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81화
그리하여 그들은 폭풍 속에서(1)
“젠장, 누가 보면 자선사업가인 줄 알겠네. 아직 할 일도 많은데 꼬맹이들 밥이나 사주고 앉아 있으니 말이야. 야, 짜식아 천천히 먹어.”
누자베스가 사샤와 소년을 두 번째로 만나게 된 건 그 다음날이었다. 벽면에 휘갈겨져 있던 경고문의 진의는 미결 상태였지만, 조바심을 낸다고 꼬인 실타래가 풀릴 리는 없었다.
‘백주월이 언제 추격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긴 하지.’
소년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냅킨으로 대충 닦아내주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어젯밤 내가 머물고 있는 방에 침입한 게 백주월일지도 모른다고 가정해 보자.’
지금 파악된 추격자는 백주월이 유일하긴 하다. 하지만 백주월은 어디까지나 누자베스를 ‘전쟁 군주’로서 인식하고 쫓고 있는 것뿐이다.
녀석이 구태여 한국어로 경고문을 휘갈길 이유는 없었다. 상대가 읽지 못하는 문자로 메시지를 남겨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나?
하지만 경고문을 남긴 ‘누군가’는 누자베스가 한국어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도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물. 자연스럽게 용의자의 폭이 좁아졌다.
‘다른 세계선에선 내 거짓말이 어느 정도 관측되었을지 가늠할 수 없으니까. 여러모로 구멍이 생겼겠군.’
이쪽 세계선으로 도약할 수 있으며.
누자베스의 실체에 가장 근접한 인물.
그런 조건을 걸고 용의자를 추려 보자면 단 4명이 남게 된다.
물론.
지금의 누자베스가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대는 ‘누자베스’였다.
만약 메모리얼 전투로 도약해 온 자신이 지금의 자신을 노린다면,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3명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두 가지의 위협이라. 이 섬에서도 날로 먹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구만.’
조금 더 여유를 두고 괴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건 포기해야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직후, 식당의 출입문에 달린 낡은 경첩이 삐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자베스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곁눈질로 새로 입장한 손님 쪽을 살폈다.
그리고 그 손님의 실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뇌리에 존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위생 상태가 개판인 식당이잖아. 더러운 쥐새끼가 한 마리 보이는데.”
“예? 쥐요? 저는 안 보이는…….”
종업원이 당황해하는 사이.
백주월이 7미터 남짓한 거리를 순식간에 도약해 왔다. 검을 뽑거나, 응전할 수 있는 틈은 전혀 없었다.
쿠웅!
누자베스의 몸이 거칠게 벽면에 처박혔고.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백주월의 구두굽이 누자베스의 목을 짓눌렀다.
0.1초도 채 되지 않는 새에 일어난 일이다. 백주월은 벽면에 몰려 있는 누자베스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지 않냐, 개자식아?”
꾸우욱.
목뼈가 부러질 만큼 강한 힘이었다.
당연히 그 물음에 대답하긴 커녕 숨조차 제대로 내뱉을 수 없었다.
“소,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해요!”
“아 그래, 식당에 왔으니까 주문을 해야지. 주방장에게 기름이나 한 냄비 가득 끓이라고 전해. 재료는 내가 직접 조달할 테니까.”
누자베스에겐 빚이 있었다.
그리고 백주월은 빚을 지고도 꾹 참을 만큼 성격이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폭력의 논리가 전부였던 세상에서 살아온 인간에겐 그 나름대로의 해결법이 있었다. 얕보인다는 건 곧 죽음으로 직결되는 문제였고 말이다.
곱게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필요한 확인 작업만 끝나면 면상을 기름에 튀겨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죽어가게 만드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백주월은 누자베스가 덤벼들길 기다렸다. 고작 목을 짓밟힌 정도로 제압당할 만큼 시시한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곧 그 포악한 본성을 드러내며 검을 뽑아들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무력의 상하 관계를 몸뚱이에 새겨줄 차례였다.
“왜 그래? 너무 반가워서 칼도 못 뽑겠냐?”
백주월은 의아하다는 듯 물으며 누자베스의 시선을 쫓았다. 누자베스의 시선은 백주월이 아닌, 그의 뒤편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허점을 유도하고 반격하는 패턴은 흔하디흔한 편이다. 하지만 그런 잔재주에 당해줄 만큼 백주월은 호락호락한 인간이 아니었다.
반격할 수 있으면 반격을 해보라는 듯 누자베스의 시선을 쫓아 뒤를 돌아봤고.
그 순간 사샤와 소년이 백주월과 누자베스의 사이를 가로막듯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누자베스를 구하려고 하는 것처럼 백주월을 필사적으로 밀쳐내려 했다.
솔직히 말해 이런 건 양동 작전이나, 협공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어린애 둘이 악을 내지르며 달려들어 봤자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백주월은 사뭇 불쾌한 눈빛으로 누자베스를 노려봤다.
‘애새끼들을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가만히 당해준 거라고?’
만약 누자베스가 바로 백주월에게 응전하기 위해 검을 뽑았더라면, 이 식당은 물론이고 근처의 일대가 지옥처럼 불타올랐을 것이다.
누자베스는 백주월이 이쪽 세계로 소환되고 처음으로 만나게 된 유일한 호적수다.
백주월은 어쭙잖은 마물이 상대라면 맨손으로 찢어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자베스를 상대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가능한 모든 화력을 집중하지 않는 이상 누자베스는 무력화되지 않는 마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누자베스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일대가 필연적으로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누자베스는 마치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린 것이다.
불쾌한 이야기다.
납득되지 않는 위선이다.
이미 누자베스는 수천, 아니 수만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마물이다. 이제 와서 인간의 목숨 따위를 신경 쓸 리 없었다.
“무슨 변덕인지 묻고 싶은데. 위선자의 가면이라도 뒤집어 쓸 생각이냐.”
백주월이 발을 떼주자, 누자베스가 기침과 함께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주저앉았다.
“그래, 시답잖은 변덕과 위선일 뿐이지. 하지만 결과를 보자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군.”
누자베스는 짓밟혔던 목을 매만지며 백주월을 올려다봤다.
“결착을 짓고 싶다면 장소를 옮기지.”
하지만 누자베스를 감싸며 백주월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아이들을 눈앞에 두고 있자니 절로 흥이 식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전개는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백주월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찬 후.
빠악!
주저앉아 있는 누자베스의 머리를 걷어찼다. 부러진 치아와 터져 나온 혈액이 흩뿌려졌다.
“누자베스 넌 어차피 도망 못 쳐.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내 손바닥 위라고. 곱게 죽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따윈 하지도 마라.”
“하, 하핫…… 그딴 기대는 일찍이 버렸지.”
피차 용서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짐승들 아닌가? 그런 꿈을 품기엔 너무나 멀리 와버린 것이다.
백주월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자기혐오에 가까운 감정이 들끓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건 없었지만.
지금의 백주월도 단언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뿐이다. 이런 혐오스러운 놈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쉬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용사님과 저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기분이 들어요. 가장 깊은 고독에 그 누구의 눈길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순간 비올리네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떠올랐고, 헛구역질이 치솟을 만큼 역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 직후 누자베스를 감싸고 있던 소년이 백주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씨…… 안 꺼져?”
백주월은 소년을 밀쳐냈지만, 소년은 굴하는 기색 없이 다시 백주월을 향해 달려들어 조잡한 주먹을 휘둘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누자베스가 큭큭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못 죽이는구나.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나를 잘 알고 있었냐?”
백주월이 신경질적으로 소년을 넘어뜨려 엉덩이를 가볍게 걷어차며 되묻자.
누자베스는 당연한 사실이라는 듯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닮은 꼴이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자신의 선과 정의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지, 그 애매모호한 경계 속에서 신음할 뿐이었던 시간을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안이 씁쓸해지는 대답이었다.
* * *
“류시혁? 류시혁이라고? 지자스 크라이스트……!”
뇌간이 아찔했다.
벌써부터 손발이 바들바들 떨리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째서 이런 엿 같은 전개만 이어지는지 누구에게든 따지고 싶은 마음뿐이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일이 이렇게 꼬이는지 되묻고 싶단 말이다!
오해할까봐 말해두지만 나 만큼 죄 안 짓고 살아온 사람도 드물다. 그야말로 무해한 모범 시민의 표본이자 아이콘이었던 내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런 망할 일만 일어난단 말인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백주월과 마주 앉은 채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게 고작일 만큼 연약한 하이브 마인드에게 너무 심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용사 놈도 충분히 무섭다. 진지하게 내일 또 만날지도 모르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기저귀를 차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솔직히 지금도 오줌 안 지리고 있는 내가 대견해서 스스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지경이다.
그런데 류시혁?
류시혁까지 이곳에 있다고?
그것도 한없이 완성형에 가까워진 세계선에서 도약해 왔다고?
그래, 차라리 연중 치자.
연중이 아니라 그냥 주인공 사망으로 인한 완결을 기대하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이다.
‘사, 사이다 전개를 쓰라고…… 만만한 놈들만 등장시켜서 내가 한 주먹에 다 피떡만드는 전개를 쓰란 말이다…….’
진짜 용사놈들을 등장시키면 어쩌란 말인가. 물론 용사인 류시혁이나 백주월의 시점에서 보자면 나쁘지 않은 전개일 수도 있다.
나 같이 가련하고 가엾은 하이브 마인드를 줘패는 전개일 테니까. 그런 전개가 확정이니까!
“그래, 피차 서로의 업무는 방해하지 않는 게 상도덕이긴 하다만.”
백주월은 턱을 괸 채로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토해내며 말했다. 내가 겁에 질려 정자세로 앉아 있는 것과 상반되지 않나?
“어쨌든 그 녀석의 본래 목적은 나를 사냥하는 것 같지만. 어째선지 다른 꿍꿍이도 있는 것 같아 보이거든. 짐작 가는 부분이 있냐?”
입을 다문 채 고개를 가로젓자 백주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하여간 너 이쪽 일이 끝날 때까지는 내 눈에 띄지 마라.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 살려준 것뿐이니까.”
끄덕끄덕.
이미 나를 노리고 있는 용사가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주월까지 가세시켜 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뭐든지 일은 순차적으로 정리해 나가는 게 비결이다. 먼저 류시혁의 목적을 파악해서 그 녀석부터 처리해 놓는 게 상책이었다.
백주월이 이쪽을 아니꼽다는 눈빛으로 노려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바쁜 일만 없었으면 당장 쳐죽였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눈빛이다.
‘물론 나를 방치해 두고 류시혁 쪽의 반응을 살펴볼 미끼로 쓸 요량도 있겠지.’
백주월은 나름대로 타산적인 계산이 가능한 놈이다. 사이코패스긴 하지만 순간의 감정보다 장기적인 시야를 우선할 줄 아는 녀석이었다.
그렇게 백주월이 식당에서 나서려던 찰나. 밖에서 놀고 있던 녀석들이 다시 돌아왔다. 아직도 백주월이 있었던 탓에 쭈뼛거리며 겁에 질린 기색이었지만, 내 옆으로 다가와 밖에서 따온 꽃을 늘어놓았다.
“계집애도 아니고 꽃을 어디다 써? 아니, 나는 필요 없다니까. 보답하고 싶으면 돈으로 가져와 짜식들아.”
나름대로 거절 의사를 밝혀 봤지만, 살구꽃 한 송이를 내 머리카락에 꽂더니 신나서는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던 백주월이 마치 비웃는 듯한 미소를 머금었고.
“잘 어울리네.”
그런 심성 뒤틀린 말을 한 마디 남긴 채 돌아가 버렸다. 역시나 인성 파탄난 사이코패스다운 비꼬기 센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