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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86화 (186/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86화

    그리하여 그들은 폭풍 속에서(6)

    “그, 뭐냐. 내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해야 할지, 이런 걸 처음 봤다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삼가 심심한 조의를 표해야 하나, 명복을 빈다고 해야하나.”

    “쫑알쫑알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고 있어라.”

    “으, 응. 혹시 괜찮으면 입에 동전이라도 넣어줄까?”

    “미치겠군.”

    누자베스는 백주월에게 업힌 채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이었다. 류시혁과 벌였던 사투의 영향으로 마을의 곳곳이 파괴되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포탑만큼은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주민의 대다수가 포탑에 갇혀 있었던 탓에 인명 피해도 없었고 말이다.

    다른 세계선의 류시혁을 무사히 토벌하는데 성공했고, 누자베스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덕분에 누자베스는 만신창이가 되어 스스로 걸을 수도 없었고, 혈액이 고갈되어 신체 재생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누자베스와 달리 백주월은 멀쩡한 모습이었지만. 이 전투에서 누가 더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는지 말하자면 단연 백주월 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자베스의 경우는 반죽음이 되었을 뿐이다. 그에 비해 백주월은 완전히 사망한 상태.

    생물로써의 생명 유지 활동이 정지했고, 흙으로 돌아갈 일만 남은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누자베스를 업고 폐허가 된 마을의 가로를 걷고 있는 백주월은 꽤나 멀쩡해 보였다.

    도저히 죽은 시체로 보이지 않을 만큼 말이다.

    어째서?

    그 이유는 간단하다.

    상속 신분과 동일한 위계를 지닌 누자베스의 혈액이 백주월의 몸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수혈은 멈췄지만, 남아 있는 혈액을 불태우며 끊임없이 불사성을 얻고 있는 것이다.

    고유 권능을 사용하는 전투라도 하지 않는 한, 한 번 가득 수혈하는 것만으로도 백주월은 하루 동안 살아 있는 인간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오늘처럼 고유 권능인 ‘에임페리얼 콜’을 사용하기라도 했다간 가득 수혈을 받아도 1분을 버티기도 힘들었다.

    현계 최강의 능력을 순식간에 손에 넣은 대가라고 하기엔 확실히 값비싼 상황.

    백주월에겐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누자베스가 머물고 있었다는 여관까지 도착한 후, 등에 업혀 축 늘어져 있는 누자베스를 침대에 내던졌다.

    “망할…… 좀 더 상냥하게 대해주면 덧나나…….”

    “그건 생각 못 했는데. 언제부터 내 애인이었냐?”

    “그러니까 여자한테 인기가 없는 거다. 자신이 이타적이고 도덕적인 개체라는 가식을 떨어야 여자가 꼬이지.”

    “그런 식으로 여자를 대해본 적은 없어서 몰랐네. 뺨이나 한 대 후려갈기고 벌리라고 하면 대부분은 할 수 있어서 말이야.”

    “너는 진짜 쓰레기 새끼야. 하…… 빌어먹을 칼침 맞은 곳이 아직도 쑤시네.”

    누자베스가 앓는 신음을 내며 천천히 돌아누워 자리를 잡는 동안, 백주월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미 새벽에 가까워진 늦은 시간이었고, 방 안은 기름등의 미약한 불빛이 전부였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누워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누자베스였다.

    “잠도 안 오는데 창녀라도 부를까?”

    “돈은?”

    “외상으로 안 되나?”

    “몸뚱이가 그렇게 씹창이 나도 여자 생각이 나냐? 대단한 발정이 난 모양이구만.”

    “그거하고 이거는 상관이 없는 거야. 용사님은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

    누자베스가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왠지 짜증나지만 누자베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류시혁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누자베스도 백주월도 목숨을 걸어야 했을 만큼 극한까지 치닫은 사투였다.

    격렬한 전투는 전신의 신경계를 한계치까지 곤두서게 만든다. 게다가 뇌가 불타오를 만큼 달궈진 열기만큼이나 고양된 감정 때문에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이대로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백주월은 썩 내키지 않는 듯 창틀에 한쪽 팔을 걸친 채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문득 떠오른 것처럼 담배 연기와 함께 말을 토해냈다.

    “누자베스 너한테는 상황이 나쁘지 않게 돌아갔군.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니까.”

    백주월은 누자베스에게 가장 큰 위협 중 하나였다. 누자베스를 처치하고, 타르틸리엇을 탈환하기 위해 공화정파에서 파견한 용사 아닌가?

    타르틸리엇을 되찾을 때까지 끈질기게 뒤를 쫓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백주월은 분명한 죽음을 맞이했다.

    지금은 체내에 남은 누자베스의 혈액을 연소시키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만, 그런 걸 살아 있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수혈받은 혈액은 고갈된다. 앞으로 길어야 1시간. 그때가 용사 백주월의 최후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라도 있다고?”

    누자베스도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대며 앉았다.

    “유언 같이 거창한 건 아니지만.”

    백주월은 피식 웃으며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그의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부터 시작됐다. 봄이면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그는 자신을 비극으로부터 태어난 괴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자면 비극은 백주월의 무엇도 바꿔놓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 비극의 주인공을 자처했던 것뿐이었다. 세상은 그를 괴물로 만들지 않았지만, 백주월은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을 만큼 나약했던 것뿐이다.

    죽이고, 빼앗고, 찢고, 부숴서 모조리 엉망으로 만드는 게 유일한 재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야만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겁쟁이였던 것뿐이다.

    백주월은 생각했다.

    오늘 마을의 아이들에게 받은 살구꽃을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용서받을 권리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을 반드시 극복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이상주의자의 달콤하고도 허망한 실언이었고, 인간은 현실과 실언의 괴리에서 고통받으며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백주월이 다시금 비올리네를 떠올리자면.

    비올리네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나 가까스로 말해주고 싶었다.

    “용서의 권리 따위를 누군가에게 갈구하지 않아도, 볼품 없는 발버둥을 거듭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로 했어. 초극과 소원한 저변의 삶에서 불완전한 채로, 불완전한 것들끼리 등을 맞대고 살아가는 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니잖냐.”

    백주월이 그녀와 닮아 있다고 믿는 만큼.

    그녀 역시 백주월과 자신이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도저히 위안은 되지 않겠지만,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는 동질감 정도는 느낄 수 있지 않을가?

    그렇게나 추악하고, 더러운 짐승끼리 뺨을 부비며 살아가는 방법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심장이 터질 만큼 무거운 죄책감을 덜어 놓을 방법은 전무하겠지만.

    그들이 남긴 과오를 용서받을 방법 역시 존재할 리 없겠지만.

    역한 악취를 풍기는 짐승들이 서로를 품어주려 하는 것만으로도 세간은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주고 싶었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고, 들어주길 바랬던 이야기였다.

    그래도, 나란히 걷자고 말이다.

    “오늘 도와준 걸 조금이라도 고맙다고 생각한다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하게 해줘라.”

    백주월이 손가락만한 플라스크를 꺼내 누자베스를 향해 휙 던졌다. 누자베스는 플라스크를 낚아챈 뒤 눈을 가늘게 뜨며 백주월을 노려봤다.

    “이미 의식과 기억이 부분적으로 동화된 상태일 텐데.”

    “그런 애매모호한 것보다 직접 목격하는 편이 실감이 들 테니까.”

    플라스크를 손에 쥔 채로 잠시 뜸을 들였지만. 누자베스는 크게 한숨을 내쉰 뒤 플라스크를 열었다.

    그리고는 높아진 체온 탓에 메말라 있던 입안을 살짝 적실만큼만 액체를 머금었다.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얼굴 쪽은 본래의 형태와 비교하여 큰 변화는 없었지만, 가슴과 엉덩이의 실루엣이 변해 있었다.

    누자베스는 치골까지 닿을 만큼 길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이제 됐냐?’라는 표정으로 백주월을 쳐다봤다.

    표정이나 분위기가 변한 탓에 기억 속에 존재하던 비올리네 그 자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백주월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절로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처구니없는 결말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되니 꽤나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됐네요, 용사님.”

    비올리네는 짓궂은 미소를 머금으며 그렇게 말했다.

    “꽤 재밌는 장난이었네. 그렇게나 찢어 죽이고 싶었던 마물이 너였다니.”

    “애정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라니까요. 사람의 감정만큼 형편 좋게 해석되는 것도 없지 않나요?”

    “이유라도 물어보자.”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는지 궁금했다.

    단순히 백주월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면,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속임수가 따로 있었을 것이다.

    비올리네라는 가짜 정체를 이용해서 백주월을 곤경에 빠뜨릴 수단은 많지 않았나?

    백주월의 물음에 비올리네는 커다란 호박빛의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잠시 말을 골랐다.

    그러고는 머리맡에 놓여 있던 담배갑에서 한 개비를 빼서 입술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 반대였으니까. 나는 백주월 네가 살아남길 바랐던 것뿐이다. 미완성의 캐릭터가 어떤 식으로 삭제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뿐이다.”

    가장 순수하고도 삐뚤어진 애정이었다.

    그리고 본래 지니고 있었던 아주 약간의 책임감이기도 했다.

    누자베스에겐 백주월을 완성시켜야 할 이유는 없었다. 전쟁 군주로써 용사를 존속시켜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같은 좌절과 절망을 두 번이나 맛보고 싶진 않았다. 그것만이 리제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이기도 했다.

    비올리네는 할 얘기는 다 했다는 듯 담배를 대충 던져 버리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백주월에게 남은 시간은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앞으로 몇 분이나 더 남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조만간 분명한 죽음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 만큼은 확실했다.

    백주월은 삶에 별다른 미련이 남지 않은 사람처럼 창문 너머의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밤하늘은 새벽을 맞이하려는 듯 붉게 물들고 있었다. 백주월은 이불 안으로 모습을 숨긴 비올리네 쪽을 슥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나 해줬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적어도 죽는 순간만큼은 홀로 있고 싶었다. 천천히 기억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소파에서 일어나 방을 나설 생각이었다. 문고리를 붙잡아 돌리려던 찰나.

    이불 안쪽에서 뻗어 나온 가느다란 손이 백주월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이불 안쪽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뭔데 또?”

    비올리네가 갑자기 상체를 일으키더니, 침대 위에 주저앉은 채로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스르륵.

    얇은 천이 매끈한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가 정적뿐인 방 안을 얕게 울렸다.

    투명해 보일 만큼 창백한 속살이 드러났고, 새벽의 햇살에 비쳐져 고혹적인 붉은 윤곽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비올리네는 시선을 떨구며 입술을 들썩이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건부이긴 해도 죽지 않는 방법은 있잖아.”

    “평범하게 생각하자면 매일 네 피를 빨며 살아야 되는 거 아냐?”

    “젠장, 하여간 일이 꼬이려니까 별 더러운 꼴을 보게 되네. 피차 서로 싫은 건 아는데…… 뭐, 우리 같은 놈들은 이렇게 꼴사납게 살아야지 어쩌겠어?”

    비올리네는 키득키득 웃으며 백주월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백주월의 몸이 포개지듯 비올리네의 위로 넘어졌다.

    엉성하고 느릿하게, 서툴지만 나란히 걷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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