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76화
그리하여 폭풍 속에서(5)
“누자베스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현실이란 다양성을 전부 포용할 만큼 따스한 환경이 아닙니다. 열등한 종자는 도태되어야 하고, 우수한 종은 번식을 장려해야 합니다. 장애를 지닌 아이를 스텔라 님의 곁으로 보내는 게 당연하듯, 도태되어 마땅한 인종 역시 존재하는 법이지요.”
다음 날 아침 누자베스와 다시 만나게 된 시카르바 총독은 격납고로 이어지는 통로를 걸으며 말했다.
“같은 맥락입니다. 쿠르헨 족은 인간과 닮은 짐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전하께서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내놈들은 게으르고 나태하며, 멍청하기까지 한 몽상가들뿐이고. 계집들도 크게 다르지 않죠. 하여간 쓸모없는 놈들뿐입니다.”
“가랑이 사이에 구멍은 뚫려 있지 않나?”
“그 점에선 사내놈들 보단 쓸만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시카르바는 킬킬 웃으며 누자베스의 농담에 맞장구를 쳤다.
비록 소속된 진영은 다르긴 했지만, 열도의 정세가 혼돈으로 치닫는 지금에 이르러선 큰 의미를 지닐 수 없었다.
결국 열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두 거인은 쓰러질 것이고, 야망을 품고 있던 군주들이 열도의 지배권을 손에 넣기 위해 일어설 것이다.
쿠르헨 주둔여단의 여단장 시카르바 역시 야망을 품고 있는 군주 중 하나였다.
주된 사냥감이 교접하지 않으며, 중부의 패자로 새롭게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누자베스 후작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게 최선의 처세일 것이다.
시카르바 총독은 담배 연기를 뻑뻑 뿜어내며 뒤따라오고 있는 누자베스를 슬쩍 훑어본 후 마른침을 삼켰다.
‘솔리엔 령의 트라이어드를 내쫓았을 만큼의 무력을 지닌 전쟁 군주라. 게다가…….’
동쪽으로는 불사의 왕 브람스.
서쪽으로는 대수림의 여왕 유리아와 마제 투아하를 끼고 중부 영토의 지배권을 굳히고 있었다.
중부의 3대 강호로 분류되는 이 셋은 본도 진출의 수문장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본도 진출을 성공시킨 하이브 마인드는 한 손에 꼽을 정도 아니었나?
유리아와 브람스가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할 정도의 전쟁 군주. 그 사실만으로도 누자베스는 이미 위험도 최상급의 전쟁 군주로 평가받고 있었다.
만약 현재 마족을 통치하고 있는 아일라드가 무너진다면, 차기 마왕으로 거론되고 있는 후보들이 중부의 3대 강호들 아닌가?
만약 이 셋과 비등한 무력을 지니고 있다면, 누자베스도 마왕의 후보에 이름을 올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 론트라 섬의 극동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건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지금은 점수를 따놔야겠지.’
시카르바 총독은 허리와 머리를 낮게 숙이고, 얇게 사는 법을 터득한 사내다. 거인들의 싸움터에서 명줄 붙잡고 있을 요령은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어찌되었든 저는 이른바 환경 보호가의 책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가지를 치고, 잡초를 뽑아내고, 그릇된 싹을 솎아내어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일하고 있는 것이죠.”
“환경 보호가라기보다는 조경사 같은 일이로군.”
“전하께서 정원을 지니게 되신다면 허드렛일을 할 조경사 한 놈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전하께서 지니게 되실 건 바체트 열도라는 이름의 정원입니다.”
시카르바 총독의 번지르르한 아부에 누자베스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총독은 엉덩이 빠는 게 능숙하군. 여기서 더 체류하다간 엉덩이가 다 헐겠어.”
“전하를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핥아 보이겠습니다. 물론, 저 같은 천한 것이 몸을 누일 곳간을 하나만 마련해 주신다면.”
“그리고 전주인이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목책도 좀 쳐줘야겠군.”
“황송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격납고로 향하고 있었지만. 누자베스는 시카르바 총독의 감언에 마냥 헤롱거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카르바 같은 부류의 인간은 자기 보신에 필사적인 법이다. 상대가 마족이든, 반란군이든 간에 강한 쪽에 붙어 콩고물이나 주워 먹는 게 고작인 사내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백주월의 정반대에 속하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백주월은 스스로가 부서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테니까. 자기 파괴조차 그 포악한 성깔의 범주에 든다는 의미다.
‘역시나 이 자식은 마음에 안 드는군. 아니,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마치 백주월은 마음에 든다는 것처럼 들리잖아.’
비굴한 사내가 눈앞에 있는 게 불쾌할 뿐이다. 긍지를 죽이고, 감정을 숨긴 채 고개를 조아리는 사내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란 그게 전부였다.
손끝이라도 닿았다간 온몸이 녹아버릴 만큼 뜨거웠던 살의와 투기를 떠올리며, 누자베스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제야 루칸다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밑바닥의 삶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사랑이라던가 애정 따위는 미적지근하게 느껴질 만큼, 수컷이 지닌 투쟁과 파괴의 욕망은 뜨거운 법이다.
결국 침전되어 응어리진 감정에 불을 붙이는 건 이미 발화된 누군가의 살의뿐이었으니까. 성욕에서 비롯된 사랑 따위의 불분명한 감정보다, 피할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는 숙명 같은 싸움에 타오를 뿐이다.
중추 신경이 모조리 뒤틀릴 만큼 치솟는 고양감에 흥분하는 경험을 한 번이라도 맛봤다면, 이제 와서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노골적인 살의, 열기를 머금은 날숨이 뒤섞이는 소리. 생사의 경계를 드나들며 밟았던 살사 댄스의 스탭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누자베스는 리제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누자베스와 백주월이 닮은꼴의 인간이라면, 이런 흥분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서로가 유일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반드시 한쪽이 죽어야만 가까스로 진정되는 열기를 품고 만 것이다.
“그래서 나한테 보여줄 게 뭔지 아직도 말해줄 수 없나?”
누자베스는 시카르바 총독에게 그렇게 묻자.
“다 왔습니다. 바로 이 격납고입니다.”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문을 열자, 거대한 실내가 드러났고. 누자베스는 시카르바 총독의 의기양양한 미소를 뒤로한 채 앞으로 나섰다.
“비천익이라고 불리는 차세대 병기입니다. 이 병기는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꿀 물건이라고 확신하고 있죠.”
“멋지군.”
누자베스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이걸 원해서 쿠르헨 섬까지 힘든 걸음을 한 거니까 말이다.
대륙제의 비천익 열여섯 기가 가지런히 정렬해 있었다. 그 외견은 1차 세계대전 초기에 투입된 단엽기와 닮아 있었다.
‘고정축 기관총과 동조 장치까지 구현해낸 건가……. 이건 확실히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수준인데.’
누자베스가 사뭇 감동한 듯한 눈빛으로 비천익을 바라보고 있자, 시카르바 총독이 옆으로 다가와 설명을 덧붙였다.
“시속 200킬로미터의 속도로 비행할 수 있으며, 최고 고도는 3000미터입니다. 그 어떤 생물보다 높이 날 수 있는 병기죠.”
“드래곤 부대의 제압용으로는 제격이겠어. 이 8㎜의 기갑탄이 녀석들의 가죽을 뚫을 수 있다면 말이야.”
“특수 주조한 멸룡탄이라면 드래곤에 충분히 통용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저 괴조의 소문을 쫓아 여기까지 왔지만. 이건 상상 이상의 성과였다. 누자베스가 이 세계로 끌려온 뒤로 목격한 병기 중에선 ‘최강’에 속했다.
비행 고도와 시속은 근대의 전투기에 필적할 정도다. 이런 병기가 운용된다면 그 잘난 드래곤 라이더 부대도 느릿하게 얕은 고도를 날아다닐 뿐인 표적판에 불과했다.
시카르바는 이 비천익의 매입 루트를 확보하고 있었고, 본영에도 알리지 않은 채 10년 이상 파일럿 육성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떠십니까, 전하? 실제 운용을 보시겠습니까?”
“가능하다면 부탁하고 싶군.”
누자베스가 흥미를 보이자, 시카르바가 바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구석에 있던 젊은 병사 하나가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오른쪽 다리를 잃었는지 의족을 차고 있었고, 한쪽 손으로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걷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듯 보였다.
‘구리빛의 피부. 검은 눈동자와 머리카락. 하기야 어딜 가든 배신자 놈이 존재하는 법이지.’
왕국군의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병사는 쿠르헨 족이었다. 병사는 나열된 비천익 중에서도 유일하게 군청색으로 도색된 기체에 탑승했다.
다른 비천익이 평범한 무광 회백빛인 것에 비해 눈에 띄는 도장이었다.
‘하지만 이 비천익이 그 소문의 괴조일 리는 없겠지.’
누자베스는 잠시 괴조에 관한 정보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아, 어서와 바루크!”
바루크가 허름한 오두막에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그를 반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름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아이들이 여섯 명 정도, 그리고 안쪽에는 병상에 누운 노인들이 셋 정도 더 있었다.
모두가 구릿빛의 피부를 지닌 쿠르헨 족이다. 글로레나 왕국의 군대가 이 섬을 점령한 이후, 쿠르헨 족은 삶의 터전을 잃었고.
이렇듯 삶의 터전을 되찾기 위한 힘조차 없는 어린아이와 노인들은 숨을 죽인 채 간신히 연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루크는 창관에서 일하는 쿠르헨 족의 여인들에게 받은 돈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이 돈이면 일주일 정도는 어찌어찌 버틸 수 있을 거야. 지르코 할아범 약값도 이걸로 해결해.”
“응! 어젯밤에 약이 다 떨어져서 아슬아슬하던 참이었어.”
오두막에 살고 있는 아이들 중 가장 어른스러운 아이는 올해 14살이 된 미야였다. 미야는 바루크에게 받은 돈을 소중하게 챙긴 뒤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저기 바루크…….”
“왜? 아, 돈이 부족한 건 알고 있어. 그건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니까. 다른 녀석들도 챙겨줘야 하니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 그런 게 아니야! 나도 창관에서 일하고 싶어!”
바루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미야를 바라봤다.
바루크가 마을의 여자들을 꼬셔서 창관에 팔아먹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을 연기하고 있는 것뿐이지만, 실제로 창관에 들어가기 위해선 바루크의 소개를 거치는 게 가장 빠르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살아남는 게 이기는 것이다라…….’
바루크는 생전에 아버지의 입버릇을 떠올렸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바보 같을 만큼 낙천적인 남자였다.
그리고 꿈을 꾸는 소년이기도 했다.
바루크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더 밑바닥으로 떨어져야 하는 것일까. 정말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건가.’
쿠르헨 족의 완전한 자치권 탈환과 독립은 이미 꿈에 가까운 이야기가 되었다.
글로레나 왕조가 론트라 섬의 동부를 완전히 장악한 굳건한 국가가 된 이후부터 말이다.
“바루크…… 부탁이야!”
바루크는 이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미야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솔직히 미야 너처럼 깡마른 어린애를 누가 돈 주고 사겠냐.”
“거짓말! 어릴수록 비싸게 팔린다고 사람들이 그랬어.”
“그거야 그런데…… 어리고 예쁜 애를 좋아하는 거지. 미야 넌 와꾸가 안 돼, 와꾸가. 내가 손님이라도 오히려 돈을 받아야 될 것만큼 못생겼잖아.”
“너무해…….”
바루크는 미야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말했다.
“힘들겠지만, 모두가 힘들겠지만 말이다. 조금만 더 참자.”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목에 늘 걸고 있던 팬던트를 손끝으로 훑었다.
불꽃과 부활.
그것만이 이솔레트가 쿠르헨 족에게 약속한 은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