갔다 오면 비올리네 일일 데이트권 줄게.”

    “어차피 대충 할 거잖아.”

    “영혼의 메소드 연기를 약속하마.”

    백주월은 혀를 차더니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두 장은 받아야 계산이 맞을 거 같은데. 두 장으로 준비해 놔.”

    “염병, 알았으니까 물건만 후딱 가져와.”

    자, 백주월을 마르하바 서도에 파견한 후. 나는 이 쿠르헨 섬에서 끝마쳐야 할 일을 끝마치면 된다.

    슬슬 정리를 하고 둥지로 돌아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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