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85화
그리하여 그들은 폭풍 속에서(5)
기억의 혼선이 일었다.
누자베스와 백주월의 의식이 뒤섞였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의 기억인지 그 경계마저 애매모호했다.
상속 신분과 동일한 위계라고는 해도 누자베스의 혈술 제어도는 한없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숙련도도 낮을뿐더러, 급조한 계약이 완벽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걸 가릴 상황은 아니었다.
불평이나 불만이 있다고 해도 가장 큰 위협을 처리한 후에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움찔.
백주월의 손끝이 떨렸다.
분명 심장이 꿰뚫려 즉사했을 터인 백주월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굼뱅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딱 이럴 때 쓰는 말이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상상 이상이었다.
백주월은 위계의 상승에 따른 능력치의 상승폭이 누자베스와 태생적으로 달랐다.
그 만큼의 잠재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자베스가 위계를 한계치까지 끌어 올려도 10의 능력을 발휘하는 게 고작이라면.
누자베스가 도달한 위계에 백주월이 도달한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스스로도 섬뜩해서 몸서리를 칠 만큼의 능력이다. 백주월은 자신의 손아귀에 휘감기는 전능감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물론 불완전한 계약으로 인한 한시적 능력이다.
지금도 백주월이 살아서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상속 신분과 완벽히 일치하는 위계를 지닌 누자베스의 혈액을 수혈받고 있기 때문이다.
상속 신분의 혈액을 체내에서 불태우며 이미 죽었을 터인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이 세상은 백주월을 실존의 영역에서 가장 높은 위계에 놓인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백주월이 본래 지니고 있었던 고유 권능 ‘에임페리얼 콜’의 상향선이 무서운 속도로 돌파되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수많은 전투 경험이 축적되며 순차적으로 개방될 능력들이었다. 하지만 상속 신분의 혈액으로 인해 몇 번이고 한계가 돌파되며 채널링이 확장되었다.
백주월의 눈동자가 누자베스와 같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이제야 공평한 게임이 된 것 같은데. 2회전을 시작해야지?”
백주월이 목을 까딱이며 류시혁을 향해 말하자. 류시혁은 미간을 찡그리며 실소를 흘렸다.
“둘이서 덤비는 걸 공평하다고 할 수 있는지 몰랐다만.”
쿠웅!
바로 누자베스를 노리고 검을 휘두르려던 류시혁의 앞에 폭발이 일었다.
어차피 백주월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 만큼은 변치 않았다. 지금 저렇게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흡혈귀의 혈액을 불태우며 죽음에 유예를 거는 것뿐이다.
즉, 혈액을 수혈하고 있는 누자베스를 처리한다면 백주월 역시 알아서 쓰러질 것이다.
그런 심산으로 누자베스를 먼저 처리하려고 했지만, 그런 간단한 추론을 읽지 못할 백주월이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환된 폭탄이 폭발하며 류시혁의 몸을 밀쳐냈다. 물론 누자베스까지 폭발에 휘말리게 하지 않기 위해 30센치가 넘는 두꺼운 철제 격벽을 동시에 소환시켰다.
경악할 만큼의 소환 속도와 다중 구현 능력이다. 아마도 실존의 영역에서 이 정도의 간섭 능력을 지닌 건 외신을 제외하고 백주월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급조해낸 완성형 치고는 나쁘지 않은 완성도군.”
류시혁의 상의가 폭발에 찢기고 불태워졌고,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째서 죽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길 만큼 처참한 꼴이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선을 넘어 왔는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류시혁의 몸에 선명하게 새겨진 상흔들이 지옥이라던가 악몽과도 같았던 과거를 상징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죽음의 안식을 맞이하지 못하는 건 백주월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류시혁 역시 본래대로라면 죽었어야 당연할 만큼 몸이 망가져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처절하고 필사적으로 살아왔던 시간 만큼의 관성이 시체 같은 몸뚱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둘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온 뒤에야 용사로써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쪽은 타임 리미트가 걸려 있다. 버티기만 한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겠지.”
완성형의 백주월은 확실히 류시혁이 단신으로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존재다. 실제로 류시혁이 존재했던 세계선에서도 다수의 협공을 통해 가까스로 제압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백주월은 상황이 달랐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누자베스의 혈액이 필요했다. 지금도 끊임없이 수혈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고유 권능을 사용할 수록 혈액의 소모량은 급증한다.
방금 전의 능력 발동만으로 누자베스의 체내에 남은 혈액을 상당히 소모한 것이다. 이대로 능력 사용을 유도하며 시간만 끈다면 누자베스가 먼저 말라 죽을 테고, 백주월 역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시체로 돌아갈 것이다.
“시간을 끌어?”
류시혁의 말이 웃겼는지 누자베스가 실소를 터뜨렸다.
“이 녀석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만큼 끔찍한 악몽 그 자체다. 시간 끌기 같은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런 허세 섞인 블러프는 질리도록 들어봤지.”
파훼법은 존재한다.
류시혁은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전장을 전전해 온 역전의 용사 아닌가?
심지어 백주월과의 전투 경험도 지니고 있었다. 능력의 발동과 구현의 매커니즘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능력은 완성되었지만 급하게 완성시킨 탓에 경험과 전투 센스는 변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틈을 노린다면…….’
키잉!
류시혁의 발끝에 검이 한 자루 날아와 박혔고, 아슬아슬하게 몸에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류시혁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제어가 완벽할 리 없지.’
아무리 강력한 능력이라도 제어에 익숙하지 않다면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나 다름 없다.
거기까지 판단을 끝마친 후 류시혁이 다시금 지면을 박차며 도약했다. 이번에도 누자베스를 노릴 작정이었다.
백주월에게 상당한 양의 혈액을 수혈하고 있는 덕분에 스스로의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다. 먼저 노리는 건 당연했다.
물론 백주월이 누자베스를 지키며 싸우려 할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했지만. 그런 식으로 수세를 취하게 하며 시간만 끌어도 승리의 여신은 류시혁의 판정승을 선언해줄 것이다.
키잉!
다시 검이 날아와 날카로운 소리를 울리며 지면에 박혔고, 류시혁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유연히 회피해냈다.
백주월은 혀를 차며 누자베스의 발목을 붙잡아 휙 들어 어깨에 걸쳤다.
“쿨럭……!”
가능하면 상냥하게 다루라고 불평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이미 류시혁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으니까. 물론 류시혁이 직선으로 달려온 건 아니다. 계속해서 날아드는 검을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회피 기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면에 꽂힌 검은 류시혁의 움직임에 맞춰 궤적처럼 그려져 있었다.
“이거 실패하면 우린 다 뒤진 목숨인 거 알지?”
누자베스가 불안한 어조로 속삭이듯 말했고, 백주월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 같은 놈하고 엮인 게 내 인생 최고의 실패다, 미친 새끼야.”
타닷!
까앙!
간발의 차이로 류시혁의 검격을 피해내며 다시금 궤적을 역행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자베스의 머리가 양단될 뻔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만이 잘려나가 흩날렸다.
“잠깐! 잠깐, 스탑! 좀 더 빨리 피해! 머리통 으깨지는 꼴 보고 싶냐!”
“징징거리지 좀 마! 아직 안 죽었잖아!”
류시혁은 20여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백주월과 누자베스를 응시했다.
“언제까지 도망만 칠 생각이지? 슬슬 그쪽에게 남은 시간은 별로 없을텐데.”
사실이었다.
이미 누자베스에게 남은 혈액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격렬한 전투가 계속된다면 1분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백주월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멈춰섰다.
“이거면 됐냐?”
“더럽게 못 그리네 진짜…… 초등학교에서 뭘 배운 거야.”
누자베스는 불평을 투덜거리면서도 조용히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렸다.
‘혈술?’
류시혁도 혈술이 발동될 낌새를 느끼고 바로 대응할 태세를 취했지만.
이미 누자베스의 혈술이 발동될 영역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지금까지 류시혁의 궤도를 따라 검이 날아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모두 누자베스의 계산 하에서 류시혁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제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회피하고 있으며, 검은 그 움직임을 쫓아 날아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눈치를 채는 타이밍이 늦었다.
게다가 백주월에게 걸쳐져 이동되며 누자베스가 흘린 피는 지면에 꽂힌 검과 검을 모조리 연결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준비를 요하는 혈술은 흔치 않다. 물론 나르시안의 직계손이라면 이런 번잡한 사전 준비도 필요 없이 혈술을 발동시킬 수 있겠지만.
누자베스가 안정적으로 혈술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준비였다.
지면에 그려진 거대한 붉은 원은 진홍빛의 섬광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류시혁은 무엇의 전조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공간 분리……!”
쩌저저저적!!
류시혁을 가둔 구체가 윤곽을 드러내며 세계에서부터 분리되었다. 메를로의 전매 특허 기술이자, 고대의 기적 그 자체인 신기를 흉내낸 것이다.
카베르네의 능력까지 더해진다면 분리된 공간의 시간을 되감거나 빨리 감는 등의 초자연현상도 구현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공간을 분리시켜 놓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동시에 분리된 공간 속에서 거대한 쇳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병기로 만들어져, 병기로 사용되었고, 병기로써 사용된 결과 원형을 잃은 것 중에서 최강이자 최흉이라고 평가받는 병기는 단 하나 뿐이다.
이견 없이 모두가 입을 모아 같은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 무게가 4670kg이며 길이만 3.3m에 달하는 거대한 폭탄. 플루토늄이 6.2kg이나 탑재된 인류가 빚어낸 악마의 걸작이다.
류시혁의 머리 위에 소환된 것은 원자폭탄 팻맨이었다.
“이런 시시한 잔재주로 죽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류시혁은 어금니를 꽉 물며 검을 치켜들었다. 이딴 격리 술식 따윈 일격에 찢어 발길 수 있었다. 원자폭탄까지 통째로 양단해버릴 작정이었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기 직전.
“가끔은 그런 경우도 있지.”
누자베스는 킬킬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박리된 공간 속에서 충격파가 일었다.
류시혁은 자신의 고유 권능이 일순간 무력화되었다는 사실을 금새 눈치챌 수 있었다.
결착이 난 것이다.
류시혁은 치켜들었던 검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젠장, 이번엔 짧았군.”
원래 대부분의 사인은 본인이 납득하지 못하는 법이다. 전설적인 용사 류시혁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조금 짧았거나, 살짝 부족한 것만으로도 인간은 죽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