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82화
그리하여 그들은 폭풍 속에서(2)
어쩌면 류시혁은 틀에 박힌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믿고 있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대하여, 누군가의 행동과 말로 근거를 덧붙이고 싶은 것뿐이다.
그리하여 자신은 무엇 하나 틀리지 않았다고. 그런 식으로 자위하며 저렴한 만족감에 취하고 싶은 인간이 나아갈 수 있는 말로란.
한 마디의 애드립도 허락되지 않을 만큼 융통성 없는 무대 뿐이다.
“오류가 누적될 수록 상위 차원의 존재가 간섭해 오는 시기가 앞당겨지겠지. 그렇기에 세상을 지키는 일이란 언제나 수수하고 착실하게 오류를 수정해 나가는 것뿐이야.”
류시혁은 명확한 목표와 의지를 지닌 사나이였다.
보다 많은 목숨을 살리는 것.
그 단순하고 명쾌한 목적이 류시혁이 스스로의 지친 몸을 움직이는 유일한 이유였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다. 이 숭고한 목적과 의지에 그 어떤 비판의 여지가 있단 말인가?
인명보다 더 무거운 가치는 없으며.
모든 인명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면.
결국 남는 건 규모의 비교뿐이다.
한 사람의 목숨과 수억의 목숨.
이런 단순한 선택의 문제 앞에서 고심하며 저울질을 할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답은 도출되었다. 만인이 동조하고 납득할 만큼 타당한 정답이다. 다만, 이 분명한 정답에 이견이 없을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군.”
류시혁은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며 시카르바 총독이 대기하고 있는 포탑을 향해 걸었다.
쿠르헨 섬에 세워진 지역 방위용 포탑 ‘카세 기간토투스’의 웅장한 모습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류시혁이 시카르바 총독에게 내린 명령은 매우 심플했다.
섬의 주둔대를 비롯하여 모든 주민들을 포탑 안에 집결시킬 것. 그리고 포탑 안에 위치한 탄약고가 유폭될 만큼의 폭약을 설치해 놓을 것.
이런 정신나간 명령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시카르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말이다.
만약 포탑 내부의 탄약고가 유폭이라도 된다면, 그 안에 모여 있던 인간 모두가 형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죽을 것이란 사실은 명백했다.
“수억의 인간이 죽는 것보단 수천의 인간이 죽는 편이 낫다. 수천의 인간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의 인간이 죽는 게 낫지. 하품이 나올 만큼 시시한 산수의 문제로군.”
인간이 집행할 수 있는 최선의 정의다.
류시혁이 이윽고 포탑의 앞에 도착했고, 담배를 입술 사이에 끼워 넣으며 불을 붙이자,
시카르바 총독이 그를 발견하고는 후다닥 뛰어나와 굽신거리며 말했다.
“섬의 주민들과 주둔대를 집결시켜 놨습니다, 용사님. 아직 못 잡은 놈들이 남아 있어서 병사들을 보내놨으니 금방 끝날 겁니다. 그, 그런데 무엇을 하시려고 이러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뇌가 없는 게 아닌 이상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주둔대와 주민들 모두를 포탑 안에 밀어넣고, 탄약고를 유폭시킬 만큼의 폭탄을 설치해 놓았으니까.
하지만 시카르바 총독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해결법은 두 가지다.”
류시혁은 검지와 중지를 펼쳐 보이며 입을 열었다.
검지는 반쯤 잘려나가 있었고, 중지는 불에 녹아 기괴한 형태로 일그러져 있었다.
“관측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삭제할 것인가.”
그리고 류시혁의 시선이 포탑 쪽으로 향했다.
“관측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관측해버린 놈들을 모두 없앨 것인가.”
어느쪽이든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다.
만약 이러한 오류를 수정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류시혁은 알고 있었다.
상위 존재의 간섭이다.
류시혁이 경험했던 메모리얼 전투 중 유일하게 상위 차원이 모습을 드러냈던 전투가 있었다.
삶을 통틀어 한 번이라도 극의에 닿아 자기 증명에 성공한 존재는 ‘위대한 의지’의 편린 중 극히 일부를 이해하게 된다.
보통의 인간은 꿈조차 꿀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시련 속에서 가장 순수한 원형을 도출해낸 존재가 ‘상위 존재’ 즉 외신이라고 불리는 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상위의 존재가 된다면 세계 그 자체에 대한 간섭권을 허락받는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상위 존재가 되었던 인간은 총 여덟 명. 그리고 류시혁이 메모리얼 전투에서 마주했던 상위 존재는, 영겁과 불변의 대리자 ‘크리스델’이었다.
섭리의 세계수 ‘세피로스’에 비하자면 영향력 및 간섭 능력이 미약했던 편이었지만. 아무리 상황과 조건이 좋지 않더라도 ‘상위 차원의 신’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크리스델과 마주하게 된 류시혁이 느꼈던 감정은 단 하나뿐이었다.
압도적일 정도의 절망이다.
절대적인 힘의 차이를 뼈저리게 실감했을 뿐이다.
아무리 완전무결한 용사라고 할지라도 결국 인간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인간은 결코 상위 존재에 대적할 수 없다.
크리스델의 개입조차도 막아내긴 커녕, 방해할 수조차 없었다. 하물며 오류에 먼저 눈치를 채고 개입해 올 상위 존재가 반드시 크리스델일 것이라는 보증도 없지 않나?
만약 크리스델이 아닌 세피로스가 나선다면, 상황은 크리스델 때보다 더 절망적일 것이다.
그렇기에 류시혁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상위 존재에 대항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들의 개입 시기를 최대한 뒤로 늦추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수백, 수천 번이나 반복된 메모리얼 전투는 상위 존재의 개입을 늦추기 위한 수정 작업의 일환이었다.
이번에도 다를 건 없었다.
백주월을 처리하고, 아무런 설정 오류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이번엔 모처럼이니 원작자의 의견을 들어 볼 뿐이지만.’
이 빌어먹을 세상의 원흉에게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었다. 멸망이 확정된 세계에서 그 어떤 발버둥이 유효할지 말이다.
류시혁은 검의 손잡이 부분을 톡톡 두들기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군청빛의 바람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 * *
“잡아! 죽이면 안 된다니까 다리를 쏴버리라고!”
“저 쥐새끼 같은 년이! 가뜩이나 퇴근도 못해서 짜증나는데.”
사샤의 등 뒤로 사내들의 거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사샤는 눈을 감은 채 숨을 헐떡이며 계속해서 내달렸다.
어두워진 골목 사이를 달리면서도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는 내지 않았다.
사샤는 알고 있었다.
이미 이 섬의 주민들 모두가 끌려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주둔대에 맞서며 자신을 감싸줄 어른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지금도 머릿속에선 누자베스와 류시혁이 얼굴이 번갈아 떠오르고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붙잡혀간 동생을 구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을까?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빈민가의 아이를 구하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어도 누구 한 사람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천한 밑바닥의 삶이다. 물론 사샤에게는 동생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였지만 말이다.
피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서로에게 의지하며 함께 살아온 시간만큼,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소중했다.
하지만 도저히 구해달라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도와달라는 한 마디 조차 토해지지 못했다.
타인의 호의에 감사할 수 없는 삶이란 그런 것이다. 세상의 밑바닥에서 가까스로 명줄만 붙들고 있을 뿐인 아이들에게 호의란 그저 죄송한 것에 불과했다.
타앙!
총성이 울렸고, 사샤의 머리카락을 총탄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사샤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런 비루한 삶에 한 번쯤은 그런 기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 하나 욕심낸 적이 없었지만, 사샤는 처음으로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품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기도했다.
풍족한 건 무엇 하나 없었지만, 그런 일상이라도 허락되길 말이다.
퍼억!
골목의 모퉁이를 돌아선 찰나.
먼저 우회하여 기다리고 있던 주둔대의 병사가 사샤의 몸을 거칠게 걷어찼다.
그런 발길질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앙상하게 마른 빈민가의 소녀는 걷어차인 배를 부여잡은 채 쇳소리를 토해냈다.
“사람 귀찮게 만들고 있네. 야, 장전해놨으면 줘봐.”
뒤이어 사샤를 쫓고 있던 병사들도 도착했고, 저마다 짜증을 풀듯 웅크려 있는 사샤의 몸을 군화발로 걷어찼다.
그리고는 장전되어 있는 머스킷의 총구로 사샤의 무릎을 짓눌렀다.
“평생 앉은뱅이로 만들어주마. 그래야 이렇게 귀찮은 일이 없지.”
“아…….”
사샤가 마지막으로 저항하려는 듯 바둥거렸지만, 성인 남자가 허벅지를 짓밟고 있는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타앙!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고, 뜨겁고 비릿한 액체가 얼굴에 흩뿌려졌다. 사샤는 눈을 꾹 감은 채 고통이 어서 끝나길 기다렸다.
총알에 맞고 아주 잠깐의 찰나가 지나면 끔찍한 고통이 엄습해 올 것이다. 사샤는 고통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꽉 물었지만.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총성은 분명 울렸고, 지금도 그 총성 탓에 날카로운 이명이 귓속을 맴돌고 있었지만.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 뭐야?”
병사들 중 누군가가 그런 얼빠진 소리를 토해냈고.
털썩.
사샤의 무릎에 총구를 향했던 병사가 뒤로 벌러덩 나자빠져 팔과 다리를 바르르 떨었다.
“뭐긴 뭐야? 용사는 처음 보냐?”
골목길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백주월이었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발터 P38의 총구에는 아직도 발포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주월은 사샤의 앞에 서서 병사들과 마주했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소리쳤다.
“관음증 있냐, 개자식아! 숨어 있지 말고 나와.”
순간 허공에서 푸른 균열이 일었고.
수십 자루의 검이 굉음을 내며 허공을 꿰뚫었다. 마치 총탄처럼 발사된 검은 백주월과 마주하고 있던 병사 다섯을 순식간에 찢어 발겼다.
발사된 수십 자루의 검은 히팅 블레이드 기술이 적용된 대륙제의 고대 병기다. 인간의 육체 따윈 순식간에 두부처럼 조각낼 수 있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었고.
드르륵.
건물의 2층 창문이 열리며 누자베스가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이야, 이거 우연이네. 여기서 또 만나다니 아무래도 나는 용사님하고 보통 인연이 아닌가 봐.”
“확실히 보통 악연은 아니지.”
물론 누자베스와 백주월이 다시 만나게 된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결국 둘이 생각하는 건 거기서 거기.
대충은 엇비슷하다는 의미였다.
누자베스는 킬킬 웃으며 창문에서 폴짝 뛰어내려 백주월의 앞에 섰다.
“그래서 용사님은 무슨 변덕이 일어서 그런 꾀죄죄한 애를 구해주려고 나선 겁니까?”
누자베스가 이죽거리듯 물었고.
백주월은 어깨를 으슥이며 대답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내 취향이라. 진지한 관계까지 고려해 보려고.”
“미친 새끼…… 신고했다.”
둘은 동시에 이변을 눈치챘고, 동선이 일치한 것이다. 그렇게 사샤의 남동생과 마을 주민 모두가 잡혀갔다는 사실을 듣게 된 후.
누자베스는 팔짱을 낀 채로 잠시 신음했다.
‘내 실체를 알고 있다면, 엔딩까지 이어지는 구조에 대해서도 눈치를 챘겠지.’
류시혁이 누자베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런 답정너 패턴은 별로인데.’
어느 쪽이든 간에.
류시혁이 미쳐 날뛰기 전에 막아야만 했다. 누자베스가 그에게 돌려줄 대답도 이미 정해졌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