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78화 (178/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78화

    애프터 에필로그(1)

    용사여.

    정의를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예수를 심판했던 빌라도 역시 손을 씻으며 옳은 일을 행한다고 믿었겠지.

    마녀를 불태우던 군중도 스스로 정의를 집행할 뿐이라고 자부했을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여 구민의 의지를 울부짖던 혁명가들 조차 자신들이 악마를 낳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게야.

    사라예보에서 방아쇠를 당겼던 청년 조차 나름대로의 정의를 품고 있었지.

    하물며 아우슈비츠에서 가스 밸브를 돌리던 그들도 가슴 한 켠에 분명한 정의를 믿고 있었어.

    이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이야.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입에서 토해지는 정의란 언제나 편협한 아집덩어리에 불과하잖나.

    적어도 인간 만큼은 정의를 입에 담아선 안 돼. 인간과 정의란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개념일테니까.

    너희들이 무엇을 위해 정의를 울부짖는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진짜 정의에선 눈을 돌리고.

    정의처럼 포장된 직관적이고 가시적인 인과응보에 열광하는 가련한 짐승이 인간이다.

    중독된 듯 증오의 감정을 소비하며.

    알량한 도덕적 우월감에 취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나약한 짐승 역시 인간이다.

    자, 이번엔 활시위를 어디로 향할 것인냐?

    자신의 삶을 짊어지긴 커녕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어서, 증오의 감정을 토해낼 변기통이 없으면 하루라도 살아갈 수 없는 대중이 하루 아침에 바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생각이 너무나 안일했군, 용사여. 몰락에는 비난의 대상이 필요한 법이니까.

    마왕이 없는 세상에선 서로가 서로의 마왕이자, 모두가 모두의 마왕이다.

    중년과 청년이 서로의 마왕이듯.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마왕이다.

    보수와 진보의 눈에는 서로가 마왕으로 보이듯.

    독실한 종교인과 무신론자의 눈에는 서로가 마왕으로 보일 뿐이다.

    마왕은 늘 필요하지 않았나?

    눈에 보이는 적이 필요했고, 스스로가 정의의 편에 서서 올바른 일을 행하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았나?

    쪽바리라는 이름의 마왕도 가버렸고, 빨갱이라는 이름을 지녔던 마왕도 지나간 농담이 되었다.

    그렇다면 다음 마왕은 뭐라 부를까?

    그래, 다음 마왕은 된장녀라 부르며 조금 통쾌한 기분을 맛보는 것도 나쁘지 않군. 저열한 인간 놈들의 수준에 어울리는 위안감이 아닌가?

    그게 질린다면 한남충이라고 부르지.

    불행의 이유를 남에게 전가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놈들에게 딱 맞는 마왕이로군. 인간이란 그저 정당방위를 주장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흉악범일 뿐이니까.

    용사여, 공리주의자의 가면을 벗고 조금 더 솔직해지는 게 어떤가?

    어느쪽이든 간에 우리는 차라투스트라가 될 수 없었던 처지였으니.

    * * *

    류시혁은 가끔씩 꿈을 꿨다.

    마왕과 마지막 사투를 벌였던 과거의 기억은 몇 번이고 플래시백되듯 뇌리에서 떠올라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턱선을 따라 흐르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아직도 그날의 광경이 선명했다.

    류시혁은 선택받은 이계의 용사로써 마왕을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했던 건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류시혁 역시 죽음을 각오했고, 마침내 마왕의 숨통을 끊는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는 값싸지 않았다.

    살아 남은 자는 류시혁 한 사람뿐.

    그 마저도 눈과 팔의 반쪽을 잃었고, 오른쪽 다리는 치유될 수 없는 영구적 장애가 남았다.

    하지만 마왕 토벌은 그 정도 희생을 감수할 만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여덟 명이나 되던 동료가 모두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비명을 내지르다 죽었고, 류시혁 자신도 신체의 절반을 잃었지만 말이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옳은 일이었다.

    감수할 만한 희생이었다.

    적어도 그와 그의 동료들이 꿈꾸던 세상이 도래할 수 있다면, 수지에 맞는 거래였다.

    “누자베스…… 나는 여전히 네 저주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군.”

    류시혁은 마왕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토록 증오스러웠던 이름이다. 하지만 어째선지 긴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딘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마왕이 토벌된 이후 세상은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했을까?

    류시혁은 답을 알고 있었다.

    마왕을 토벌했지만 세상은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다.

    전쟁과 증오는 여전히 남았고, 총구와 칼날을 겨눌 상대가 교체되었을 뿐이다.

    가장 거대한 위협이었던 마왕이 사라지자, 수도에서 먼 곳에 위치해 있던 호족들과 영주들부터 독립국을 자처하며 일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왕이 그 전쟁의 억제력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질 나쁜 농담처럼 말이다.

    마왕이 살아 있었다면 죽지 않아도 됐을 목숨들이 수없이 사라졌다.

    ‘몰락에는 비난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했지.’

    어쩌면.

    누자베스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인간의 본성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왕의 행동 원리에 ‘진정한 의미의 평화’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면, 그가 아일라드의 뒤를 이어 마왕을 자처한 것 역시 납득이 되었다.

    류시혁은 추위에 떠는 짐승처럼 몸을 웅크렸다. 자신이 행동이 초래한 비극이 지금도 의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홀로 지내왔던 밤의 수만큼, 모든 것이 흐릿해져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이라곤 메모리얼 전투로 차원을 도약하며 누자베스의 흔적을 쫓는 것뿐이었다.

    그저 묻고 싶었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취했을지.

    그런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자신감으로 가득 찬 궤변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마음 뿐이다.

    이제와서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마왕이라니. 용사 이야기의 에필로그로 쓰기엔 꽤나 형태가 우스꽝스러웠다.

    류시혁은 창틀에 걸터 앉았고, 남아 있는 한쪽 손으로 담배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었다.

    콰앙!

    불을 붙이기가 무섭게 방의 출입문이 거칠게 열리며 무장한 병사들이 들이 닥쳤다.

    벽 너머로 들리는 발소리로 유추해 보자면 복도에 몰려 있는 병사의 수는 20명이 족히 넘었다.

    병사들이 재빠르게 머스킷을 들어 류시혁을 향해 겨눴지만. 류시혁은 조금도 동요하거나 겁먹은 기색 없이 여유롭게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주둔대의 병사에게 상처를 입히고, 용사님을 사칭한 죄. 그냥 넘어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겠지?”

    보복에 나서기까지 시간이 걸린 이유였다. 용사가 출몰했다는 소식에 지레 겁을 먹긴 했지만, 주둔여단의 여단장 시카르바는 바로 상부에 연락하여 진상을 확인했다.

    그 결과 왕정파의 용사 류시혁은 여전히 마왕 아일라드 토벌을 위해 론트라 섬의 최서단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공화정파의 용사 백주월은 내일쯤 쿠르헨 섬에 도착할 것이라고 연락이 미리 온 상태였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오늘 술집에서 난동을 부린 검객은 용사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게다가 묘하게 쿠르헨 족과 닮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 의심을 사기엔 더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저항하면 이 자리에서 사살하겠다. 녀석을 포박해!”

    무리의 지휘자로 보이는 부사관이 명령하자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류시혁이 창틀 밑에 세워놨던 장검에 손끝을 댔고.

    키잉!

    눈을 깜짝할 새도 없이 마룻바닥에 긴 선이 그어졌다. 검을 뽑아 휘두르고, 다시 납도한다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생략된 참격이었다.

    류시혁이 스텔라에게 받은 고유 권능은 ‘모든 무기와 병기의 숙련도가 향상되는 능력’이다.

    그리고 마왕 토벌까지 끝마친 류시혁은 이미 반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 존재가 되었다.

    검을 다루는 능력은 이미 인간의 인지 범주를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병사들은 잘려나간 마룻바닥을 슬쩍 내려다보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긴 선이 류시혁과 병사들의 사이를 가로 막았고,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류시혁이 입을 열었다.

    “필요 없는 살생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그 선을 넘어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낮고 묵직하지만, 거칠고 쉰 목소리에 절로 오금이 저렸다. 호랑이와 마주친 초식 동물들처럼 본능적인 공포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솟았다.

    진짜 용사가 아니라는 군부의 연락을 받았다. 그러니까 이 여관에 머물고 있는 저 검객은 용사가 아니다.

    그런 확신이 있었지만, 그가 보여주고 있는 실력까지 가짜처럼 보이진 않았다.

    “뭐, 뭣들 하는 거야! 녀석을 포박하라는 명령 못 들었나!”

    부사관이 악을 내지르듯 윽박지르자, 공포에 이성이 마비된 병사들이 류시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공포에 질린 인간은 이렇듯 비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마는 것이다.

    류시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마왕 누자베스에 대한 정보를 느긋하게 찾기 위해서는 이 섬의 상하관계를 제대로 정립시켜 둘 필요가 있었다.

    승자가 곧 정의다.

    가장 원시적인 폭력의 논리만이 류시혁에게 남은 유일한 가치였다.

    “정당방위를 주장하고 싶어 안달이 난 흉악범이라. 나는 그 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

    류시혁의 입꼬리가 초승달처럼 치켜 올라갔고. 선혈과 비명이 휘몰아친 건 그 직후였다.

    * * *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군요, 용사님.”

    “그래. 첫 임무부터 지각해서 불성실한 놈이라고 낙인 찍히는 것보단 낫지.”

    백주월은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후 굳어 있던 몸을 풀어주듯 가볍게 기지개를 폈다.

    드디어 며칠 간의 이동이 끝나고 쿠르헨 섬에 도착한 것이다.

    이미 시간이 늦어 꽤나 주변이 어두워져 있었지만, 그런 것에도 개의치 않고 백주월은 제자리에 서서 마을의 풍경을 훑어봤다.

    ‘류시혁이라고 했나? 녀석의 이번 메모리얼 전투 타깃은 나라고 했지. 그런 녀석이 쿠르헨 섬으로 이동했다는 건, 필연적으로 나 역시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그리고 백주월은 탈취당한 타르틸리엇을 되찾고, 이번 사건의 주모자인 누자베스를 처단하는 임무를 받았다.

    그러니까 각자 목적은 다르지만 이 섬에 모이게 된다는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역시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바람에 환영 인파는 없는 건가? 원래 이런 행사는 영주 같은 놈이 입구까지 마중을 나와서 꽃다발도 건내주고 그러는 거잖아.”

    “표면적으로는 용사의 임무 및 동선은 기밀 사항입니다. 그런 대외적인 행사를 기획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게다가…….”

    모니카는 잠시 말을 고른 후 이내 몇 가지의 가능성을 도출해 냈다.

    “피비린내가 풍겨 오는군요.”

    “나도 코 달려 있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꽤나 흉흉한 일이 현재진행형이란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물론 존재가 흉흉함 그 자체인 백주월이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심각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백주월은 느긋하게 말아 놓았던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고, 모니카가 바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어쩐지 이 마을은 분위기가 낯익어서 불쾌하네. 통째로 날려 버리면 안 되나?”

    그런 농담을 킬킬 웃으며 내뱉는 사이.

    허름한 차림새의 소녀와 넝마 조각을 걸친 소년이 골목을 조심스럽게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혹여나 떨어질 새라 서로의 손을 꼬옥 붙잡고 있었다.

    백주월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아이들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