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77화 (177/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77화

    그리하여 폭풍 속에서(6)

    “불꽃과 부활의 여신이라.”

    누자베스는 이른 아침부터 쿠르헨 총독부 지하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괴조의 단서를 찾기 위해 시카르바 총독에게 자료실 열람을 요청했던 것이다.

    총독부의 지하에는 각종 문헌과 서적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누자베스가 가장 먼저 훑어보기 시작한 건 과거의 작전 보고서 및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쿠르헨족의 전통 기록이었다.

    이곳에서 몇 시간 동안 쿠르헨족에 관한 자료들을 읽던 중 그들이 지니고 있던 토속 신앙에 관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영원히 반복되는 윤회와 그 무엇보다 뜨겁게 불타오를 수 있는 영광.

    그런 구절을 읽은 후 누자베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죽어도 되살아나고, 되살아날 때마다 불태워져 죽는 것뿐이라면. 스텔라교에서 말하는 지옥과 크게 다르지 않겠어.”

    지옥이 현세에 강림한다면 아마도 그런 형태일 것이다.

    수만, 아니, 수십만, 수백만 번도 넘게 되살아나 같은 수순을 밟으며 불태워져 죽는 것뿐이라면.

    그런 삶이 잿더미 외에 남길 수 있는 게 있을까?

    그 무엇도 증명하지 못한 채, 그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잿더미가 될 뿐이다.

    이것은 마치 신의 은총이라기 보다는 저주에 가깝게 느껴졌다.

    적어도 누자베스의 관점에선 말이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다고 하는데. 인간의 삶과 가장 동떨어진 이상을 강요하는군.’

    평범한 인간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공통항.

    누자베스가 추구하는 삶과 이솔레트의 계시에 걸맞은 구원자의 삶은 완전한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적어도 누자베스는 이 세상을 향해 자신을 긍정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저.

    지독할 만큼 집요하게 세상을 부정할 뿐이다.

    그 편협한 발버둥만이 누자베스에게 허락된 유일무이한 증명법이었고, 수많은 다름을 한없이 틀렸다고 단정 지은 후, 오답 그 자체인 세상을 향해 냉소를 머금는 것만이 누자베스가 이 세상에 찍을 수 있는 유일한 마침표였다.

    * * *

    “신고 정신이 아주 투철하던데. 신고 정신이 투철하면 이승복이처럼 아가리가 찢어져요.”

    인적이 드문 골목길이었다.

    낮 시간 동안은 주둔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구태여 이런 장소만을 경유해 이동하고 있었지만.

    마치 그런 바루크의 행동 패턴을 읽고 있었다는 듯 골목길의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잿빛의 머리카락과 황금을 깎아 만든 듯한 눈동자.

    그리고 사람의 정신을 갉아 먹을 만큼 고혹적인 외모.

    잊었을 리 없었다.

    바로 며칠 전 창관에 모습을 드러냈던 낯선 이방인이었다.

    바루크는 평소의 이미지나 세간의 평가와 달리 매우 신중하고 겁이 많은 사내였다.

    그렇기에 정체가 불분명한 누자베스를 불확정 요소로 단정 짓고, 그의 정체를 간파하기 위해 주둔대를 이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만났다는 건 누자베스가 신분이 확실히 보장되는 귀족이거나, 주둔대에 우호적인 세력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루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신고라니?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엄한 사람 잡는 거 아냐?”

    “나도 참 사람이 좋아졌어. 예전 성격 같았으면 이미 고기 반죽으로 만들어놨을 텐데.”

    물론 누자베스가 하루 아침에 개과천선하여 아량과 인정 넘치는 전쟁 군주가 된 건 아니다.

    누자베스의 하이브 마인드이자 헬베르카의 적통 후계다.

    합리성에 기반한 탐욕이 행동 동기의 대부분이란 말이다.

    때때로 하이브 마인드로써의 합리성과, 헬베르카로써의 탐욕과 동떨어진 이상 행동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상황이다.

    누자베스가 바루크를 사지 멀쩡히 살려두고 있는 이유는 단순명료했다.

    “아, 미리 알려줄게. 내가 이 섬에 도착한 날에 창부 하나를 감염시켜 놨거든. 이제 사흘 정도 지났으니까 환락가에 꽤 병이 퍼졌을 거야. 꿀벌이 수분을 옮기듯, 환락가의 손님들도 많은 걸 옮기는 법이잖냐.”

    누자베스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바루크를 향해 휙 던졌다.

    바루크가 멍하니 서 있자, 누자베스가 던진 무언가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누자베스가 던진 건 들쥐 한 마리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들쥐 시체다.

    그것도 불에 태운 듯 새까맣게 변색되어 있었고, 경화가 진행된 듯 표면이 굳어 있었다.

    바루크는 소매로 입과 코를 가리며 누자베스를 노려봤다.

    이 들쥐 시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검은 키프로스…….”

    “잘 아네. 꽤나 예전에 유행했던 병이라 모를 줄 알았는데.”

    검은 키프로스는 과거 대륙의 서쪽에서 유행하여 수백만 명의 인간을 죽인 전염병이었다.

    흡혈귀가 보유하고 있는 수많은 역병 중 하나였고, 흡혈귀에게 물려 블러드돌이 된 창부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전염병이었다.

    수많은 성직자들이 검은 키프로스를 극복하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결국 그 치료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정화의 교단’이라는 과격파가 나타나 역병의 창궐지로 나서 감염자들을 모조리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역 일대가 몰살된 후에야 가까스로 진정이 된 것이다.

    만약 누자베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쿠르헨 섬의 운명은 둘 중 하나다.

    모두가 검은 키프로스에 감염되어 고통에 신음하다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지.

    아니면 그 전에 정화의 교단이 도착하여 모든 것을 불태울지 말이다.

    물론 스텔라교단의 성처녀쯤 되는 고위 성직자가 나선다면 기적을 행사하여 치료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교도인 쿠르헨족을 위해 나서줄 고위 성직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너무 그렇게 쫄지마. 병원균은 꽤나 퍼진 모양이지만, 그걸 발현시킬지 그대로 사멸시킬지는 내 선택에 달려 있으니까.”

    혈족이 인간의 상위종을 자처할 수 있는 이유였다.

    어지간한 성인 남성을 맨손으로 찢어 죽일 수 있거나, 각종 짐승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거나, 심장을 은제 말뚝으로 박지 않는 이상 불사에 가깝다는 특성을 지닌 건 모두 부수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혈액을 다루는 능력만이 혈족이 경외를 사는 진정한 이유였다.

    전염병에 대한 항체를 심어두는 것도, 항체를 한 순간 모조리 없애는 것도 가능했다.

    누자베스는 이미 이 섬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을 인질로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검은 키프로스의 병증이 발현된다면 쿠르헨족과 주둔군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순식간에 죽어나갈 것이다.

    신의 가호를 받은 용사들이라면 몰라도, 평범한 인간은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바루크가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며 진중하게 물었고, 누자베스는 어깨를 으슥인 후 대답했다.

    “기괴한 기념품을 하나 얻어가고 싶은데. 혹시 이 섬의 특산물이 뭔지 알려줄 수 있냐?”

    시카르바 총독이 지니고 있는 비천익이라는 병기도 가치 있는 물건이었지만.

    그런 거로 만족하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누자베스가 노리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괴조’라고 불렸던 전설적인 전투기였다.

    * * *

    “우유. 차갑게 식힌 거로.”

    허름한 술집에 발을 들인 사내는 카운터 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그런 주문을 내뱉었다.

    술병을 닦고 있던 주인장은 이질적인 사내의 행색을 잠시 훑어봤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하지만 쿠르헨족에 비해 밝은 톤의 피부색.

    게다가 뭐로 만든 것인지 짐작이 안 될 만큼 기묘한 옷감으로 만든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외견은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지만,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상상조차 안 될 만큼 눈동자에 서린 어둠이 깊었다.

    피폐해진 눈빛만큼이나 지친 기색이 묻어나는 낮고 중후한 목소리.

    허리띠의 뒤쪽에 장검이 대각선으로 비스듬하게 걸려 있는 걸 보아, 떠돌이 모험가나 검객이라고 적당히 추측할 뿐이었다.

    “외지에서 오셨나 보군요.”

    주인장이 한 컵 가득 우유를 담아 건내며 슬쩍 물어봤지만, 사내는 주인장을 흘깃 올려다 봤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사내는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켠 후 주머니에서 금박이 입혀진 종이 한 장을 꺼내 유리컵 밑에 끼워 넣었다.

    우유 한 잔 값이라고 치기엔 과한 금액이다.

    주인장이 돈을 받아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이에 사내가 입을 열었다.

    “혹시나 이 우유를 마시고 취하는 녀석이 온다면 맞은편 여관에 알려줄 수 있겠나?”

    “우유를 마시고 취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없다면 그걸로 상관없다. 하지만 취하는 녀석이 있다면 알려줬으면 한다만. 사례는 이것과 같은 거로 열 장을 쳐주지.”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인장은 그제야 크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스스로도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사내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술집의 주인장은 사내의 모습이 똑바로 보였다.

    숨이 턱 막힐 만큼 끔찍하고 처참했다.

    왼쪽 눈이 찢겨 나가 외눈이었던 것이다.

    턱밑으로 끔찍한 화상 자국이 보였고, 왼쪽 팔 역시 어깨 아래쪽이 깔끔하게 잘려 나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른쪽 다리까지 불편한지 걸을 때마다 절뚝거리는 게 선명히 보였다.

    저런 만신창이 같은 몸으로 마물 퇴치 의뢰를 받아 생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눈과 팔의 반쪽을 잃었고, 걸음까지 불편할 만큼 다리를 절뚝거리는 모험가라니.

    그런 모험가가 존재할 리 없었다.

    마물 퇴치는커녕 동네 양아치들도 당해내지 못할 만큼 망가진 몸이었으니까.

    사내가 술집을 나서기 직전.

    입구 쪽에서 소동이 일었다.

    여자아이의 비명과 젊은 남자들의 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이 미친 새끼. 진짜로 할 작정이야?”

    “그렇다니까! 다음 급료일까지 창관도 못 가는데 어떻게 참아? 저번에 죠셉 얘기를 들어보니까 빈민가 애들은 뒤탈도 없다더라.”

    “우웩…… 나는 도저히 비위가 안 받아서 못하겠다. 너 임마 창관 가기 전에 거기 빡빡 닦고 가라.”

    쿠르헨 섬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 다섯.

    그리고 여자라고 보기에도 어려울 만큼 어린 소녀가 머리채를 붙잡혀 질질 끌려 오는 모습이 보였다.

    병사들이 소녀를 둘러싸고 거친 손으로 옷을 찢으려던 찰나.

    “사샤를 놔줘! 이 나쁜 자식들아……!”

    소녀보다 더 어려 보이는 소년이 뛰쳐들어와 병사들에게 덤벼 들었다.

    필사적으로 덤벼 들었지만 결과는 뻔했다.

    “아악! 이 애새끼가 물었어!”

    “크하핫! 임자 있는 여자한테 손을 대니까 그렇게 되는 거다.”

    “입 닥쳐! 이 망할 애새끼가 감히 왕국군의 병사에게 덤비다니……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아야겠구만.”

    빠악!

    소년에게 물린 병사가 일말의 힘조절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복부를 얻어맞은 소년은 쇳소리를 토해내며 고꾸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병사를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더러운 열등종 놈이…….”

    병사가 소년의 머리를 짓밟으려는 듯 발을 들어 올렸고.

    그대로 내리 찍은 순간.

    선혈이 벽면에 튀었다.

    “어……?”

    그런 얼빠진 소리가 병사의 입에서 새어 나왔고. 거의 동시에 몸이 갸우뚱거리며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큭, 크아아아악! 내 다리, 다리가아아!”

    그 누구도 제대로 목격할 수 없었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소년의 머리를 짓밟으려던 병사의 다리가 순식간에 잘려 나간 것이다.

    도대체 누가 검을 휘둘렀는지, 짐작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사내는 절뚝거리며 병사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세상엔 죽는 게 더 경사스러운 놈들도 있는 법이지. 이건 축의금으로 받아두는 게 어떤가.”

    사내는 금박이 입혀진 종이를 몇 장 꺼내 마룻바닥에 뿌렸다.

    “그 돈으로 창관이나 가면 더 이상 경사스러운 일은 없을 것 같다만.”

    “너, 이 자식…… 우리가 누군지 알고는 있는 거냐! 쿠르헨 주둔대에 손을 대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뭐, 뭐…… 뭐 하는 놈이냐!”

    병사들은 이미 사내의 기백에 밀려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사내는 지친 듯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용사는 처음 보나?”

    용사.

    그 한 마디에 병사들이 모두 얼어붙었다.

    류시혁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검을 뽑았다.

    아직도 칼날에 선혈이 맺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