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75화
그리하여 폭풍 속에서(4)
인간들의 창관은 흡혈귀에게도 중요한 생활 시설에 속한다.
낮보다 밤에 성행하며, 이성이 제대로 동작하는 인간의 수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간들이 군집한 지역이라면 반드시 창관이 존재하니, 인간을 주식으로 삼고 있는 흡혈귀들은 창관의 이용법을 숙지해 두는 게 기본이었다.
창관에서 이뤄지는 행위가 은밀성을 내포하고 있는 이상. 흡혈귀와 1:1의 상황이 필연적인 이상.
이보다 더 흡혈귀가 인간들의 사회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좋은 환경은 없었다.
몇몇 혈족은 뒤쪽에서 은밀하게 인간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창관 같은 환락 시설을 적극적으로 유치했다고 한다.
‘벤파흐의 아이들이 곧잘 이용하는 방식일세. 주군도 이제 어엿한 혈족의 일원이니 창부를 다루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네. 슬러밍 연습까진 바라진 않지만, 피걸레를 만드는 방법 정도는 숙지해 둬야겠지.’
스칼렛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창관의 안쪽 복도를 따라 걸었다. 주홍빛의 에텔라이트 등불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첫 번째로 흡혈흔을 남기지 않는 것. 두 번째로 가변적인 빈큐럼을 거는 것. 세 번째는 퇴로 확보를 위해 피를 썩게 만드는 전염병을 남기는 것. 벤파흐의 아이들은 오랜 시간 수많은 혈족의 레그넌트로 군림하며 이런 요령을 터득했네.’
‘꽤나 신중한 편인데 왜 멸절됐어?’
‘운이 없었다고 해야겠지. 하필이면 천하무적단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브람스도 천하무적단 출신이라며? 아주 엿되는 놈들만 모아 놓은 먼치킨 집단이겠구만.’
혈족들 사이에선 ‘인빅투스’ 혹은 ‘제1신분’이라고 불리는 최정예 흡혈귀 무장 집단이 바로 천하무적단이다.
음, 그러니까…….
쉽게 설명하자면 3대 700을 치는 덩치 형님들로 구성된 애국보수 집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놈들은 모든 혈족이 ‘고혈종’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원죄의 아버지 나르시안을 신격화하여 직계 자손들을 가장 가치 있고 존귀한 존재라 믿는 것이다.
자신들을 칭하는 ‘제1신분’이란 호칭도 실질적 0순위인 ‘상속 신분’의 다음으로 고귀한 존재란 의미 아닌가?
그러니까 이 먼치킨 형님들의 시점에서 보자면 스칼렛은 바쿠네…… 아니, 이런 비유는 그만두자.
어쨌거나 스칼렛이 어디 가서 뺨이라도 한 대 맞았다간, 이 천하무적단이 개거품을 물고 뺨을 친 놈을 찾아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란 말이었다.
‘나, 나도 스칼렛이랑 동위계니까 백주월한테 붙잡혀서 죽빵 처맞게 되면 구해주지 않을까?’
잠깐 그런 희망 섞인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제니’라는 창부가 대기하고 있는 방에 도착했다.
‘은밀한 정보 수집을 위해선 완전한 종속 상태보다 부분적 복종 상태를 만드는 게 합리적이라고 했지.’
그리고 흡혈귀에 의해 ‘썩은 피’의 상태가 된 인간은 점막 접촉이라든가 타액의 교환을 통해 새로운 감염자를 만들어낸다.
이 창관을 이용하는 주요 고객층이 글로레나 왕조의 주둔군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면, 적지 않은 수확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무분별하게 흡혈귀 소굴을 만드는 것만큼은 지양해야지.’
첫 번째로 위험도가 올라갈수록 최상위 처형자인 ‘용사’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로는 난잡한 포옹으로 개체수가 늘어난 혈족은 필연적으로 제1신분 놈들의 처단 대상이 된다.
현재 스칼렛이 브람스를 통해 들은 정보로는 바체트 열도의 최남단 ‘마르하바 서도’에 천하무적단의 프리스커스 다섯이 도착해 있다고 한다.
천하무적단 출신의 프리스커스 다섯 마리가 어느 정도길래 벌써부터 긴장 빨고 있어야 되는 것인가?
불사의 왕 브람스가 지금은 ‘프린스’의 직위를 지니게 됐지만, 그 녀석 역시 천하무적단 출신의 프리스커스였다.
그리고 브람스는 작중에서 백주월과 거의 호각으로 싸웠던 흡혈귀다. 그런 놈이 무려 다섯 마리다!
솔직히 프리스커스 다섯 마리면 류시혁이라든가 백주월도 한 수 접고 줄행랑을 쳐야 될 수준이다. 어지간히 빡친 상태가 아닌 이상은 말이다.
‘나야 뭐…… 어지간한 잘못이 아닌 이상 스칼렛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있으면 건드리진 못하겠지.’
그러니까 이런 창관에서 창부 하나나 둘 정도 감염시키는 건 괜찮을 것이다.
덩치가 문을 닫고 나간 후. 제니라는 창부와 단둘이 남게 되었고, 바로 사안의 매혹을 걸 작정이었지만.
방밖에서 요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겁고 투박한 군화의 굽이 복도를 울렸다.
‘한 놈이 아닌데.’
셋이다.
그러니까 너무 사이가 좋은 친구들이라 오늘밤에 창부와 4P를 하고 싶어서 창관을 찾아왔다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발소리는 명확하게 내가 있는 방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바깥쪽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잠시 들렸지만, 이내 정리가 되었는지 잠잠해졌다.
콰앙!
발에 걷어차인 문이 거칠게 열렸고, 드디어 나를 찾아온 놈들의 정체가 확실해졌다.
글로레나 왕국군의 군복이다.
가슴에 새겨진 문양을 보자면, 수도에서 파견된 추적대가 아니라. 이곳 쿠르헨 섬에 주둔하고 있는 주둔대 소속의 군인이었다.
“혹시 몰라 말해두지만 사내 넷이서 창부 하나를 데리고 노는 취미는 없다만.”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는 동안 창부가 방을 빠져나갔고, 남은 군인 놈들이 내 퇴로를 차단하듯 정면과 양옆을 가로막았다.
“쿠르헨 주둔여단 11연대 소속의 베이커 3익 준관입니다. 신분이 확인되지 않은 타지인이 있다는 신고를 받았습니다.”
“이곳은 초행이라 몰랐는데. 다들 신고 정신이 투철하군.”
“외람되지만 신분을 밝혀 주셔야겠습니다. 만약 신분이 확인되지 않을 시 총독령에 의해 보호 구금 조치가 될 수 있음을 미리 고지해드리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명함이라도 하나 파서 가지고 다닐 걸 그랬다. 내가 누군지 입아프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되도록이면 접점 없이 끝내고 싶었는데.’
내가 간섭하게 될 수록 이 세계는 뒤틀려 간다. 지금까지 이 세계에서 살아오며 깨달은 사실이다.
물론…… 내가 뭐 대단한 환경보호가라서 이 세계를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아니고. 그저 뒤틀릴수록 내가 알고 있던 전개에서 엇나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정체를 인지당할 바엔 가짜 가면을 뒤집어쓰는 게 상책.’
품속을 뒤적여 순금제 씰스탬프를 꺼냈다. 항상 소지하고 있는 물건 중에선 이게 가장 알아보기 쉬울테니까.
씰스탬프를 휙 던져주자 뒤에 있던 병사들이 냉큼 받았다.
병사들은 씰스탬프를 살펴보기 시작했고, 무슨 문양인지 알아보지 못한 건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어디 가문이야?”
“이딴 가문 문양은 본 적이 없는데.”
병사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일변했다. 귀족집의 도련님인 줄 알았던 놈이 별것도 아닌 놈이라고 깨달은 표정이다.
만에 하나 귀족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모를 만큼 몰락한 가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봐, 어디 출신인지 똑바로 말해.”
“어디 벽지의 촌놈인 모양인데 쿠르헨에선 주둔대가 곧 법이다. 다리를 풀고 똑바로 앉아라.”
“이것 참…….”
나도 꽤나 유명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수도의 북부 촌동네까진 많이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다.
병사 놈들이 자연스럽게 내 씰스탬프를 주머니에 챙기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담배 불 꺼 이 새끼야! 장난치는 것 같나!”
병사 한 놈이 내 입에 물려 있던 담배를 낚아채 내던졌다.
어쩔 수 없이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내 다시 입에 물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후회할 짓을 하지. 그러니 지금의 무례는 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겠네.”
위압적인 분위기에도 전혀 주눅드는 기색이 없자, 뒤에서 대기하던 부사관 놈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씰스탬프를 챙긴 병사에게 손을 내밀며 내놓아 보라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베이커 준관님. 이거 완전 본 적도 없는 가문 문양입니다. 갈라우드와 비슷하긴 한데.”
병사는 확인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투덜거리면서도 씰스탬프를 베이커 준관에게 넘겼다.
베이커 준관은 씰스탬프의 문양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고, 역시나 무슨 문양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잠깐.”
“최근에 본 기억이 있나?”
내가 킬킬 웃으며 묻자, 베이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동공이 떨리는 게 이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도 또렷이 보일 정도다.
병사들도 그런 베이커의 반응을 보더니 덩달아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리카의 전쟁 군주…….”
“오, 이제야 정답에 가까워졌군. 뭐하고 있나? 마물놈들의 대장이 눈앞에 있는데 수도에 보고하지 않는 것인가?”
이미 내 정보는 각지에 주둔중인 병단에 전파되었을 것이다.
아리카의 그란델이자, 시트란테 총독 대신이며, 본도의 중부를 집어 삼키고 있는 신흥 전쟁 군주로써 말이다.
그리고 내 둥지 아릿카사를 상징하는 문양. 국화꽃을 물고 있는 삵이 새겨진 씰스탬프다.
베이커가 냉큼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고,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었다.
“떠오르는 태양 누자베스 관현전하의 존안을 뵙습니다.”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래서 눈치 보며 짬을 먹은 늙은이들이 장수하는 것이다. 중앙군의 제어에서 비교적 자유로워 독립여단 취급을 받고 있는 쿠르헨 주둔대의 입장에선 딱히 이적행위도 아니고 말이다.
아리카의 전쟁 군주를 생포하거나 처리하여 빛나는 공로를 세우겠다? 그런 허황된 망상을 품고 있는 놈일 수록 금방 죽는 법이다.
저 정도로 짬을 먹었다는 건 지극히 현실적인 처세가 누적된 결과였다.
“이곳의 총독이 누구였더라?”
이제는 완전히 상하 관계가 정립된 상태다. 베이커 준관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프란세카의 시카르바 각하입니다. 주둔여단의 여단장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프란세카라면 프로릴의 남서쪽에 위치한 연안 도시로군. 내가 조금 방문이 빨랐나?”
“누자베스 전하…… 저기, 그게…….”
“이보게, 부사관. 같잖은 잔머리를 굴리는 건 군인의 본분이 아닌 것 같은데.”
인간은 상상력 때문에 고통받는 생물이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내가 괴조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 촌구석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구태여 밝힐 필요는 없었다.
마침 이곳의 총독이 프란세카 출신이고, 내 군단이 중부를 빠르게 집어 삼키고 있다는 정보와 병합되면 알아서 오답이 도출되는 법이다.
병사들이 후다닥 뛰어 방을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교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쿠르헨 섬의 실질적인 지배자 시카르바 총독이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는 거야? 이 새끼 설마 창관에서 놀고 있었나?’
어쨌거나 시카르바는 내가 담배를 입에 물기가 무섭게 불을 붙이더니 고개를 조아리며 헤실헤실 웃었다.
“아이고, 아이고 참으로 짓궂으십니다, 누자베스 전하.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셨으면 성대하게 준비를 해놨을 텐데 말입죠.”
“이런 귀하신 곳에 누추한 놈이 찾아오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렇게 호들갑인가? 잠시 중앙군 놈들을 따돌릴 때까지 귀관의 관할지에서 지낼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나?”
시카르바의 얼굴이 미소를 지은 채 굳었고, 놈이 머리를 굴리기 전에 뺨을 갈겼다.
짜악!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고, 시카르바가 뺨을 부여잡은 채 나뒹굴려고 하는 걸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지금 줄 서야 되는 곳이 어딘지 계산하고 있었냐? 잘 듣게, 총독. 내 명령 한 마디면 당장 쿠르헨 섬은 물론이고 프란세카까지 지도에서 깔끔하게 지워버릴 수 있어.”
“아,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게 아닙니다, 전하! 바체트 열도의 새로운 주인이 되실 분과 지는 태양을 어찌 감히 제가 비교하려 하겠습니까!?”
“영리하게 굴게, 총독. 지금 누구와 대면하고 있는지 유의하란 말이다.”
“무, 물론입죠! 바체트 제국을 군림하실 누자베스 관현전하의 앞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겠습니다!”
시카르바의 멱살을 놔준 후, 빙긋 웃으며 어깨를 다독였다.
“알았으면 도망간 창녀나 다시 데리고 와. 일 얘기를 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나?”
창부들을 정보책으로 삼고 있는 그 파르티잔 놈의 꼬리를 붙잡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