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87화 (187/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87화

    칼날과 장미꽃(1)

    “아주 잘했네. 자네가 아주 자랑스럽군, 우렌! 이런 대단한 일을 해낼 줄 누가 알았겠나? 각하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너무 기뻐서 졸도하시겠어!”

    “…….”

    대수림에 위치한 유리아의 둥지를 나서며 우렌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런 우렌의 뒤를 쫓아오며 루칸다가 울분을 토해냈다.

    “너무 오래 살아서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데 이번엔 진심으로 깜짝 놀랐군!  그렇게 자신만만하길래 대단한 비책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만 좀 하게.”

    “여덟 수라니! 여덟 수만에 체크메이트를 당하다니!”

    유리아와 우렌의 카르케샤 결과.

    우렌은 고작 여덟 수만에 모든 수가 막혀 참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물론 이건 실력의 유무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다. 카르케샤의 룰만 숙지하고 있는 초보라도 유리아와 같은 조건이라면 세계 챔피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실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냥 룰만 따져봐도 게임이 되지 않는 조건이었다.

    루칸다의 질책을 받으며 우렌은 손수건을 꺼내 축축한 목덜미를 닦아냈다.

    “솔직히 이건 뒤통수 치려고 각을 잰 것이라고 밖에 안 보이네.”

    “아니, 그건 진짜 아니니까 오해 하지말게.”

    “만약 대수림의 여왕이 변덕을 부리지 않았다면 둥지는 괴멸…….”

    루칸다는 그제야 입을 멈췄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상정해 보자.

    대수림의 여왕 유리아는 이미 중부를 집어삼킬 만큼의 병력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중부의 터줏대감인 ‘트라이어드’가 무너진 상황.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누자베스의 둥지만큼 집어먹기 좋은 먹잇감은 없었다.

    그야말로 탈피를 막 끝마친 갑각류처럼 무방비한 상태가 아니던가?

    만약 유리아의 침공을 상정하고 방위 태세를 갖췄다면? 버틸 수 있었을까?

    루칸다는 바로 정답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부정이다.

    아무리 완전 방위 태세를 갖추더라도 병력의 규모와 군수품 보급량에서 압도적으로 차이가 난다.

    유리아는 누자베스의 둥지 아릿카사를 그야말로 말려 죽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상대였다.

    그렇다면 우렌에게 남은 수단은 뭐였을까?

    “설마…….”

    루칸다가 변덕이라고 생각했던 유리아의 행동은 꽤나 합리적인 판단에 기인하고 있었다.

    우렌은 직접 유리아의 둥지를 찾아가 카르케샤를 통해 전력의 차이가 명백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 유명한 철혈의 중재자 우렌이 지휘관으로 나선다 한들 여덟 수밖에 버티지 못할 만큼 말이다.

    유리아에겐 이 전쟁의 결말을 간접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기회였다. 우렌이 직접 지휘를 맡아도 압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릿카사는 예상 이상으로 손쉬운 상대였고, 유리아는 아주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며 우선순위를 다시 정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릿카사와 우렌을 유용하게 활용할 방법까지 있다면 유리아에겐 금상첨화 아니겠나?

    “그렇군. 그렇게 된 거였군……! 불사의 왕이 동쪽을 봐준다는 얘기도 아주 쓸데없는 발언이 아니었어.”

    “그리 된 걸세. 먹기 좋은 떡이지만, 조금 성가신 가시가 박힌 떡이지. 그렇다면 당장 꾸역꾸역 집어 삼키려는 것보단 느긋하게 조리해서 먹어야 되지 않겠나.”

    “그런 걸 마치 호의라도 베푸는 듯 제안한 건가.”

    루칸다는 유리아의 둥지 방향을 향해 가래침을 뱉은 후 혀를 찼다.

    “나는 역시 귀쟁이 년들하고는 상성이 안 맞아. 마치 대단한 상류층인 척 내려다보는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엘프들은 미아 나크랏의 직계라는 정체성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최초의 소녀였던 미아 나크랏의 외형을 빼닮아 영원한 소녀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그녀들의 자랑이었다.

    유구한 시간의 흐름조차 영원한 아름다움을 감히 앗아갈 수 없으리라, 였던가?

    영원이란 개념만큼 끔찍한 건 둘도 없다고 생각하는 루칸다에겐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었다.

    루칸다의 머릿속에서 옛기억이 떠올랐고, 이내 벌레를 씹은 듯 얼굴을 찌푸렸다.

    미아 나크랏이 최후의 최후에 내지른 비명 소리가 아직도 뇌리에 또렷이 새겨져,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미아 나크랏은 달이 내린 재앙이었고, 재앙의 마지막 단말마는 세상에 존재치 않았던 ‘불분명한 불안’이라는 개념을 낳았다.

    지상에 살아가는 만물이 때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게 된 것도, 미아 나크랏이 내지른 비명에 세상의 어딘가가 찢어져 망가졌기 때문이다.

    루칸다는 심장의 박동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인지 담배잎을 한 장 꺼내 우물우물 씹었다.

    “유리아는 나중에 생포해서 오크놈들의 노리개로 만드는 건 어떤가? 그러면 꽤나 볼만한 얼굴이 될텐데.”

    “그러고 보니 유격 대장은 그런 상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군. 흡혈귀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나?”

    “그래, 어쨌거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건방진 놈들은 죄다 마음에 안 들어.”

    어찌보면 흡혈귀들도 엘프들과 닮은 꼴이었다. 원죄의 아버지 나르시안의 직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서, 흡혈귀 외의 종족은 깔보는 게 기본 아닌가?

    늙은 흡혈귀들이 ‘만물’을 ‘혈족과 가축’이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그들의 의식에 깔린 우월 의식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은사자 오르키아나는 태어나며 지니고 있던 신분과 위계에 비해 상당히 겸손한 사내였다.

    순혈 헬베르카라면 가장 바깥 고리의 섭리에 가까운 존재이며, 테네브레의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우월한 종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루아 카날다는 오르키아나의 그런 점을 높이 평가했고, 당시엔 보잘 것 없는 신예 집무정관에 불과했던 오르키아나가 당주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적지 않은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오르키아나는 헬베르카의 당주 자리에 오른 후. 루아 카날다의 군세를 세 번이나 막아섰고, 세 번의 패주로 보은의 인사를 대신했다.

    오르키아나는 자신의 평가가 가문의 내외로 곤두박질 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켰다.

    “어쨌거나 둥지에 흡혈귀가 하나 뿐이라 다행일세. 만약 둘 이상 있었으면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을테니까.”

    “하하…….”

    우렌이 곤란하다는 듯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는 이내 다시 유리아의 제안을 떠올렸다.

    “그건 그렇고 마르하바 서도의 정탐 임무는 어찌하는 게 좋겠나?”

    “보나마나 또 꽝이겠지. 윤왕의 그릇을 찾기가 그렇게 쉬우면 누가 고생하겠나? 그 귀쟁이 녀석은 윤왕의 발톱 만큼만 닮았어도 다 목을 따버려야 직성이 풀릴 만큼 겁쟁이일 뿐이다.”

    유리아의 제안은 둘.

    첫 번째는 표면적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감축시키고, 이 이상 병력을 생산하지 않을 것.

    두 번째는 마르하바 서도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확인하는 것이다. 정말 윤왕의 그릇인지 그 실체를 확인하고, 윤왕의 그릇일 경우 제거해주길 바란다는 제안이었다.

    “저번처럼 나와 로아가 다녀오지. 그 녀석은 의외로 이런 임무에 어울리니까.”

    “의외의 재능을 발견했구만.”

    우렌과 루칸다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상의하며 둥지 쪽으로 걸었다.

    * * *

    루칸다가 둥지에 도착한 직후.

    둥지 내부에 본 적이 없는 외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상당히 짙은 피냄새를 머금은 흡혈귀다.

    이 정도라면 불사의 왕 브람스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 확실하다.

    그 역한 냄새에 코를 막으며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 머리카락의 끝이 지면에 닿을 만큼 긴 흑발을 지닌 미녀가 뒤를 돌아봤다.

    외견은 30대 초중반 정도로 보였고, 고풍스러운 칠흑색의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창백한 피부와 광채 없이 탁한 붉은 눈동자.

    피를 머금은 초승달 만큼이나 붉은 입술.

    그리고 만물을 깔보는 듯 거만한 눈빛과 표정.

    ‘저것’이 흡혈귀라는 사실은 묻거나 따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는 올리브 나무에 얽힌 뱀의 형상이 새겨진 금속 조각이 달려 있었다.

    ‘인빅투스?’

    이 세상을 통틀어 가장 위협적인 무력 집단은 무엇일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인빅투스’였다.

    붉은 피의 형제단이라거나.

    진홍의 세례라거나.

    제1신분이라거나.

    천하무적단이라고 불리기는 했지만, 통칭적으로는 인빅투스라고 칭해지는 이 집단 만큼 위험한 곳도 없었다.

    인빅투스에 소속해 있는 흡혈귀는 모두가 ‘상속 신분’의 직계 자손이며 각 지방의 프리스커스로 군림하는 고혈종에 속한다.

    제1신분이라는 명칭도 상속 신분의 직계 자손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 아닌가?

    어쨌거나 불사의 왕 브람스도 한때 인빅투스에 소속되어 있었을 정도다. 이곳에 소속되어 있는 흡혈귀들은 말단까지 모두가 브람스와 동급의 존재들.

    마왕 아일라드가 자신의 영토에 왕국을 건국한 브람스를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브람스 하나가 무서운 게 아니라, 인빅투스의 보복이 두려운 것이다.

    물론 인빅투스의 주요 활동 무대는 대륙 쪽이었지만, 명분과 이유만 있다면 바체트 열도를 모조리 초토화시킬 수도 있었다.

    실제로 인빅투스의 심기를 건드려서 멸망한 대륙의 왕국이 한둘이 아니었다.

    빠르고 확실하게 죽고 싶다면 인빅투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장수하고 싶다면 인빅투스의 눈길 닿는 곳에도 가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그리고 지금 누자베스의 둥지 아릿카사를 방문한 흡혈귀는 인빅투스의 총정관 ‘바르베라’였다.

    바르베라는 조용하고 과묵하여 스스로를 과시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혈술의 정교함만 따지자면 상속 신분과 나란히 설 수 있을 만큼 우수한 흡혈귀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단신으로 바체트 열도를 정리해버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흡혈귀란 말이다.

    아일라드의 마왕군도, 글로레나 왕조도 모조리 통틀어서 말이다.

    “아, 어떻게 교섭은 잘됐나?”

    그리고 바르베라와 마주 앉아 있던 스칼렛이 루칸다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루칸다는 바르베라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그런 흉흉한 걸 둥지에 들여놓고 태연한 게 대단하군.”

    “휴, 흉흉한 거라니 그게 무슨 망언인가! 아, 그렇군. 아직 소개를 안 했지.”

    소개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었다.

    인빅투스를 모르는 마물이 얼마나 있겠나? 바르베라의 목에 걸린 저 문양은 ‘맹견주의’ 표지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아이는 카르메네르 언니의 둘째 딸 바르베라일세. 말하자면 내 조카뻘 되는 아이지.”

    스칼렛이 방긋방긋 웃으며 바르베라의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칸다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루칸다는 차라리 맹수의 우리에 뛰쳐드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정신 나간 짓거리였다. 저건 천하의 인빅투스다. 인빅투스의 머리를 쓰다듬느니, 맹수 우리에 알몸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바르베라는 스칼렛이 쓰다듬기 편하도록 고개를 더욱 낮췄다.

    “찾아뵙는 게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대모님. 브람스에게 얘기를 듣고 바로 찾아왔어야 했지만, 정리해야 할 일이 많아 남아 있던지라 시일이 늦어졌습니다.”

    “아닐세, 아닐세! 이런 늙은이를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우니 말이야. 언니는 잘 지내나?”

    스칼렛의 언니이자, 나르시안의 첫째 딸.

    그리고 바르베라의 어머니인 ‘카르메네르’ 역시 전설적인 상속 신분의 흡혈귀였다.

    물론 지금은 그 힘이 많이 쇠약해진 탓에 그녀의 첫째 딸인 ‘네비올로’가 대부분의 가계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스칼렛이 머리에서 손을 떼자, 바르베라가 스칼렛의 손을 공손히 붙잡아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을 한 후 말했다.

    “어머니의 일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대모님을 마르하바 서도까지 모실 수 있는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루칸다는 ‘마르하바 서도’라는 키워드를 듣고 무언가가 맞물리기 시작한 예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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