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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84화 (184/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84화

    그리하여 그들은 폭풍 속에서(4)

    “이카로스는 용감했던 게 아니라, 단지 멍청했던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

    류시혁은 검을 잡은 자세를 고치며 위협 같은 충고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대치하듯 선 백주월은 류시혁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누자베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착각하지 마라. 네놈이 다른 녀석의 손에 죽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뿐이니까.”

    “쿨럭……! 염병…… 하, 하아…… 남자놈한테 츤데레의 정석 같은…… 말을 들어도, 예상한 것만큼 기분 좋진 않네.”

    누자베스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경악할 만큼의 재생력이다. 아주 잠시 난도질을 멈춘 것만으로도 전신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어갔다.

    제필프의 최종 선고의 치유 능력과 흡혈귀의 종족 특성인 초월적 재생력이 반영되고 있는 결과였다.

    저 정도의 재생 속도라면 거의 불사에 가까워 보였다.

    이미 류시혁과 같은 용사가 아니라면 누자베스를 죽음까지 몰아넣을 수 있는 존재는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누자베스는 비틀비틀 일어나 류시혁의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 그럼…… 난 이만 도망칠 테니까. 뒤는 잘 부탁해요, 용사님.”

    “뭐? 미친 새끼야 네가 도망치면 안 되지! 폼이란 폼은 다 잡아놓고!”

    “미, 미쳤다니! 내가!? 아니, 저런 괴물하고 싸우겠다고 나서는 놈이 미친놈이겠지! 나는 한없이 제정신이다!”

    “그럴 거면 폼은 왜 잡았어! 어? 그냥 저기 묶인 애새끼 하나 목 따버리지!”

    “가오 좀 잡고 싶었는데…… 이렇게 무자비하게 난도질당할 만큼 실력 차가 어마어마할 줄은 몰랐거든.”

    “너는…… 넌 진짜 병신이다…….”

    백주월은 질렸다는 듯 누자베스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누자베스가 더 도망치지 못하게 손목을 붙잡았다.

    누자베스는 체념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뒈지는 거 확정된 참에 말하는 건데. 나보다 네가 더 병신이야.”

    “알게 뭐야, 젠장! 나도 알고 있어.”

    상대는 용사 류시혁이다.

    그것도 마왕을 두 번이나 토벌하며 스텔라에게 받은 고유 권능을 극한까지 발전시킨 상태.

    단순한 객기나 만용으로 덤벼들 수 있는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아무리 누자베스와 백주월이 합심하여 협공을 펼친다고 해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다.

    “작전 회의는 끝났나?”

    류시혁이 물었고, 누자베스는 루칸다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루칸다라면 1:1의 결투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지닌 챔피언이다. 그에 비해 누자베스의 능력은 군단 육성과 운용에 포커스를 두고 있지 않나? 물론 어느 정도의 전투 능력도 지니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걸어 다니는 인간 병기이자, 마물 분쇄기 그 자체인 류시혁에게 비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백주월의 상황도 누자베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성장을 끝마친 백주월이었다면 전투의 종류에 구애받지 않을 만큼 다재다능한 킬링머신이었겠지만, 능력의 기본 베이스는 어디까지나 ‘대군전’에 속해 있다.

    일대 다수의 전투에 특화된 능력이었던 탓에 개인의 무력이 극한까지 치닫은 류시혁을 상대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기서 꽁무니 내빼고 도망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누자베스든, 백주월이든 어느 쪽이든 간에 이 둘은 극한의 가오충이라는 사실 만큼은 확실했으니까.

    서로 닮은 만큼 상의 따윈 필요 없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개짓거리를 할 생각인지 말이다.

    가장 깊은 곳에서 이어져 있는 감각에 백주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실수하지 마라.”

    백주월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누자베스가 자신 없다는 듯 주눅 든 어조로 대답했다.

    “사람이 실수도 하고 그럴 수 있지…….”

    “사람 아니잖아, 새끼야.”

    “맹점을 찔렸네.”

    푸른빛의 균열이 밤하늘을 뒤덮었다.

    전후좌우는 물론이고 하늘까지 새파랗게 보일 만큼 거대한 차원 균열이었다.

    백주월의 고유 권능 ‘에임페리얼 콜’이다.

    그리고 동시에 누자베스의 ‘크랙 에임페리얼 콜’이 발동된 것이다.

    원작과 열화판 모조작의 차이는 명백했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지금 이 순간까지 열화판 능력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름대로 성장시켜 왔다.

    어느 쪽의 균열이든, 한 번이라도 유효한 공격을 허락한다면 치명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현대의 병기는 이미 마법을 초월했다.

    백주월이 수백 발씩 소환해 내는 대전차 미사일은 이미 이 세계의 마법사라거나 마도 연구자들의 눈에는 ‘기적’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게다가 누자베스가 소환해 내는 고대 유물도 그 자체만으로도 기적에 속하는 물건이다.

    그런 고대 유물이 소환된 동시에 ‘상속 신분’의 혈액을 이용한 강화가 덧씌워진다.

    만약 누자베스의 혈질이 지금보다 더 상승한다면, 전설적인 윤왕 루아 카날다와 마찬가지로 ‘관념의 영역’을 절삭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백주월은 누자베스 쪽을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작전 같은 건 있냐?”

    “나한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누자베스는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류시혁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나는 그냥 목줄 풀린 미친개라고 생각해.”

    누군가의 흉내처럼, 누자베스는 지금 심장을 조여오는 감각에 본능을 맡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본능조차도 닮은 둘이다.

    구태여 입으로 장황한 작전을 떠들 필요는 없었다.

    백주월은 쯧, 하고 혀를 차며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이제는 변명의 여지 없이 전의를 드러낸 것이다.

    “저 마물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공화정의 용사여?”

    “원금만 회수하는 얼간이처럼 보였냐? 원래 이런 건 원금이 푼돈이라도 이자를 복리로 불려서 뜯어먹는 게 업계의 상식인데.”

    “조금 더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라고 기대했건만, 지금의 선택은 심히 실망스럽군.”

    류시혁도 더 이상 나눌 말이 없었다.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낸 상대를 대화로 설득하겠다고 생각할 만큼 미지근한 삶을 살아오진 않았으니까.

    푸른 균열 속에서 발사된 대전차 미사일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대편의 균열에서는 반 르낙시아 이전의 시대에서 사용되었던 냉병기가 수백 자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죽음을 초래했던 병기들이 오로지 한 사람의 사내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보다 더 호화로운 십자포화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가장 사치스러운 죽음을 코앞에 두고, 류시혁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멋지지만, 그 만큼 가볍군.”

    류시혁이 백주월을 향해 달려들며 검을 뽑아 들었고, 허공을 크게 가르듯 휘두르자.

    쩌적!

    섬뜩한 굉음과 함께 지평선과 정확하게 수직을 이루는 절삭선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였다. 절삭선을 중심으로 시야가 뒤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풍경화를 그려 놓은 종이를 나이프로 잘라 비스듬히 놓는다면 이렇게 보이지 않을까?

    그런 감상이 가장 먼저 들었고, 지금 류시혁이 뭘 베어냈는지 먼저 눈치를 챈 건 누자베스 쪽이었다.

    ‘윤왕을 초월했다고? 미친…… 저 정도의 괴물일 줄은 예상도 못 했는데.’

    현재의 루칸다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 그 이상이었다. 류시혁은 단 한 번의 검격으로 시공을 절삭해 냈다.

    이미 전설과 신화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이다. 인간의 몸으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를 실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기도 메타밖에 안 남았겠구만.’

    순식간에 수백 발의 미사일과 수백 자루의 냉병기를 삭제시켜 버린 류시혁은 거침없이 백주월을 먼저 노렸다.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인지 순식간에 간파한 것이다.

    누자베스도 간과할 수 없을 만큼의 전력을 지닌 마물이었지만, 당장 적수가 될 수 있는 쪽은 백주월이었다.

    누자베스의 능력은 조금 전의 접전으로 이미 파악이 끝나지 않았나?

    이미 류시혁의 안에서는 백주월의 덤으로 처리해도 될 만큼 우선순위가 낮았다.

    백주월은 류시혁의 접근을 순식간에 허용했고,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한 류시혁은 그대로 백주월의 몸을 반으로 가르려는 듯 검을 횡단으로 휘둘렀다.

    가볍게 휘두른 검격만으로 시공이 왜곡되며 물결치듯 시야가 일렁였다.

    저런 검을 인간의 몸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백주월도 이미 인간의 육체 능력을 초월한 용사다. 맥빠지는 전개는 없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몸을 낮게 숙이며 횡단 베기를 피해냈고, 동시에 재빠르게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이동한 궤적을 따라 소환된 세열 수류탄이 산발적으로 폭발하며 류시혁을 덮쳤지만.

    물론 이 정도의 화력으로 류시혁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바로 누자베스가 협공을 가하듯 지면에 균열을 열었다.

    “이런 무딘 검으로 죽일 수 있을 만큼 가볍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

    빠악!

    예상도 못 한 불의의 일격이었다.

    누자베스는 처음부터 검과 창을 뽑아내 원거리에서 요격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에임페리얼 콜의 전조인 푸른 균열은 어디까지나 주의를 끌기 위한 블러핑였다.

    수십 미터를 2초 만에 돌파하여 체중을 실은 발차기를 머리통에 먹였지만, 쓰러지긴커녕 휘청이지도 않았다.

    “너무 멍청한 짓은 예상하기 힘들어서 짜증이 치솟는군.”

    류시혁은 그대로 누자베스의 발목을 붙잡아 내던졌다.

    쿠웅!

    석재의 벽면에 처박힌 누자베스는 케첩이 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으깨져서 살점과 혈액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아무리 재생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이번만큼은 회복에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동안 여유롭게 백주월을 처리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예상 이상으로 결착은 순식간에 맺어졌다.

    현재의 류시혁을 상대로 하자면 백주월이 취할 수 있는 전법은 히트앤런뿐이다.

    하지만 기동성 자체도 큰 격차가 벌어져 있었고, 백주월의 모든 공격이 류시혁에게 유효한 피해를 입히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던가?

    결국 만신창이가 된 백주월이 벽면까지 몰리게 되었고, 류시혁의 구두 굽에 가슴을 짓눌려 꼼짝도 못 하게 된 상황까지 치닫았다.

    류시혁은 조금 전 벽면에 처박힌 채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누자베스 쪽을 곁눈질로 흘깃 바라봤다.

    이미 꽤나 육체가 수복되었는지 폐를 쥐어 짜내듯 날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우연이로군. 죽을 자리가 이렇게나 가까이 나란히 선 곳이라니.”

    백주월의 바로 옆에 누자베스가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헐떡이고 있을 뿐이다.

    이미 굽의 절반이 잠길 만큼 넓은 피 웅덩이가 퍼져 있었다.

    저런 상태라면 협공은커녕 백주월을 구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류시혁은 느긋하게 검의 끝을 백주월의 흉부에 겨눴다.

    백주월은 어금니를 꽉 물며 양손으로 검을 붙잡아 저항하려 했지만.

    “이쪽 세계 선은 엉망진창인 만큼 형편없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겪어 온 수많은 박리 차원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뒤죽박죽이군.”

    류시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쑤셔 넣었다.

    콰드득!

    늑골이 부서지며 가슴이 꿰뚫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백주월은 마지막 순간까지 류시혁을 죽일 듯이 노려봤을 뿐, 그 이상은 없었다.

    이내 고개를 떨군 채 축 늘어져 입과 코에서 피를 쏟아냈다.

    류시혁이 발을 떼자 백주월이 피 웅덩이 위로 쓰러졌다.

    이제 남은 건 누자베스뿐이었다.

    류시혁이 누자베스의 목을 치기 위해 검을 치켜든 순간, 누자베스가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웃기지?”

    눈살을 찌푸리며 류시혁이 묻자.

    누자베스는 한참 동안 웃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부서져서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머리를 천천히 들어 류시혁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역시 눈치 못 챌 줄 알았어.”

    누자베스가 확신을 얻은 건 바로 직전이었다. 무모한 육탄 돌진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을 때는 가능성을 얻었고, 누자베스보다 백주월을 먼저 죽였을 때 드디어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순서가 틀렸거든, 얼간이 자식아.”

    그 순간.

    지면에서 뒤섞인 누자베스와 백주월의 혈액이 공명하듯 불길한 붉은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불멸의 부름에 응하여라. 영원한 밤을 걷는 원죄의 상속자가 이곳에서 거짓된 영겁을 약속하노라.”

    상속 신분의 계약 선언이다.

    류시혁이 바로 그 사실을 눈치챘고, 처음으로 그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어째서 누자베스가 상속 신분의 위계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고려하기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누자베스가 미증유의 악몽을 완성시키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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