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79화 (179/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79화

    애프터 에필로그(2)

    류시혁은 검붉은 선혈로 얼룩진 복도를 걸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피웅덩이 위로 찰팍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그를 제압하기 위해 소대 단위의 병사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류시혁은 한없이 완성형에 가까워진 용사다.

    구시대의 화기로 무장한 병사 수십여 명이 어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2초.

    단 2초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80여 명의 삶과 목숨이 한낱 고깃덩어리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류시혁은 장례식의 조문객이 향을 피우듯, 담배에 불을 붙여 시체 더미 위로 내던졌다.

    대수로운 감상도 없었고.

    얄팍하기 그지없는 죄책감도 없다.

    류시혁은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

    태양의 여신 스텔라가 부여한 용사의 권능이 성장할수록, 용사로서의 여정이 거듭될수록.

    인간으로부터 동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그가 품을 수 있는 한없이 인간다운 감상은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고, 인간성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면.

    아니, 분명히.

    지금에 이르러 확신하자면.

    공리주의의 집행자에 대한 이상적 형태를 상상하여 그려낸 결과물이 현재의 류시혁이었다.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형태일 것이다.

    “슬레뷔네의 계약에 의한 차원 도약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남은 건 세피로스의 위상 차원 간섭뿐이지. 크리스델의 지분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야.”

    어둠의 맞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식치도 않게 심장이 서늘해지는 미성이다. 하지만 류시혁은 시큰둥한 얼굴을 들어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응시했다.

    류시혁의 시선이 향한 곳에 백주월이 서있었다.

    “백주월.”

    류시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백주월은 조금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슥인 후 입을 열었다.

    “그쪽 세계선에서는 우리가 구면이었나?”

    그 질문에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류시혁은 분명히 백주월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류시혁은 오른쪽 팔을 들어 소매를 걷었다. 그리고 그의 손목에는 노끈으로 만들어진 팔찌 같은 게 걸려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팔찌가 아니다.

    백주월의 피어스로 만든 목걸이를 대충 손목에 감아 둔 것이었으니까.

    “내가 죽였다.”

    류시혁이 토해내는 갈라진 목소리에서 자만의 감정도, 위협하려는 기색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객관적인 정보를 담담히 토해내는 느낌에 불과했다.

    “네 패인은 명확했다.”

    지금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그날의 기억이 또렷했다.

    류시혁이 여정을 거듭하며 용사로써의 능력이 완성되었듯, 백주월 역시 마찬가지였다.

    류시혁과 백주월. 둘은 서로를 뛰어 넘거나, 뒤처지거나 하며 경쟁을 거듭한 관계다.

    그리고 백주월이 류시혁의 검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순간은 어땠을까?

    거짓 없이 고백하자면.

    백주월이 류시혁을 앞서 있었다.

    최후의 완성 형태라면 둘의 전력은 비등한 수준.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백주월이 류시혁을 압도할 만큼 강해진 상태였다.

    크리스델의 간섭 흔적인 ‘미아 나크랏’의 파편을 모두 모아 채널링 확장을 끝마친 백주월은 행성 전체를 상대로 싸울 수 있을 만큼 강력했지만.

    가장 큰 위협은 가장 큰 견제를 받기 마련이다.

    백주월 토벌을 위해 누자베스와 류시혁은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3인의 윤왕 중 두 사람이 더 가세했고, 제1신분이라 불리는 고혈종의 흡혈귀 다섯이 협력했다.

    물론 단순한 무력과 무력의 충돌이었다면, 백주월이 모두를 찍어 누를 만큼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누자베스는 백주월을 붕괴시킬 유일한 열쇠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류시혁이 손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였다.

    지금도 선명히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목걸이를 품은 채 웅크려 오열하던 백주월의 등에 검을 꽂은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맺혀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던 그 뒷모습이 동공 깊숙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만큼 시시한 결말이었지.’

    백주월의 최후를 떠올리며 류시혁은 손목에 감아 놨던 목걸이를 풀어 내던졌다.

    “충고 하나 해주지. 잃고 싶지 않은 게 있다면, 손에서 놓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그런 덕담이나 해주려고 마지막 도약 기회를 쓴 건 아닐 텐데.”

    백주월은 피웅덩이에 떨어진 목걸이를 주워들며 말했다.

    “도약이 가능할 만큼 가까운 세계선에서는 살아 있었다는 말이네…….”

    머릿속에서 맴돌던 가설 중 하나가 점점 분명한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백주월의 피어스를 노끈으로 엮은 이 목걸이는 비올리네가 만든 것이었다.

    “어쨌든 피차 이 섬까지 온 목적은 같을 텐데. 시시한 서론은 집어 치우지.”

    류시혁의 이번 메모리얼 전투의 타깃은 ‘백주월’이었다.

    그리고 백주월 역시 슬레뷔네와의 계약을 통해 인과 간섭을 할 수 있는 존재를 멀쩡히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이미 이 세상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퍼즐이다. 감시의 눈을 피해 퍼즐을 뒤섞으려는 것들은 가능할 때 해치워 두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류시혁은 백주월을 눈앞에 두고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분명 ‘저것’ 역시 ‘백주월’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말장난은 한두 번이 아니었지.’

    류시혁은 쓴웃음을 되삼키며 양손을 들어 저항할 생각이 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것이 마지막 도약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 않나? 나는 그저 이 세계선에서 확인하고 싶은 게 하나 있을 뿐이다. 중요도가 낮은 싸움을 우선하여 일을 그르치고 싶지는 않다만.”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백주월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듯 당장 달려들 기색이었지만.

    류시혁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던 것인지 다음 패를 뒤집어 보였다.

    “이쪽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비올리네의 행방을 알려줄 수 있다. 나쁘지 않은 거래 아닌가?”

    백주월은 미간을 찌푸리며 류시혁을 노려봤다. 그 순간에도 목걸이를 쥔 손을 놓치지 않았다.

    “충분히 현명하다면 다른 결말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백주월 네놈도, 비올리네도 죽지 않는 세상을 완성시킬 수 있다.”

    그 속삭임은 꽤나 달콤하게 들렸다.

    * * *

    “바루크 너 인마,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쉿! 조용히! 조용히 해!”

    “아니…… 네 목소리가 더 크잖아! 아주 이 시궁창 밑에서 기어 다닌다고 광고를 해라 광고를!”

    “쉬잇!”

    “자꾸 쉬쉬하지 말라고! 쉬 마려워지니까.”

    바루크를 협박, 아니…… 아니지.

    협박이 아니라 정중하게 협력을 요청한 덕분에 드디어 괴조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이 녀석이 지하에 몰래 숨겨둔 병기가 진짜 괴조인지 어떤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최소한 고대 병기에 속하는 물건임에는 틀림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게 운용이 가능한 상황이었으면 일찍이 이 테러리스트 놈이 총독부를 폭격했겠지만.

    ‘격추되어서 반파 상태였다고 했지.’

    격추된 시기는 괴조에 관한 보고가 끊긴 기점과 거의 일치한다.

    이건 솔직히 기대할만한 상황이다.

    그렇게 바루크를 따라 한참 동안 지하 수도를 기어서 이동한 끝에 거대한 지하 공간에 도달했다.

    바루크는 몸에 묻은 흙탕물을 대충 털어낸 후 이쪽을 바라봤다.

    “말해두지만 아직 수리가 끝나지 않았어. 부품 조달도 힘들고, 워낙 오래된 병기라 그 구조가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으니까.”

    “알았으니까 후딱 보여줘 봐라.”

    바루크에겐 내 정체를 밝혀둔 상태다.

    그리고 내게 협력한다면 쿠르헨 섬의 독립을 돕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물론 내 말을 믿을지, 안 믿을지.

    그런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니 협력하지 않겠다고 튕기는 순간 죽빵 꽂아버리고, 역병을 활성화시킬 것이란 사실이 명확했으니까.

    바루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내 말을 믿고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단 말이다.

    바루크가 거대한 천막을 치우자 그 아래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괴조’가 나타났다.

    “음…… 뭐냐 이 누더기 고철은?”

    “시끄러워! 이 정도로 수리한 게 기적이니까.”

    “설마 이 고철 덩어리를 만드느라 10년도 넘게 이 짓거리를 한 거야?”

    솔직히 이건 예상 이상이었다.

    격추되어 반파 상태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차라리 시카르바 총독이 지니고 있는 비천익이 훨씬 성능이 괜찮을 거 같은데?’

    양쪽 날개는 싸구려 금속으로 대충 달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내부의 프레임이나 역학 구조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그저 비천익의 형태를 흉내낸 레플리카 장난감 수준이었다.

    “저기, 이런 질문해서 미안한데 비행은 가능하냐?”

    “말했잖아. 아직 수리가 끝나지 않아서…….”

    “할렐루야다 진짜…… 지자스 크라이스트…… 테네브레 맙소사! 이 미친 정신병자 새끼야!! 이, 이게 괴조일 리가 없잖아!”

    “그 괴조란 게 뭔지는 모르지만 이 전투기가 내란 때 사용된 건 확실하다니까!”

    동체는 그럭저럭 그럴싸한 형태였지만, 양쪽 날개 부분이 치명적이었다.

    “날개는 왜 이 지랄을 해놨는데?”

    “그게…… 격추된 후에 발견됐을 때는 이미 양쪽 날개가 완전히 사라져서 새로 날개를 달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면 원형이 어땠는지는 알고 이렇게 만든 거지?”

    바루크는 한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자신 있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새끼가 뭘 자신 있게 고개를 도리도리질 하는 거야! 내가 문과지만 H2O가 산소라는 것과 비행기 날개를 이따구로 만들면 안 된다는 건 알겠다!”

    그렇게 쏘아 붙이자 바루크는 나름 자존심에 스크레치라도 났는지 발끈했다.

    “사내자식이 쫑알쫑알 쫑알쫑알! 시끄럽다고! 이런 건 대충 붙이면 되는 거다!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고 투덜대는 건 계집들뿐이다!”

    “누, 누가 계집이냐! 이 자식 이거 큰일 날 소리 하네!?”

    혹여나 백주월의 귀에 들리기라도 했다간 큰일이다! 그놈은 확인해 보자고 성별반전의 비약을 엉덩이에 쑤셔 넣을 사이코패스란 말이다.

    어차피 점막으로 흡수하면 똑같으니까 위쪽이든 아래쪽이든 상관없다는 논리로 말이다!

    손발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난다.

    가슴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던 PTSD가 다시 발병할 것 같았다.

    “이런 건 기합이야, 기합! 근성! 투혼만 있다면 날 수 있다!”

    “라이트 형제가 듣는다면 게거품 물고 발작할 만큼 개 같은 논리구만…….”

    바루크는 내 아연실색한 얼굴이 보이지 않는지 괴조의 동체를 쓰다듬으며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어째서 사내만이 하늘을 날 수 있는지 알고 있냐?”

    “여자들은 이런 고철덩어리를 타고 하늘을 날겠다고 생각할 만큼 멍청하지 않으니까 그렇겠지.”

    내 지론에 의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병신 짓은 남자놈들이 다 하는 법이다.

    그거 참 병신 같군…… 당장 하자! 라는 식의 흐름이란 말이다.

    “아니다! 바로 이 투혼 주머니가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루크는 갑자기 자신의 바짓가랑이의 사이를 꽉 쥐며 소리쳤다.

    “투혼! 근성! 이것만이 사내가 허락받은 날개의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투혼 주머니라고 하니까 그럴싸한데 그냥 부랄이잖아, 미친놈아…….”

    아무래도 괴조에 관한 소문은 헛소문이었다고 판단해야 될 때 같았다.

    투혼 주머니가 달려 있다고 저런 고철 덩어리가 갑자기 날아오를 리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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