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74화 (174/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74화

    그리하여 폭풍 속에서(3)

    “2번과 8번 시간추가 수정되었음을 고지하겠습니다. 연결 고리의 일부가 유실된 덕분에 몇몇 시간대가 박리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행동해 주시길.”

    타르틸리엇이 탈취되고 이틀 뒤.

    백주월은 언제나 시간을 보내던 찻집에서 다시 한번 로브 차림의 여성과 조우하게 되었다.

    로브 차림의 여성은 담담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보고를 이어나갔고, 백주월은 자신의 피어스로 만든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들었다.

    “추가적으로 공정성을 위하여 현 시간을 기점으로 기록보관소에 모든 시간선이 실시간으로 저장됩니다. 박리 차원 도약 및 되감기에 의한 일부 간섭이 불가해집니다.”

    쉽게 말하자면 장르 변경이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지금까지는 세이브 포인트가 존재하는 RPG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 이후부터 ‘로그 라이크’ 형식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면 됐다.

    저장 데이터와 저장 데이터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간섭할 수 있었기에 지정된 저장 데이터를 로드하여 편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용사 류시혁과 백주월에게 허락된 ‘메모리얼 전투’라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이 시간선 이전에 행해진 차원 도약에 관한 제재 사항은 없습니다.”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해주려고 여기까지 힘든 발걸음을 한 건 아니겠지, 슬레뷔네?”

    로브 차림의 여성.

    테네브레의 전령이자 중재자 슬레뷔네는 고개를 끄덕인 후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입꼬리에서 오른쪽 뺨을 타고 귀밑까지 찢어진 끔찍한 상처가 드러났다.

    예리한 날붙이로 무자비하게 찢어낸 흔적이었다.

    “닷새 내에 용사 류시혁이 이 시간선으로 도약하게 됩니다.”

    과거인지 미래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백주월에 유일하게 비견될 수 있는 무력을 지닌 또 다른 용사 류시혁이 무언가의 목적을 지니고 이쪽 시간선으로 도약해 온다는 것이었다.

    “메모리얼 전투의 타깃은…….”

    슬레뷔네의 시선이 백주월을 향했다.

    백주월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마도 이렇게 태연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건 세계를 통틀어서 백주월 뿐일 것이다.

    류시혁은 왕정파가 소환해낸 최강의 용사다. 그에게 붙은 ‘최강’이라던가 ‘무적’이라는 수식어는 조금도 과장이 섞이지 않은 진실이었고 말이다.

    그런 류시혁의 사냥감이 되었다니?

    그 대상이 누구든 간에 사형 선고와 다를 바 없었다. 죽음이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당연하게도.

    백주월만큼은 예외였다.

    만지작거리던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 걸며 백주월이 입을 열었다.

    “언젠가 해결해야 할 일이었지. 내 오랜 지론에 따르자면, 항상 눈에 거슬리는 건 짭새가 아니라 동종업자니까. 도약 위치는?”

    “쿠르헨 섬입니다.”

    쿠르헨 섬은 수도에서 북쪽으로 300킬로미터 떨어진 벽지였다. 백주월은 탈취된 타르틸리엇의 예상 이동 경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류시혁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는 몰라도, 백주월 역시 그에 충분히 필적하는 ‘용사’였다.

    맞붙게 된다면 결코 시시한 결과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이번에도 슬레뷔네는 자신이 할 말만 끝마친 후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고, 타이밍 좋게 모니카가 찻집에 나타났다.

    모니카는 백주월을 향해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나무 상자를 바로 테이블에 올려놨다.

    “에르바키나 상회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대륙을 왕래하는 밀수업자에게 구했습니다.”

    “수완이 좋네. 이런 해괴한 물건은 구하기 힘들 줄 알았는데 하룻밤 만에 구해오다니. 은근히 흔한 물건인가 봐?”

    “그건 아닐 겁니다…… 어지간한 재력과 연줄 없이는 존재 자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니카가 가져온 나무 상자를 열어보자, 안에는 손가락만 한 플라스크에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음용하면 성별이 반전되는 약물이었다.

    용량에 따라 지속 시간이 다르긴 했지만, 확실한 건 이 정도 용량을 단번에 마실 경우 영구적으로 성별이 변경된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물건을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모니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백주월은 플라스크를 꺼내 들어,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을 뿐이야.”

    여전히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모니카가 백주월의 행동에 일일이 간섭하며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백주월이 해야 할 일만 제대로 해준다면 말이다.

    “정식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타르틸리엇을 훔친 마물이 바로 그 ‘누자베스’인 모양입니다. 누자베스를 토벌하고 타르틸리엇을 되찾는 것이 저희의 첫 번째 임무가 되었습니다.”

    “여러모로 상황이 편리하게 굴러가 주네.”

    백주월은 성별반전의 비약을 주머니에 챙긴 후 의자에서 일어났다.

    류시혁은 백주월이 닷새 안에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려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쿠르헨 섬이다.

    그곳에 누자베스가 있을 것이고, 백주월이 녀석을 쫓기 위해 쿠르헨 섬에 도착했기에 류시혁 역시 그곳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매우 간단하고 심플한 추론 과정이다.

    ‘이번만큼은 무대를 준비할 시간이 없을 거야, 누자베스.’

    지상 위에서의 전투라면 백주월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지난번 지하 수도에서 만났을 때처럼 미적지근한 싸움은 없을 것이다.

    * * *

    마을에서 만난 꼬마들을 데리고 식당에서 밥을 먹던 누자베스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젠장, 갑자기 오한이 드네.’

    밤의 숲길에서 몸을 숨긴 맹수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으면 딱 이런 느낌이 아닐까?

    어쨌거나 식탁 맞은편에 앉은 아이들을 슬쩍 바라보자, 접시에 든 음식을 집어삼키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게걸스럽게 먹는 쪽은 남동생처럼 보이는 남자애 쪽이었고, 여자애는 입을 닦아주거나 흘린 음식을 치워주느라 꽤나 바빠 보였다.

    “안 뺏어 먹으니까 천천히 먹어 짜식아. 야, 너도 좀 먹고. 아니, 고기를 씹어 먹으라고! 무슨 유동식 먹는 것처럼 통째로 삼키지 말고.”

    보다 못한 누자베스가 남자애 쪽을 데려와 자신의 옆에 앉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희미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무슨 꽃이었지?’

    누자베스는 잠시 이 향기가 무슨 꽃의 향기인지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칠면조의 살을 발라내며 여자애 쪽을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너희들 혹시 괴조에 관한 소문 같은 거 들어본 적 있냐?”

    남자애는 누자베스가 발라준 칠면조 살을 집어삼키느라 정신이 없었고, 소녀 쪽이 잠시 손을 멈추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대답했다.

    “괴조가…… 뭔가요?”

    “이 칠면조 같은 건데, 아니 칠면조는 아니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처럼 생겼는데 이상하고 요상하게 생긴 거 말이다. 사람도 타고 다니고.”

    “사람이 타고 다니는 커다란 새요?”

    “그래! 꼬마 숙녀께서 아주 천재적이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먹고.”

    소녀는 식사를 대접해 준 누자베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는지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려 보려 애썼다.

    “괴조인지는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그런 게 있었다는 거 같아요.”

    “그 부분을 상세하게 말해봐.”

    “왕국군이 침략해 왔을 때 붉게 빛나는 날개를 지닌 이솔레트 님의 사자가 침략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냥 헛소문이라는 어른들도 있지만요…….”

    이솔레트는 바체트 열도의 토속신 중 하나였다. 스텔라교가 이 열도를 지배하기 전까진 수백만의 토속신이 인간들과 함께했다고 전해진다.

    이솔레트는 불꽃과 부활을 관장하는 토속신이었기에 쿠르헨 족은 화장 풍습을 통해 소중한 이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다.

    ‘이솔레트의 사자. 붉은 날개. 괴조에 관한 키워드를 몇 갠가 더 추가해 놔야겠군.’

    누자베스가 잠시 새로운 정보를 기억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소녀가 또 뭔가를 떠올린 것처럼 보였지만.

    이번엔 바로 말하지 않고 누자베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뭐야? 뇌에서 필터링하지 말고 아는 거 있으면 죄다 말해.”

    “그게…… 이건 확실치 않은 건데…… 확실하지 않다기보다는 그냥 좀…….”

    “말해보라니까.”

    “사실 귀족님께서 말씀하신 괴조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알고 있다고 해야 할지, 알고 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그 얘기를 가장 먼저 했어야지! 오늘 이 식당 식재료 거덜 날 때까지 먹어도 되니까 바로 말해봐.”

    누자베스는 드디어 괴조의 실마리를 잡은 듯했다.

    * * *

    “당장 꺼져 바루크! 돈도 없는 주제에 여긴 왜 기웃거려!”

    “거 참 세상 각박하네. 돈이 없으니까 보기만 하는 거 아니요? 아가씨들 보는 것도 돈 내야 된다는 법이 있나, 엉?”

    “네놈 같은 비렁뱅이가 어슬렁거리면 손님 떨어진다고. 혼쭐나고 싶지 않으면 좋게 말할 때 꺼져라.”

    쿠르헨 섬에 환락가가 만들어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작은 규모의 마을이었기에 창부가 몇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큰 규모의 환락가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국군이 쿠르헨 섬을 점령하고 주둔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주둔군을 상대로 하는 창관이 늘어났고, 거대한 환락가가 된 것이다.

    이제는 쿠르헨 섬에서 가장 큰 소득을 내고 있는 주요 사업이었다.

    그리고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 ‘바루크’는 매일 같이 이 환락가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물론 그의 비루한 행색을 보자면 창부를 살 돈은커녕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것 같았지만 말이다.

    창관의 경비일을 하고 있는 덩치 큰 사내가 바루크를 밀쳐냈지만, 바루크는 집요하게 다시 찾아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이제는 창관의 아가씨들에게 유명 인사 취급을 받을 만큼 별난 인간이었다.

    “오! 마리야 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예뻐졌네. 제니도 오랜만이야. 오늘 의상 센스 좋은데? 돈도 없는데 괜히 불끈불끈해지네, 하핫!”

    “바루크, 돈 생기면 놀러 온다고 말한 지가 석 달째야. 언제 놀러 올래?”

    “티냐 넌 세 번째로 놀러 가겠다고 말했잖아. 그리고 요즘 여러모로 바빠서 놀아줄 새가 없네. 어제는 비가 왔나? 길이 왜 이렇게 질척하지? 아, 오늘 점심은 야채 스튜였는데 엄청 맛있었다고.”

    바루크는 이곳의 아가씨들과 꽤나 친밀한 관계처럼 보였다. 유쾌하고 호탕한 성격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창관의 아가씨들은 바루크가 아무렇게나 내뱉어대는 지리멸렬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누자베스가 얕은 미소를 머금었다.

    ‘파르티잔 놈. 군인을 상대하는 창부들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다시 지령을 내리고 있군.’

    이곳을 방문하는 군인들은 대다수가 거하게 취한 상태였고, 저런 별종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할 리도 없었다.

    어느 가게의 아가씨가 예쁘장한지 살피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누자베스의 눈에는 바루크의 정체가 선명히 보이고 있었다.

    ‘저 녀석이 괴조의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정신병자라고 했지.’

    바루크는 마땅한 직업도 없이 잠이나 퍼질러 자다가 밤이 되면 환락가에서 어슬렁거리는 게 전부인 청년이다.

    마을에서도 그렇게 알려져 있었고, 주둔군들 역시 그 정도의 인식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나으리. 찾고 계시는 아이가 없으시다면 저희 가게에 잠깐 들러 보시겠습니까?”

    방금까지 바루크와 실랑이를 벌이던 덩치가 누자베스에게 다가와 굽신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저 제니라는 아이가 좋을 것 같은데.”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어지간해선 예약이 꽉 차 있을 만큼 인기 있는 아이죠. 오늘 딱 알맞게 오셨습니다.”

    누자베스가 덩치를 따라 입구 쪽으로 향하려던 찰나. 슬쩍 시선을 돌리자, 역시나 바루크가 멈춰선 채 누자베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족처럼 보이는 낯선 이방인.

    바루크의 눈빛이 진중한 빛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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