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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83화 (183/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183화

그리하여 그들은 폭풍 속에서(3)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누군가는 짊어져야 할 일이었을 뿐이니까.

쓸쓸해 보이던 뒷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지친 듯 터덜거리던 발걸음과, 회한처럼 흘러내리는 담배 연기가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류시혁의 안에 남아 있는 수많은 후회 중 가장 선명한 기억이었다.

어쩌면 손을 뻗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물에 빠진 어린아이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내 손을 뻗고, 누군가가 그 손을 붙잡아주길 바라는 것처럼.

그가 짊어진 마땅한 책무에 짓눌려 도저히 ‘구해줘’라는 말을 내뱉지는 못했겠지만.

구해달라는 간절하고도 상투적인 말을 대신하여, 시답잖은 농담 몇 마디와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를 토해낸 것일지도 모른다.

류시혁이 그 사실을 깨달은 건 꽤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천칭 저울은 준비됐고, 어느 쪽을 기울일지 그 선택만이 남았군.”

소년 한 사람의 목숨.

그리고 수천 명에 달하는 쿠르헨 섬의 거주민들. 혹은 그들 모두를 포함한 수 억의 목숨이다.

세 번째 선택지에는 그 어떤 합리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에 누자베스가 선택해야 될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소년을 살리기 위해 수천 명의 목숨을 저버릴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소년의 목숨을 스스로 거두고, 알량한 정의를 행사했을 뿐이라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옹호할 것인가?

류시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계단의 끝을 응시했다.

이윽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 왔던 재판의 집행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류시혁이 기억하고 있던 누자베스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외견은 틀림 없이 누자베스였다.

하지만 빛을 잃지 않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류시혁이 자신의 손으로 숨통을 끊었던 누자베스와 확연히 다른 점이다.

누자베스는 거대한 포탑 ‘카세 기간토투스’를 훑어본 후. 맞은편에 세워진 말뚝에 묶인 소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정확히 가운데에 위치한 계단에는 류시혁이 걸터 앉아 누자베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왔나? 의외로군.”

먼저 입을 연 쪽은 류시혁이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누자베스는 담배갑을 꺼내 머리에 툭툭 쳐서 가다듬은 후, 담배 한 개비를 입으로 물어 뽑아냈다.

“와이프 동반 파티였어? 그러면 미리 알려줬어야지. 일찍 말해줬으면 난교에 환장하는 갈보 하나 데려왔을 텐데.”

류시혁은 그 익숙하고도 그리운 농담에 킬킬 웃으며 부싯돌을 꺼내 한 손으로 튕겼다. 누자베스와의 거리는 20미터 이상.

하지만 부싯돌에서 튀어 오른 불꽃은 정확하게 누자베스가 물고 있는 담배의 끄트머리에 붙었다.

시답잖은 기교에 불과하지만, 류시혁의 능력이 얼마나 예리하게 다듬어져 있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류시혁의 권능에 대해 이해를 지닌 누자베스의 시점에서 보자면, 지금 당장 줄행랑을 치고 싶을 만큼 섬뜩한 완성도다.

하지만 류시혁에게 투기나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누자베스와 싸울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저 누자베스의 선택을 지켜보려는 것뿐이다.

만약 누자베스가 소년이 아닌 섬의 거주민들의 목숨을 택한다면, 그때는 용사 백주월을 처치하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소년을 죽이는 쪽을 택한다면 그때는 그걸로 메모리얼 전투의 목표가 완료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누자베스와 맞붙을 이유는 무엇 하나 없었다.

“그래서? 이게 무슨 파티인데?”

“선택지를 고를 뿐인 게임이다. 어느 쪽이든 자유롭게 골라도 상관없다만.”

류시혁은 포탑에 갇혀 있는 주둔대의 병사들과 거주민들을 바라봤고, 고개를 돌려 반대편에 묶여 있는 소년을 응시했다.

“죽거나 살아남거나. 혹은 살아남거나 죽을 뿐이다. 유치원생도 즐길 수 있는 즐거운 산수 놀이 시간이지. 물론 답안지를 들고 손에 직접 흑연을 묻혀야 하는 건 너다, 한주호.”

그 이름이 류시혁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누자베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눈앞에 나타난 류시혁이 본래 속해 있던 세계선에선 실체를 완전히 간파당했던 것이다.

‘메모리얼 전투가 이런 식으로 사용될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누자베스는 이미 어느 정도의 추정을 끝마쳐 놓은 상태였다.

첫 번째 메모리얼 전투를 끝맺은 후 스칼렛과 루칸다에게 들은 정보를 토대로 도출해 낸 가능성은 몇 가진가 있었다.

스칼렛은 메모리얼 전투가 ‘박리 차원’에 속할 것이라 추측했다.

그리고 박리 차원은 관측자에 의해 관측될 때에 한하여 존재하는 차원이다.

관측됨으로써 존재가 성립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관측되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도 없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박리 차원은 관측자에 의해 관측되고 있음을 외부의 존재에게 인지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외부의 존재란 세피로스나 크리스델 같은 외신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류시혁과 누자베스는 외신 외에도 외부의 존재가 한 사람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류시혁이 ‘한주호’라는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이 게임의 원리가 폭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자베스가 입을 다문 채 묶여 있는 소년 쪽을 바라보고 있자, 류시혁이 뒤이어 말했다.

“이번만큼은 전쟁 군주 누자베스가 아닌, 한주호의 네 대답이 듣고 싶군. 누자베스라는 장갑을 벗고, 직접 손에 피를 묻히게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기대되니 말이야.”

“대단하신 용사님에게 들려줄 만큼 거창한 명답이 아니라, 부끄러울 따름인데.”

누자베스는 담배꽁초를 내던진 후 숨을 깊게 토해냈다.

“왜 이 지랄을 해야 되는지는 이해가 되네. 뭐, 결국은 그거지. 무책임하게 키보드 두들긴 업보가 이렇게 돌아오는 것뿐이야.”

단 한마디다.

류시혁에게 돌려줄 대답은 그것뿐이다.

당연히 한마디뿐이다.

누자베스가 스스로를 매도하고 자책할 폭언 역시 그러했다.

그렇게 단 한마디의 궤변을 허락받은 것이다.

뻔뻔하게도 세상을 향해 돌려줄 대답 역시. 그의 선택에 주목하고 있는 높으신 분들에게 돌려줄 농담조차도.

한마디뿐이다.

누자베스가 아닌, 한주호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 한 마디를 내뱉기 위해 달려왔으니까.

누자베스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류시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멸망해 버리라고 하자.”

누자베스는 산뜻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 말을 드디어 토해내고, 만족한 것처럼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차라리 멸망하는 편이 낫지.”

누자베스의 시선은 그 어느 쪽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류시혁이 준비한 천칭 저울은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조차 아니었다는 듯 말이다.

“이딴 세상은 멸망하는 게 낫지 않겠냐?”

멸망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분투를 거듭해 온 류시혁을 정면에서 부정하듯 누자베스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농담이라던가, 허언이라던가, 속임수 따위와 결코 어울리지 않는 진심 그 자체였다.

처절하고 처절했던 의지는 드디어 서로를 마주 향했다.

“애새끼 하나 살려주지 못할 만큼 편협하게 꽉 막힌 세상이라면 내가 세상의 모든 증오와 분노가 향하는 종점에 설 뿐이다.”

그것이 누자베스, 아니 한주호에게 남은 마지막 속죄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류시혁은 더 이상 그를 구분하여 부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누자베스로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실감하게 되었다.

“구원은 거짓말처럼 느껴졌고, 용서받을 권리 따윈 정신병자의 농담이었겠지만. 허언으로 이뤄진 이 세상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말이다.”

누자베스와 백주월이 한없이 닮은 만큼.

류시혁과 누자베스는 한없이 달랐다.

아무리 서로를 이해하려 해도 결국은 이렇게나 수평선을 그리는 것이다.

“피차 서로가 믿는 걸 바라볼 뿐이니까.”

“그래, 결국 다시 이렇게 원점이군.”

류시혁 역시 담담하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쩌면 이런 결말을 원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누자베스라면 역시나 이럴 것만 같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대답이 아니었다면 류시혁 역시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개연성이라던가, 리얼리티와는 소원한 촌극이다. 합리적인 판단도 없었고, 이성적인 캐릭터는 누구 하나 없었다.

계집애처럼 주저 앉아 죄책감에 눈물이나 짤 만큼 시시한 사내 역시 없을 뿐이다.

키잉!

검집에서 뽑힌 칼날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절뚝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류시혁을 올려다보며 누자베스는 담배꽁초를 짓씹었다.

“역시 여자로 태어날 걸 그랬어.”

누자베스는 어깨를 으슥이며 혼자말을 중얼거렸고. 류시혁은 그의 혼자말에 유쾌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래, 우리가 모두 여자였다면 조금 더 현명했겠지.”

“지금보단 이성적이었을테고.”

“어쩌면 그럴싸한 타협점을 찾아냈을지도 모를 테고.”

“정말…… 그래, 그랬을 거야.”

누자베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쓴웃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이제와서 뒤늦은 후회였다.

사내로 태어난 이상 구사할 수 있는 논리는 한정적이었다.

가장 원시적이고, 야만스러운 폭력의 논리만이 수컷 짐승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대화법이었다.

계집이라던가, 계집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남자들이 청중이라면 이해가 되지 않아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지리멸렬한 토론장이 준비되었고.

누자베스와 류시혁의 거리는 필연처럼 착실하게 좁혀져 갔다. 누자베스는 담배꽁초를 내뱉으며 검을 뽑았다.

* * *

“그림으로 그린 듯 이상적인 상황입니다. 어부지리라는 건 딱 이럴 때 쓰는 말이겠네요.”

포탑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건물의 지붕 위. 백주월과 모니카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자베스는 류시혁이 제시한 모든 선택지는 거절하고, 스스로의 발로 지옥에 걸어 들어갔다.

물론 현명한 선택은 아니다.

류시혁은 완성형에 가까운 용사다.

지금의 백주월에게도 당해내지 못하는 누자베스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결투는 일방적인 형세였다.

류시혁의 압도적인 공세에 누자베스가 가까스로 버티는 것뿐이다. 승패는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었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의 문제가 남았다.

지능이라던가, 이성이 한 톨이라도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면 류시혁에게 덤빈다는 선택지를 취했을 리 없다.

모니카는 누자베스의 실책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보다 더 상황이 편리하게 굴러가 줄 수 없다고 확신했을 만큼 이상적이었다.

백주월과 모니카는 누자베스를 처치하고 타르틸리엇을 탈환하기 위해 쿠르헨 섬까지 온 것이다.

물론 중간에 류시혁이라는 걸림돌이 나타난 덕분에 복잡해질 뻔했지만. 이렇게 류시혁과 누자베스가 먼저 충돌해준 것은 천운처럼 느껴졌다.

누자베스는 당연히 류시혁의 손에 의해 토벌될 것이고, 백주월은 지친 상태의 류시혁을 처리하거나 그를 무시하고 타르틸리엇만 찾아내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포탑의 계단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투를 바라보던 백주월은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복잡하기보다 벌레를 씹은 듯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가…….’

류시혁과 누자베스가 나눈 일련의 대화를 듣게 된 덕분에 심경이 복잡했다.

모니카의 말대로 이대로 잠자코 기다리다 마무리를 하면 그만이다. 류시혁과의 약속도 있었으니, 그가 누자베스를 처리한 후 그 보답을 얻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용사님?”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선 백주월을 보더니 모니카가 놀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을 할지 짐작도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음에 안 드네.”

누자베스에게 남은 증오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아닌 다른 놈이 누자베스를 찢어 죽이는 걸 허락하는 건 아니었다.

모니카가 어떻게 만류할 새도 없이 백주월이 모습을 감췄고. 포탑의 계단 앞에서 누자베스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이미 전신에 찢겨나가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만신창이였다.

류시혁의 검이 누자베스의 머리를 가르기 직전이었다.

쿠웅! 폭음과 함께 류시혁이 재빠르게 뒤로 도약하여 물러났고, 폭연 안쪽에서 불길한 인영이 윤곽을 드러냈다.

류시혁은 난입해 온 녀석을 노려봤다.

그리고 무대 위로 갑작스럽게 난입한 백주월은 누자베스를 감싸듯 그 앞에 섰다.

“무슨 흉내지?”

류시혁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백주월은 권능을 사방에 전개시키며 대답했다.

“이 녀석은 내 장난감인데. 가지고 놀기 전에 나한테 허락은 받았냐?”

“소유권이 있는 놈인 줄은 몰랐군. 언제부터였나?”

류시혁이 백주월의 만용을 비웃는 것처럼 되묻자. 백주월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으르렁거리듯 대답했다.

“지금부터다. 불만 있냐?”

류시혁의 시점에서 보자면, 필요 없는 관짝이 하나 더 늘어난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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