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80화 (180/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180화

애프터 에필로그(3)

작가의 존재 이유에 대하여 떠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존재 이유라고 해야 할지, 작가라면 응당 지녀야 할 직업윤리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기 그지없지만 말이다.

순수한 내 지론을 먼저 밝혀 두자면 작가라는 인종은 대다수의 대중에게 눈총이나 받는 거짓말쟁이로 존재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인성 뒤틀린 거짓말쟁이 타이틀을 낙인처럼 이마에 박고, 뚫린 게 주둥이라고 소리 나는 대로 거짓말을 지껄이는 게 주요 업무의 일환이니까.

타인의 눈치 때문에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라거나, 새삼스레 떠벌릴 필요도 없을 만큼 시답잖은 사실을 꾸역꾸역 끄적여서 세상에 퍼뜨리는 게 일이란 말이다.

타인의 주둥이를 닥치게 하는 게 당연한 시대일수록 작가의 일이 많아지는 법이다.

입을 다문다고 품고 있는 신념이라던가, 욕망과 가치관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테니까.

타의에 의해 입을 다문 이들을 위해 누군가는 상스러운 소리를 떠벌리고 다닐 필요가 있지 않나?

그다지 어려운 얘기는 아니다.

거유 여고생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싶다는 그 욕망을 대변할 뿐이다.

형편없는 지금의 남편과 이혼하고 재벌 집 아들과 재혼하고 싶다는 욕구를 대신 떠들어줄 뿐이다.

뭐, 그런 거다.

도저히 언급할 수 없을 만큼.

사회적으로 말살당할 만큼 천박한 꿈에 관한 얘기를 실컷 떠들고, 이 모든 욕망과 가치관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채 그저 빌어먹을 픽션에 불과하다고.

인성 뒤틀린 거짓말쟁이의 허언에 불과하다며 마침표를 찍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도덕적으로 하자 없는 고결하신 분들이 앞으로도 깨끗하게 살기 위해선, 더러운 욕망의 대변자는 언제나 필요하지 않겠나?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가 최고라는 당연한 사실에 비난을 퍼붓는 세상이고, 어리고 순결한 여자를 선호하는 당연한 본능에 돌팔매질을 하는 세상이다.

세간의 평가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인성 파탄 난 거짓말쟁이가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를 담담하게 중얼거려야만 가까스로 유지되는 도덕의식이 만연한 세상이다.

어쩌면 작가의 일이란 마왕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두가 선험적으로 자신이 정의를 이상적인 형태로써 추구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그 반증이 될 수 있는 잣대를 찾아 헤맨다는 전제하에.

마왕과 작가는 충분히 동일 선상에 놓일 수 있는 직종이었다.

“드디어 내 장례식이 멀지 않았구만.”

바루크와 함께 지하에 숨겨놓았던 괴조를 확인한 후, 며칠 전부터 머물고 있는 여관의 방으로 돌아오자, 석재로 된 벽면이 가득 찰 만큼 거대하게 휘갈긴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최종 증명을 기대하겠다.’

그런 문장이 검붉은 염료로 휘갈겨져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이거 사람 피인가? 같은 흉흉한 추측도 해봤지만, 역시나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식당에서 몰래 훔쳐온 소스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아니,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단 의미다.

남의 방에다가 혈액으로 메시지를 남기는 사이코패스가 이쪽을 노리고 있다고 상상하자면 바지에 오줌을 지릴 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가장 섬뜩한 사실은.

“한국어잖아, 빌어먹을.”

이쪽 세계에서 사용하는 공용어가 아닌, 분명한 한글이었다.

즉, 내 진짜 실체에 한없이 가까워진 누군가가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접근했고. 드디어 접근에 성공했다는 의미다.

‘루칸다를 데려올걸…….’

뒤늦은 후회와 함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루칸다의 등 뒤에 숨어 깐죽댈 수 있었던 때가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 * *

“상대는 차원을 도약해 온 용사입니다. 목적을 달성하는 데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저희와 충돌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모니카는 백주월이 들고 있는 유리잔에 위스키를 채우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백주월은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뚱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기울이던 병을 거두자, 백주월은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이라. 녀석이 참가한 메모리얼 전투의 타깃이 누군지 말하지 않았나?”

“거기까진 듣지 못했습니다.”

모니카는 솔직하게 대답했고.

백주월이 클클 웃으며 말했다.

“녀석의 이번 타깃은 나다. 이쪽을 죽여야만 메모리얼 전투가 종료되겠지.”

백주월은 꽤나 담담하게 말했지만, 모니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어붙었다.

빈 잔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백주월의 이번 임무는 누자베스를 처리하고, 탈취당한 타르틸리엇을 탈환하는 것이다.

모니카는 그 임무를 우선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세계선에서 도약해 온 용사가 백주월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까지 추가된 지금.

우선순위는 자연스럽게 백주월의 생존으로 좁혀졌다. 상황에 따라서는 임무를 포기하고 지체없이 이곳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만에 하나 백주월이 류시혁의 손에 의해 죽기라도 한다면, 공화정파는 힘을 잃고 크게 휘청일 것이다.

안절부절못하는 모니카와 달리, 백주월은 꽤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슬레뷔네가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지. 그리고 류시혁 그 녀석이 나를 못 알아본 것도 아니고.’

슬레뷔네는 중재자로서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만 하는 의무가 걸려 있었다. 공정한 게임을 위한 최소한의 룰이었다.

그리고 류시혁은 백주월을 단번에 알아봤고,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시혁은 눈앞에 나타난 사냥감을 순순히 놔준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 세계선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라…… 블러프로 쓸 거짓말치고는 조잡한 감이 없지 않아 있어.’

만약 우선순위의 문제였다면, 백주월을 제압하여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게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류시혁은 백주월이 도망친다는 가능성조차 고려하지 않는 사람처럼 순순히 물러난 것이다.

확실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백주월의 직감이 불길한 가능성을 속삭이고 있었다.

‘조건을 되짚어 보자.’

백주월은 자신과 류시혁을 동위에 놓고 수많은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가능성이 소거되었고, 소거된 가능성만큼이나 많은 가능성이 남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그럴싸한 이야기로 들리는 것이 하나.

“녀석이 가능한 건 나 역시 가능하고, 녀석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역시 내게 일어날 수 있다.”

“스텔라 님의 축복을 받아 소환되었다는 과정은 완전히 동일합니다.”

“그래서 내 목을 노리는 건 어느 쪽의 류시혁이지?”

모니카는 그제야 맹점에 눈치를 챈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 이 세계에는 두 사람의 류시혁이 존재한다. 본래 이쪽 세계선에서 소환된 용사 류시혁은 먼 서쪽 마족의 영지를 모험 중일 것이다.

그리고 현재 쿠르헨 섬에 존재하는 류시혁은 다른 세계선에서 메모리얼 전투를 통해 도약해 온 존재.

이런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면.

백주월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다른 세계선의 내가 이쪽으로 넘어온 모양이군.”

류시혁과 마찬가지로.

다른 세계선의 백주월이 메모리얼 전투로 이쪽 세계선으로 넘어왔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현재 메모리얼 전투를 수행 중인 류시혁의 타깃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메모리얼 전투를 수행 중인 백주월이라면?

본래 이쪽 세계선의 백주월에게 흥미를 지니지 않았던 것도 납득이 된다.

“뭐,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얘기지. 가장 그럴싸하게 느껴지는 추측일 뿐이야.”

백주월은 유리잔을 부드럽게 흔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녀석이 본연의 임무 외에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듯이, 나도 늙은이들에게 받은 임무 외에 확인해야 할 게 있거든.”

여러모로 상황이 흥미롭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백주월은 류시혁과의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었다.

류시혁 역시 그 정도는 고려하고 있을 것이다. 백주월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목적을 우선하며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자, 그럼 어디부터 찔러 볼까?”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았고, 그 무엇도 분명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누자베스에겐 빚이 있었다.

그리고 빚은 두 배로 갚는 것이 백주월의 철칙이었다.

* * *

시카르바 총독의 얼굴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용사를 사칭하고, 주둔대에게 덤벼든 떠돌이 모험가 놈을 붙잡아 처형한 후 광장에 시체를 걸어두고 본보기를 보일 작정이었을 뿐인데.

무엇이 잘못되어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건가?

결과적으로 지면에 바짝 엎드려 코가 뭉개질 만큼 고개를 조아리게 된 것이다. 시카르바의 앞에는 류시혁이 앉아 느긋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시카르바 총독. 동업자를 물색할 땐 신뢰할 수 있는 상대인지 먼저 확인해 두는 게 현명하겠군. 하필이면 그 흉악한 놈과 손을 잡으려 한 건가?”

“다, 당치도 않습니다! 제, 제가 어찌 감히…… 더러운 마족 놈과 손을 잡으려 했겠습니까? 태양의 어머니 스텔라 님께 부끄러운 짓은 무엇 하나 하지 않았습니다! 오, 오해입니다 용사님! 누자베스 그 녀석의 비열한 협박에…… 이 섬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허물을 뒤집어쓴 것뿐입니다!”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류시혁은 진짜 용사였고, 시카르바 자신이 마족과 손을 잡으려 했다는 사실을 들킨 것이다.

그것도 현재 중부에 진출한 신예 전쟁 군주인 누자베스와 말이다!

이건 지금 당장 현장에서 즉결 처형을 당해도 변명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류시혁은 묘하게 누자베스를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로 말하고 있었지만, 시카르바에겐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총독은 이런 사고 실험을 알고 있나?”

멍청하게도 선로에 누워 있는 여섯 남자의 이야기다. 어째서 선로에 팔자 좋게 누워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위쪽 선로에는 한 사람의 남자가 누워 있고. 아래쪽 선로에는 다섯 사람의 남자가 누워 있는 것이다.

기차는 아래쪽 선로를 지날 예정이지만, 기차의 진행 선로를 바꿀 수 있는 스위치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다면?

기차의 진행 선로를 위쪽으로 바꿔 다섯 사람의 목숨을 살릴 것인가? 그 대가로 위쪽 선로에 누워 있던 한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게 되겠지만 말이다.

시카르바는 잠시 고민하다 류시혁에게 되물었다.

“그 여섯 명은 모두 같은 신분입니까?”

“재밌는 견해로군, 총독.”

류시혁은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카르바는 당연한 걸 뭐하러 묻냐는 투로 대답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죽는다 하더라도 다섯을 살리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그게 마땅히 행해져야 할 정의로운 판단 아니겠나?”

류시혁은 자리에서 일어난 후 지면에 바짝 엎드려 있는 시카르바를 일으켜 세웠다.

“총독과 나는 이해가 일치하는군.”

“여, 영광입니다! 용사님!”

“그렇다면 수천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이 섬의 백성 전부를 희생시킬 수도 있겠지?”

류시혁은 이미 용사라고 불릴 수도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정의의 용사라고 불리기엔 너무 늙었고, 지쳤고, 경직되어 있었다.

구태여 그를 분류하자면 공리주의의 망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류시혁은 시카르바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고, 시카르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빙긋 웃으며 어깨를 다독였다.

“그럼 내 지시대로 준비가 되면 연락하게.”

그렇게 시카르바를 두고 방을 나서자, 오늘 술집에서 류시혁이 구해줬던 소녀와 소년이 서로에게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분명 ‘사샤’라고 했다.

소년의 이름은 아직 듣지 못했다.

하지만 류시혁은 소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뤄질 수 없는 꿈이 계속되고 있었군. 한처럼 서린 행복의 욕망이 이런 형태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겠지.”

픽션이라는 이름의 허구로 가까스로 존재하던 꿈이다. 한 사람의 거짓말쟁이만이 허락한 안식처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소환된 용사가 나타나며, 이 세상은 오류를 눈치챈 것이다.

명백한 설정 오류였고, 오류는 퇴고 작업을 통해 수정되어야만 했다. 이번 퇴고 작업의 담당자는 류시혁이었다.

‘결정권은 원작자에게 있겠지.’

어느 쪽의 오류를 삭제할지.

그 대답이 사뭇 기대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